소설 몰이꾼(하) - 문상오 *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작가 소개 7. 빗길 8. 라이브쇼 9. 그리고 떠도는 손님별 10. 동천(冬天), 박제된 신들의 절규 11. 덫 12. 다시 동구에 서다 작가 소개 작가 문상오는, 1958년 충북 단양에서 출생하여 1990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소무지"가, 1991년 농민신문사에서 주최한 새농민창간기념공모에 단편 "그 찬란한 빛, 어둠에서 오다"가 각 당선하여 문단에 나왔다. 1992년 "동백예술상"을 수상하였고, 작품집으로는 "소무지"가 있다. 현재 한국소설가협회와 문인협회, 아주작가연맹,농민문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주로 다루는 대상은 소시민과 농민, 노동자 등 이 사회로부터 방치되었거나, 삶의 터전이 뿌리뽑힌 자들이다. 어둡고 음습하며, 세상의 그 어떤 구원으로부터도 차단된 역외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절박한 상황을 가식없이 그려낸다. 그의 언어에는 해학과 독설이 있다. 웃음이 있고, 그 웃음을 다 마치기도 전에 가슴이 철렁한 비유가 있다. 흐르는 물이었다. 바람이 되기도 하고, 장대비로 쏟아지는 소나기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그들 자신을 비춰주기도 하고 답답한 가슴을 씻김질하기도 하며, 또 어느 때는 그들과 같이 통곡하기도 한다. 어느 일간신문에 연재를 마치고 난 다음, 그가 한 말을 들어보자. "인간사 시비곡직이란 어차피 다수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고기가 물을 보는 눈과 같이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눈 또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피투적(被投的)이고자 하나 기투적(旣投的)인, 그래서 자의란 말은 어디에도 없고 오직 정형화되고 예비되어진 숙명이란 틀 안에서 아둥거리다 한세상 마감하고 마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이라고, 어쩌면 딱 부러지게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말이다. 실없이 살다 속절없이 가버리는 게 인생이란 것일지라도 말이다. 사람에겐 저마다 지긋한 사랑이 있지 않겠더냐. 남녀간에 꿀도 붙고 새끼도 치고, 이웃하고는 엄배덤배 어울릴 줄도 아는 그런 사랑 말이다. 이게 사는 재미요, 내일을 유기할 수 없는 이유라 할 것이니, '썰'을 풀던 설을 쓰던 소설이란 것도 다 이에 다름 아닐 것이다." 7. 빗길 1. 두 장의 차표를 거머쥔 상국이 빨간 공중전화가 매달려 있는 곳으로 뛰었다. 불똥 맞은 더펄개처럼 허우적거리는 꼴이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히, 밸 눔... 요샌 멀미약에두 청산가릴 섞남? 허긴, 배배 꼬인 창사군게 바루 잡자믄 독헌 약을 써야 허것제... 혀두 그ㄹ지. 돈두 ㅇ을 틴디 과용헌 모양이다 야. 배추단처럼 웅크리고 앉아있던 한국이 지레 눈을 딱 감았다. "야야, 가자. 가! 시간ㅇ어." 득달같이 뛰어든 상국이 한국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한 짐은 거웃 되는 엉덩이를 힘겹게 일으키던 한국이 빤한 눈으로 상국을 쳐다본다. "완행에두 무신 시간이 따루 있는겨. 암 데서나 손만 흔들면 스잖냐. 오라이 스돕, 함서." "근데 야가 증말 아까부터... 그래 관두자. 관둬. 우선 따라와. 따라오는데, 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알어야 나두. 중도하차전무, 그럴려구 그러쟈. 안심혀. 니 하는 대루 그저 내리믄 내리구 타면 타구 할랑게." 상국이 답답하다는 듯 손을 뿌렸다. "그것두 그거지만, 너 저번에 아프다구 했제?" "아퍼? 내가...?" "그랬잖어, 니 입으루." "히, 너 증말 약 먹었구나. 그챠? 애들 소화제두 많이 먹음 어질어질하다는디 으런덜 멀미약이야 오죽허것냐." "내에...환장하겠네. 니 입으루 니가 그랬잖어! 오만상 안 아픈 데가 ㅇ다구!" 상국이 소리를 ㄲ 지르자 아무 생각없이 서 있던 한국이 찔끔했다. "아녀야. 아녀. 아픈 데 ㅇ어. 멀쩡혀." "그럼 저번에 얘기한 건. 해골 눕히자 마자 식은땀을 줄줄 흘리더니 까마귀 고뿔 앓는 소리로 개개거리며 니 입으루 니가 안 그랬냐. 우째 오만상 안 아픈 데가 ㅇ는디 병원에만 가믄 진단이 ㅇ다구. 하룻밤에두 열서너 번씩 들락거리며 빠이쁘 시연찮은 것두 신식 농부병이라구 니가 그랬잖냐 말이다." "노옹부병...! 내가...?" "알았어 마. 니 말대로 멀쩡하다 치고. 어쨌 넌 지금부터 환자여. 환자. 다 널 위한 것인게 속병이 있는 것처럼 배때질 움켜쥐란 말여. 알았냐. 너 집 나가고 두 달 동안을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종합진찰을 받아봐야 쓰겠더라." 허여멀금하니 피둥피둥하던 한국의 얼굴빛이, 숨 들이마실 사이도 없이 누렇게 변했다. 그래서 그래 보이는 건지 병색이 완연했다. "그럼..." "원주, 대학병원에 잠깐 들렸다 오기로 했다. 니 병은 내가 안다. 암만해두 안 되겠어." "원주? 그럼 집이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한국이 다시 주저물러 앉을 기세였다. 2. 한국의 얼굴이 조금은 피었다. 사실 토끼몰이에 노루 뛰듯 얼떨결에 끌려온 한국이긴 했으되 집에 갈 맘은 아니었다. 온다 간다 말 한마디 없이 떠나온 복지원이었다. 송 주사와 따개눈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두 달 동안 길러온 돼지들도 맘에 걸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주연실... 그래, 다른 건 다 모른 체 떠나보낼 수 있어도 그녀만큼은 아니 될 일이었다. 이 도시를 찾아온 이유부터가 그녀 때문이었고, 도망치듯 상국의 집을 몰래 빠져나온 이유도 그녀 때문이 아니던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그녀만은 다시 만나봐야 할 일이었다. 상국의 속마음이 어디에 있건 간에 당장에야 집에 갈 일이 아니라면, 발등에 떨어진 불은 꺼진 셈이었다. "두 달 동안 끄떡ㅇ던 집인데 몇 시간을 못 참겠냐. 나름대루 알아봤는데 농부병이란 거 이런 촌 병원에선 땅짐도 못한다드라. 허고 뭉기적거릴 병속이 아니라문서, 실기하면 실명할 공산이 크다는 겨. 가슴이 철렁하드라. 너두 한번 따져봐라. 니 한몸 후적후적 가는 거야 대수겠냐만, 늙은 노인네 놔두고 퍼런 자식이 먼저 간다는 거, 불효두 이만저만한 불효 아니다 너. 헌게 아뭇 소리 말고 시키는 대루만 하는겨. 알았제. 가자, 얼릉." 한국의 모가지를 다시 후려잡듯이 잡아끄는 상국이었다. "놔야 이거. 사실 집이라면 좀... 그랬는데 내 병 고쳐주겠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딨다구. 오라이를 하든 스돕을 하든 니 뒤만 밟음 될 거 아니 것냐." 한국의 뜨매질이 너무나 완강하였으므로 상국이 손을 풀었다. 대신 한국을 앞세웠다. 지팡이 잃은 당달봉사 허우적거리듯 갈피를 못잡는 한국을 앞세운 상국이 '원주'란 패찰 밑에 섰다. 곧이어 차가 들어왔고, 사람들이 올랐다. 구질구질한 날씨임에도 차에 오르는 사람은 많았다. 베낭을 짊어진 젊은이도 있고, 어린것을 딸린 여인도 있었다. 차에 오르는 사람을 일일이 눈여겨보고 있던 상국의 눈빛이 야릇하게 빛났다. 버스 출입문의 손잡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힘겹게 오르는 사람이 있었으니. 저게 누구인가. 추레한 몰골에 입성마저 꾀죄죄한 백발 난쟁이... 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그는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난쟁이 이로가 아닌가. 마밭에 쑥처럼 사람들 틈에 끼어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차에 오르고 있는 사람은 분명 '이로'니 '이백'이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던 그 난쟁이가 틀림없었다. 3. 난쟁이 이로임을 재차 확인한 상국이 한국을 몰아올렸다. 상국의 눈빛이 유난히 빛났다. 눈꺼풀을 연신 껌벅이면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넌 요대루 진득히 있어야 헌다. 난, 요 앞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한국을 빈 자리에 앉히킨 상국이 앞자리를 넘겨다보며 더듬거렸다. 내용을 알 바 없는 한국이 고개를 쨔웃거린다. 이 너른 바닥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게 참 용하다는 표정이었다. 버스가 천천히 움직이고, 밖은 여전히 비였다. 주춤거리던 빗발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둘씩 둘씩, 다들 짝을 지어 앉았건만 난쟁이 이로만 썰렁하게 혼자였다. 의자에 푹 파묻힌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그는, 주시하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왜소하고 쓸쓸해 보였다. 칙칙하게 젖은 옷섶을 툭툭 털어내며 상국이 이로의 자리로 갔다. 웅크리고 앉은 이로의 몸에선 김이 무럭무럭 올랐다. 후줄그레 젖은 포의차림으로 보아 날비를 고스란히 맞았나 보다. 그사이 어디서 뭘 했는지, 동안(童顔)처럼 곱상하던 얼굴이 몰라볼 정도로 찌들어 있었다. 포동포동하던 얼굴은 무우말랭이처럼 흉칙스럽게 일그러져 있었고, 불그레하던 혈색이 혐오감을 느낄 정도로 검게 그슬려 있었다. 시퍼렇게 얼어붙은 입술로 무슨 말인가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상국으로서야 말 그대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였으니. 상국이 헛기침까지 해대며 난쟁이 옆자리를 비집고 들었다. 하지만, 그는 범연했다. 한점 흐트러짐도 없이 외우고 있는 주문을 계속할 뿐이었다. 상국이 다시 헛기침을 했다. 마찬가지였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씨나락 까기에 열중 아닌가. "보슈. 참말로 오랜만이우." 상국이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난쟁이의 얼굴을 살핀다. 주문은 그쳤지만 이로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였다. 상국이 못마땅하다는 듯, 버릇처럼 가래침을 울궈낸다. "노인장 덕분에 만사형통했수다. 언젠가 한번 배알했으면 싶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인사치레 같지만 지난번엔 증말 고마웠수." 어찌 들으면 빈정거리는 듯도 했고, 또 어찌 들으면 진심으로 감사하는 인사인 듯도 싶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난쟁이 이로는 줄창 감은 눈으로 상체만 일렁거릴 뿐이었다. 상국이 입을 다물었다. 일껏 아는 체를 하는 데도 백안시하는 인정머리로 보아서야 괘씸한 맘이 없는 것도 아니나, 추레한 행색에 피죽 한 그릇도 못 얻어먹은 듯한 몰골이 딴에는 측은하기도 했다. 또 지난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감사한 마음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한편으론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론 서운하기도 한 마음을 창 밖으로 돌리며 무연히 앉아 있자니, 그제사 입을 딱 벌리며 기지개를 트는 난쟁이 이로였다. 4. "발 없는 물길 천리를 돌아 묘묘한 바람 한줄기 영 넘고 재 넘어 다시, 천리를 돌아 물길 돌아든 데로 바람 서리친 데로 또 그렇게 천리를 돌아." "...?" 이로가 곁에 있는 상국을 보더니 무슨 말인가 또 중얼거렸다. 상국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껌뻑였다. "허어...행자는 그래 어느 쪽으로 가시려고." 이로가 눈을 게슴츠레 떴. 형형한 눈빛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섬칫한 한기를 느끼며 상국이 고개를 모로 틀었다. 건망증이 심하다 해도 자신을 몰라보다니. 이 작자 아무래도 정신까지 어떻게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날 몰라보시겠수. 두 번씩이나 신세를 진...가만 있자. 그러니깐으루, 시장바닥에서 왜 동남쪽 하고 길을 가리켜 주지 않았소. 노인장께서 죽치고 있던 다방에까지 찾아가서 행방불명된 저기,한국이 쟈 행처도 물었었고." "쯔읏...화기가 지나치게 깊어. 다스리지 못하면 스스로 화를 당할 사... 안으로는 자신을 소진하니 연(燃)이며, 밖으로는 이물을 소화시키니 곧 작(炸)이라, 이 둘을 합하여 화라 함에, 연이든 작이든 탄다는 것은 매 한가지일 터. 보아하니 화기가 안으로 스며 있어, 다행히 불길이 밖으로는 번질 일은 만무하니 남에게 해악을 끼칠 일은 없겠으나 대신 속앓이 어지간히도 하게 생긴 상이로고. 쯔읏." "넨지랄. 또 그놈의 노가리..." 상국이 얼굴을 찡그리며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그런 상국을 지그시 올려보던 난쟁이, 백발을 쓸어올리며 다시 혀를 끌끌 차는 게 아닌가. "허어...화산려(火山旅). 시절은 늦가을, 새집에 불이 났구나. 갈 곳도 없고 올 데도 마뜩찮은 한심한 신세. 하세월 여름날이 그저 그리울사. 쯔읏...첩첩산중 적막강산이로고." "뭐요! 이 영감이 또오..." "용나루 물돌매미 거룻배 한척 사공 어디 있기나 했드냐 뱃전에 쌓이는 물때 낀 세월 천년이거니 만년이거니 물길 돌아든 대로 바람 서리친 대로 아슴아슴 지피는 강건너 저녁노을 손님 어디 들리기나 했드냐 수북이 쌓이는 눈꽃 한 다발 천길이거니 만길이거니." 5. 노인이 이죽거리고 이번엔 상국이 눈을 감았다. 더 들어봐야 귀신 씨나락 까먹는, 그 소리가 또 그 소리. 일부러 조는 체하며 귀를 털었지만 난쟁이 이로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래 행자께서는 우중충한 우중에 어딜 행보하시려고?" 노인의 누런 이빨이 들썩거릴 때마다 구린내가 진동했다. 상국이 귓구멍을 털던 손으로 코를 움켜쥐었다. 노인의 입에서 풍겨나오는 구린내도 구린내였지만 퀴퀴하고 질척질척한 악취가 속을 뒤집고 들었다. 난쟁이의 몸에서 나는 체취였는데 시신이 부패할 때 풍겨져나오는, 참기 힘들 정도로 아주 고약하고 메스꺼운 악취였다. 난쟁이 노인이 말을 하거나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 악취는 상국의 콧속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어 와 뱃속을 온통 뒤집어놓고 있었다. 무밭에 황송아지 날뛰듯 설치고 다니던 구토증과 복통이 이번엔 등줄기를 따라 쪽골로 올라서더니 두통까지 일게했다. 상국이 양미간을 찌푸렸다. 모가지를 통로 쪽으로 길게 빼더니 엉덩이를 들썩였다. 의자 끌턱에 겨우겨우 엉덩이 한쪽을 걸치고 있는 앉음새가 아무래도 불안했다. 툴툴 털고 일어설 법도 하건만 버티고 있는 뚝심이 용했다. "가형이라고 하나 있는게...노인장께선 아실라나 농부병이라고. 골병이유. 뼛골이 녹두룩 일을 혓응께. 하긴, 농산물이 죽어자빠지는 세상에 농사꾼인들 온전할까마는... 병원에 가는 길입니다. 대학병원..." "말세의 징조이니, 잎이 시들수밖에. 곁가지가 마르고 밑둥이 잘릴지어다." 무표정한 얼굴로 노인이 창 밖을 보았고, 창 밖엔 누렇게 빛바랜 나뭇잎이 비를 맞고 있었다. 을씨년스럽고 살풍경했다. 상국이 반대편 창 밖을 보았는데 거긴 졸빗한 구릉이었다. 누가 버리고 떠난 듯 잡초 엉성한 묵정밭 띄엄띄엄, 밀리장의 모발처럼 널려져 있고. 을씨년스럽긴 이쪽이나 저쪽이나 마찬가지였다. 상국이 눈을 감는다. 어릴적 그 옛날... 일곱살 때던가 아홉살 때던가. 무단히 비가 좋아 일부러 비를 맞으며 돌아친 적도 있었지. 오늘같은 이런 자질구레한 비가 아니라 장대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피래미처럼 뛰어다니던 그때. 막은골 그 논빼미 여즉도 그대로 있을라. 논두렁을 건너다 쫄딱 미끄러져 숨도 못쉬고 허우적거릴 때, 섬짓한 섬광 한 줄기, 그리고 하늘이 깨질 듯 울리던 뇌성. 이 전상국이 하늘은, 그날 깨져뿌린 거라고. 하눈님 눈알은 그날 멀어뿌린 거라고. 눈을 감고 춤을 추며, 춤을 추며 무섬증에 떨며 집에 돌아와선 알몸으로 기어들던 아랫목 구둘장. 밍크 이불인들 그만큼 따뜻했겠고, 첫날밤 금침이라한들 어찌 그만큼 포근했겠는가. 그리고 또 그 다음날... 6. 그래, 창 밖은 그저 구질구질하고 을씨년스러울 뿐인 가을비인 거다. 유년의 기억은 돌처럼 굳어진 지 오래고, 상상은 고사목처럼 말라비틀어져 나비를 본다해도 꽃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니. 한 잔의 막소주에 가끔은 띄워지는 봄소풍이고 천렵이지만, 기껏 연상해 낸다는 게 꾸구리 알걷이 아니면 참새구이가 고작 아니던가. 모든 상상력은 입 속으로 녹아들고, 입 속으로 녹아든 상상력은 언제나 위장을 자극할 뿐으로, 좀 창피하고 저속한 얘기지만 똥, 그 외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모든 상상은 목젖을 타고들어가 직장으로 나올 뿐이니, 길바닥의 똥을 보고도 겅중거중 뛰어오르던 털복숭이 삽살이를 상상해내던 때가 있기는 있었던가, 몰라... "이제 보니, 본좌 눈이 어둡지 않다면... 필경 대면한 적이 있으렸다. 가만 있거라. 불 난 새집이렷다. 불이라...부울." "불은 무슨 불. 돌이라 했소. 돌! 푸석돌." 상국이 씨광하게 뱉었고, 노인이 눈을 번쩍 뜨더니 무릎을 탁 쳤다. 지기라도 만난 듯 반가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크흣...! 그려...푸석돌. 그랬었지. 난세에 백마를 기다린다 했겠다." "뭐요. 백마? 내가...?" "크하핫! 두시게. 백마란 기다린다고 오는 것도 아닐 뿐더러 누구나 함부로 기다릴 건 더더욱 아니네. 땅이 하늘과 마주하기로 그 높낮이까지 마주하겠으며, 바람이 물과 더불어 천하를 주유한다고는 하나 종당에 잦아드는 숙처까지 같을 수 있겠는가. 난세를 구할 애기장수가 태어나야 하리. 백마가 돌아와야 하리. 그래 병원에 간다고 했던가. 가형이라고." 예전처럼 이로의 웃음소리가 호탕해졌다. 어쩐지 싫지 않은 상국이었다. "기억하실지 몰라도 두 번씩이나 신세를 졌습니다. 한번은 일자리 건으루 또 한번은 집나간 쟈 건으루. 신통하십디다. 인사치레 겉지만 증말루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탄탄한 일자리도 구했고 한국이 쟈도 제발로 걸어들어왔응께." "크흠. 어사무사해서...그랬었지. 동남방. 그래 그곳에선 손은 떼었고?" "손만이 아니라 아예 발까지 끊었수. 직장 잃고 사람만 등신되는 거 아닌가 했는데, 왠걸 호박이 넝쿨째 굴러듭디다. 간주가 좀 늦어서 그렇지 내 그런 일자리라면 평생을 있겠습디다." "허어. 잘됐구만. 그래 다른 일자리라면...?" "교회를 증축하는 일인데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아주 신사적이드라구요. 도십장 강짜놈이 좀 시끄럽긴 한데, 하긴. 그 정도 텃세야 어느 공사판이나 다 있는 거고. 어쨌건 복채두 ㅇ이..." "가만... 어디라고 했소? 교회...?" 7. "그래요. 교회." "자네, 정말 교회일을 맡고 있다 이 말인가?" "넨장. 그렇다니까요, 글쎄. 근데 뭐가 또 잘못됐습니까." "허어...불찰이로고. 본좌의 불찰이야..." "...?" "선종선과 악인악과란 말은 내 진즉에 한 말일 터. 하지만 명심할 것이, 선이라고 해서 다 선이 아니고, 악이라고 해서 다 악은 아니라는 게야." 상국이 졸리운 듯, 눈을 껌벅였다. 난쟁이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가엾은 자에게 보시를 베풂은 선한 일임엔 틀림없겠으나, 그렇다고 그리하는 것이 다 잘하는 일만은 아니라는 것일세. 옛날에 아주 옛날에 말일세 마음씨 착한 여인이 있었네. 지아비는 일찍 여의었겠다 코흘리개 어린것을 데리고 살자니 고생인들 오죽 자심했겠나. 예나 지금이나 늘 그렇거든. 마음씨 착하고 행실 고운 사람일수록 불행하고 가난하게 살아간다는 철칙이야 만고불변인 거. 때는 여름이라 양식을 구하자면 산전이라도 일구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어린것을 나무그늘에 놀게 하고는 곡괭이를 집어들었겠다. 어느만큼 잡초를 헤치며 나아갔을까. 퍽, 하며 곡괭이날에 찍혀오는 게 있지 않겠나. 무언가 하고 들여다보았더니 팔뚝만한 누런 황구렁이가 피범벅이 되어 나뒹굴고 있겠다. 이 일을 어쩔거나. 이 일을 어찌할거나. 산 목숨 생으로 쳐 죽이다니. 제발이지 죽지만 말아다오, 하면서 벌벌 떨고 서 있는데 마침 곁에 약초가 있더라. 즙을 내서 발라준다 곰취를 꺾어서 그늘을 만들어준다.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한 후, 이튿날 다시 가보았더니 구렁이는 보이지 않더라 이 말이지. 이듬해 여름이 되어 다시 그 산전엘 갔겠다. 또 어느만큼 곡괭이질을 하던 그녀가 우뚝 멈춰 섰네. 지난해 그 황구렁이가 꼭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거던.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산삼이야. 산삼! 엄지손가락만 해도 팔자를 고친다는데 이건 팔뚝만한 산삼이 아닌가. 천지신명이시여, 고맙나이다 고맙나이다. 산에 계신 산신령이시여, 물에 계신 용왕님이시여, 감사하나이다 감사하나이다. 그저 고맙고 감사하나이다. 얼마나 감격해서 울었던지 퉁퉁 부운 눈으로 집에 돌아와서도 보면 볼수록 믿기지 않는거라.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그녀가 어린것을 걸리고 찾아간 곳이 고을 원이라. 허어... 이런 선량한 백성이 다 있나. 산삼을 진상하겠다니! 한치의 거짓도 없으렸다. 홍은을 입자온 소녀 어찌 거짓을 아뢰리까. 옳거니! 기특하고 기특한지고. 여봐라! 네 이놈들, 뭘 그리 꾸물대고 있느냐. 즉시 이 사실을 온 고을에 알리고 후히 기리도록하라! 아니다 아니다. 선하고 훌륭한 일일수록 드러내지 않는게 미덕이니 교지가 내리기 전엔 잠자코들 대기하고 있거라. 청태로 돌돌 말린 산삼을 받아든 원이란 작자, 이 또한 잠이 올 턱이." "...?" 8.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봤지만 뾰족한 묘안은 없고. 어쨌거나 삶아 먹든 구워 먹든 먹기는 먹어야겠는데 어전에 상납할 진상품이라. 지가 임금이면 임금이었지 어린 백성이 보내온 산삼까지도 차지할 주제는 아니라. 동이 트기가 무섭게 약탕관에 불을 지피는데 설설 끓는 훈짐만 쏘여도 십년은 젊어지는 것 같고, 명월이 옥향이 유선이 하며 팔도에 쩌르르한 천하명기들이 나긋나긋 품에 안기는구나. 이제는 됐다하고 약탕관을 대령케 하고보니,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산삼은 간데없고 팔뚝만한 구렁이가 또아리를 틀고 죽어 있는 게 아닌가. 고을 원이라는 작자 대경실색하여 죄인을 불러들이라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데. 밑도 끝도 없이 무조건 치랍신다. 여봐라! 저년, 저 괘씸한 년을 매우 쳐라! 위로는 금상을 기망하고 본관을 능멸하였으며, 저 밑으로는 무고한 백성을 현혹시킨 죄, 목이 열 개라도 감당하지 못할 일. 무엇하느냐! 인정 볼 일 아니고 사정 둘 일 아니니 매우 치라라는대도! 사령들이란 원래가 무지한 것들이라, 인정이 있고 사정이 있을 리 있겠나. 거적때기에 둘둘 말린 제 어미를 집에까지 끌고와서 보니 싸늘하게 굳은 시체라. 어린놈 훌쩍거리며 구덩이를 파는데, 원수로고 원수로고, 산삼이 원수로고. 구렁이를 위한다더니 구덩이로 가는구나. 제 어미를 끌어 묻었는데 그 원통한 마음이 어찌나 깊던지, 구렁이가 있었던, 산삼을 캐냈던 바로 그 자리라. 후일담으로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 아이가 커서 의금부 당상관에까지 올랐다고 하데만, 다 부질없는 전설 같은 얘기고. 그래서 구원을 씻어본들 무슨 소용이겠나. 남의 피로 제 피를 씻는 것에 지나지 않거늘..." 상국이 길게 하품을 했다. 그리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코를 벌름거렸다. 노인의 몸에서 풍겨나오던 고약한 냄새가 어느새 없어졌다. 그러고보니 썰렁하던 자리가 조금은 따뜻해지는 것도 같았다. "단순한 옛날얘기 같지만 의미심장한 고담이야. 세겨두면 시사하는 바가 클 걸세. 똑같은 물이래도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되고 목양이 먹으면 젖이 되는 법일세. 자비희사하는 마음이야 한결같지 않으련만 아무리 좋은 일일지라도 그 자리를 보아가며 행해야 하거늘... 구렁이에게 은혜를 베푼 아낙을 탓할 사람이야 없겠지. 은혜를 갚겠다고 산삼으로 화한 구렁이 또한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없겠고. 끝내는 명당을 일러주어 그녀의 아들에게나마 금시발복으로 답했으니까. 하지만 아낙은 장살당했고 원인은 황구렁이를 살려주었기 때문 아니던가. 이게 무언가. 지독한 악종에게도 선한 마음은 있는 게야. 자신이 받은 은혜를 보답하려는 갸륵한 정성도 있는 것이고. 다만 선한자의 선함과 악한자의 선함이 다르다 뿐이지. 악한자가 선을 행하고자 하나 그 선은 결과적으로 패악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네." 9. "다시 말해서, 그녀는 선행공덕을 하였으되 그 행처를 잘못 짚었음이며, 구렁이 역시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은 갸륵하였으되 본성을 깨우치지 못하였던 고로 은혜를 죽음으로 갚은 꼴이지. 은혜 입음은 알았으나, 그 은혜 입힌 자의 속 깊은 뜻까지는 몰랐던 게야. 집앞에 동냥치가 둘이 있다고 하세. 하나는 지 애미애비나 두들겨패는 패륜아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공양을 나온 사람이라고 할 때, 자넨 누구를 먼저 구호하겠나. 완전한 세상, 우리가 가고 싶어하는 그 섬은 동냥치가 없는 세상이 아니라, 늙고 병든 노모를 위해서는 구걸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선한 마음씨의 동냥치가 우굴거리는 세상을 말함이네. 자네가 일하고 있다는 교회...어디 교회뿐이겠나. 사찰이니 사당이니 선원이니 하는 모든 종교와 종파들, 외치고 부르짖고 공약하기를, 속되고 타락하고 저주받은 현실보다는 순결하고 승화되고 축복받은, 그리하여 너와 나의 구분없이 모두가 하나로 평등한 다음세상이 영원히 너희에게 임하리니, 나를 따르라. 이 세상의 종말이 멀지 않았음이니, 예비하고 기도하라. 네가 지은 죄 수미산보다도 큼이니 일심으로 공양하고 일념으로 정진하라. 허어...위태로운지고. 살얼음 빙판 위로 소를 내모는 격이야. 허우적거리다 강물에 빠져 죽으면 그자들 뭐라 그러는 줄 아나. 주님의 곁으로 갔다는 거야. 은혜를 입었다는 게지. 해탈이 뭔지는 몰라도 다비장의 불꽃만 올랐다하면 열반입멸이라. 썩어질 놈들...열반, 열반. 열반이 얼마나 싱겁고 재미없는 건 줄이나 알고? 놈들의 말대로라면 이 세상은 그저 열반해탈, 극락왕생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지나치는 길목일 뿐이지. 지놈들이 뭔 빽을 믿고 다음세상이 있다고 큰소리 떵떵 치는지는 몰라도, 이 세상은 그냥 거쳐가는 길목이 아닌 게야. 그대로 완전한 것이고 한세상인 것을. 개똥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함부로 대할 세상은 더더욱 아닌 것이고. 교회에서 일을 하다니. 허어...본좌의 불찰이로고..." 상국은 아예 조는 시늉이었다. 혼자 떠들고 혼자 흥분하는 난쟁이쯤은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차는 어느새 까치재를 넘고 있는 듯, 무던히 흔들리고 있었다. "백마...이젠 가야 할 때가 되었구나. 강을 건너야 하리. 물이 깊구나. 산을 넘어야 하리. 골이 깊구나. 백마...이냥 오지 않을 참이드냐.허어..." 피곤한 듯, 노인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한탄이었고, 어쩌면 절규인 듯도 했다. 차가 곤두박질쳤다. 상국이 기겁을 하며 눈을 부볐다. 억지 하품을 늘어지게 하곤 흠칫 놀라던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주위가 허전하다는 생각이었다. 10. 곁에 앉아있는 난쟁이 노인을 확인한 상국이, 그제사 안심이 되던지 저혼자 열적게 웃는다. "엇따 졸립다. 차만 타면 닭병이니... 노인장이야말루 이런 빗길에 어딜... 병원이라면 지들이랑 같이 갑시다." "왜, 노객이 환자처럼 보이나?" "신색을 보아하니 병중인 듯하여 하는 말이우. 그 좋던 얼굴이, 거울 있음 보슈. 내 말이 그짓말이나. 그 사이 어디 있었는지, 얼굴이 반쪽이우." "나이가 있으니 당연지사 아니겠나." "밸... 그 사이 지냈으면 일 년이 지났겠수 이 년이 지났겠수. 고작 둬 달 지낸 걸 같구. 허거나 말거나 증말..." 상국이 무언가 물으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구렁이가 어쩌고 선종선과가 어쩌고 남의 얘기나 씹어발릴 게 아니라, 괜히 잘 있던 다방에서는 왜 떠나왔느냐고 물으려던 참이었다. 석배의 말대로라면 여름내내 먹여주고 재워주고 뒷바라지까지 마다 않은 다방이라던데 어쩌자고 야밤도주를 했느냐. 저 싫다고 나오는 것까지야 말릴 재간이 있으랴만, 그래도 그렇지. 금고에 있던 돈뭉치까지 뚜룩쳐 나왔다던데,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해두해두 너무한 것 아니냐. 조목조목 따져, 아랫목 윗목 짚고 넘어갈 일이로되, 상국에겐 다른 뜻이 있었으므로 꾹 눌러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품고 있는 그 생각은 너무도 은밀하고 감격스러운 것이어서, 노인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꿈이 당장에라도 이루어질 것 같아 가슴 설레이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다면 신고를 해도 벌써 했을 것이고, 요절을 내도 진작에 냈을 일이었다. 상국이 입맛을 다셨다. 회(蛔)가 동할 법도 했다. 집을 나섰을 때가 점심참이었으니 속인들 헛헛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상국이 건너편 창 밖을 바라본다. 버스는 어느새 까치재를 넘고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로, 전혀 낯선 곳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낮도깨비처럼 불쑥 튀어나온 난쟁이 이로 노인 때문에, 한여름밤 개똥불을 좇아가듯, 그저 해괴하기 짝이없는 원주행이 되고 말았다. 상국의 눈이 쓰라렸다. 빗물 때문이 아니라 풍경 때문이었다. 문둥이의 얼굴처럼 흉하게 문드러진 산자락이 었다. 길을 내면서 잘려져나간 산사면이, 계속되는 장마에 곪아터지고 깨지고 하여 만신창이로 흐물거리고 있었다. 11. 차가 키익, 하더니 휘청 흔들렸다. 운전수가 내뱉는 욕설이 차바퀴 파열음보다 더 컷다. 난쟁이가 캑, 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상국이 잽싸게 팔걸이에 힘을 주었다. 반토막짜리 난쟁이가 떼르르 바닥으로 쑤셔박혔다. 상국이 코를 후비며 쪽골이 지끈거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무언가 불안하거나 심상치 않을 때면 늘 그랬다. 난쟁이 노인이 허우적거리더니 어찌어찌 의자 위로 기어올라왔다. 상국이 모른 체 감은 눈을 또 감았다. "쯧쯔쯔... 망할 눔의 인사... 기냥 있어두 개바닥까정은 굴러갈 비얄길이구먼. 요즘 젊은것들 뭔수루 조급증이 그리두 심헌지... 질레 저랬다간 발설지옥일거구먼." 투덜거리던 노인이 목구멍에 가시라도 걸렸던지 캑캑거렸다. "새겨 들으시게. 아까두 말했지만, 전생이 어떻고 후생이 어떻고. 이단잡설을 따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다음 세상에 목을 맬 일은 아닌 게야. 그렇다고 막 살아도 된다는 얘기는 더욱 아니고. 업이라고 있지." 상국이 그냥 있기 미안했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구전되는 얘기네만, 지옥이란 게 있어. 팔열지옥이 있고 팔한지옥이 있고, 그 각 지옥은 사벽으로 되어있는데 벽마다엔 문이 하나씩 있어, 당외, 시분, 봉인, 열하라고 불리는 네 개의 소지옥으로 통하지. 말하자면 지옥 하나에 열여섯 개의 소지옥이 딸려있는 셈이니 하구보면 번뇌보다도 많은 게 지옥이야. 발설지옥이란 말 들어봤나. 맨 위에 있는 등활지옥으로부터 시작해서 흑승, 중합, 규환, 대규, 염열, 대열, 그리고 맨 밑에 무간지옥까지 여덟 개의 지옥이 있어, 이를 팔열지옥이라한다네. 발설지옥은 이 팔열지옥의 하나인 대규지옥에 딸린 소지옥으로 혓바닥을 길게 늘여 쟁기질을 시킨다더군. 아픈 건 둘째치고, 저런 승질 급한 눔만 골라다 둔다니 환장하겄지. 지 아무리 빨리 가군 싶어도, 상상해보게. 허니, 매사 그저 차근차근 눅진혀야 헐 일인게야." 노인의 저주가 있거나 말거나 버스는 여전히 내리막길을 고속질주하고 있었다. 전마처럼 스치고 지나는 산자락과 계곡의 흙탕물이었다. 무료한 듯 상국이 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직행버스였으므로 중간에서 내리고 오르는 번잡함은 없을 일이었다. 상국이 쪼록거리는 배를 틀어쥐고는 긴 하품을 물었다. 어느 만큼 시간이 흘렀을까. 상국이 코까지 딩딩 골며 자고 있을 때였다. 심해의 저 건너편 아득히 멀어져 있던 곳으로부터 불빛같이 번쩍 스치는 떨림이 있었다. 쾅! 끼익...! 둔탁하고도 무거운 굉음이 그의 가물가물한 귀청을 찢고 지나갔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가 눈을 뜨려고 버둥거렸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몸이 붕 뜨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그의 몸은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12. 그리곤 끝이었다. 그가 눈을 떳을 땐 하루가 지났는지 이틀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래되었다는 기억뿐이었다. 손을 허우적거렸지만 잡히는 게 없었다. 잡히는 게 없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다. 그제서야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으흑! 아....악!" 그가 고개를 푹 떨구며 나뒹굴었다. 면도칼로 뼛속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어깨죽지를 타고내렸다. "으헉...! 으으..." 그가 입을 딱 벌리며 진저리를 쳐댔다. 무수히 날아드는 창날 앞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손발이 꽁꽁 묶여 있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있을 뿐,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온힘을 다하여 팔을 들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며 허공을 힘없이 그었다. 오발탄처럼 떨어진 창살 하나를 잡았다 생각했을 땐, 별이 일었고, 그 수없이 많은 별들은 예리한 창날이 되어 그의 온 전신을 향해 날아들었다. 뜨뜻하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가슴팍을 타고 뱃가죽으로 스며들었다. 그가 다시 손을 뻗으려했지만 팔은 이미 통나무처럼 싸늘하게 굳어져가고 있었다. 누군가 절박하게 부르는 소리에 상국이 눈을 떴다. 한국이 보였다. 생소했다. 평생 처음보는 놈처럼 낯설었다. 히, 하고 웃어보였으면 좋으련만, 한국의 얼굴은 반죽하다만 수제비덩이처럼 허옇게 굳어 있었다. "으뗘...괜찮냐?" 상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여보이겠다고 했지만 고개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꺼풀을 껌벅여보이는 게 고작이었다. 빗방울이 상국의 얼굴 위로 흩어졌다. 그제사 그의 눈 앞으로 모든 게 들어왔다. 몸을 부르르 떨며 상국이 일어나려하자 한국이 제지했다. "둬야. 이만하길 천행이다. ㅁ이 죽었는지두 몰러야. 너두 나 아니었음 죽었을겨 야." 한국이 그제사 히웃었고, 상국의 안면이 욱신거렸다. 한국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믿었다. 무엇보다 한국의 웃는 얼굴이 든든했다. "어떻게...어떻게 된 거냐? 사람들은...?" "몰러야. 그냥 쾅! 혓응게." 한국을 의지해 겨우겨우 일어나 앉은 상국이 눈을 질끈 감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신을 도끼날로 쪼아대는 듯한, 자신의 통증도 통증이었지만 교통사고 현장은 너무도 끔찍하고 처참했다.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단말마의 비명이 듣기에도 처절했다. 13. 옆에선 장마로 불어난 계류가 탕탕거렸고, 가맣게 올려다보이는 곳이 길인 듯했다. 아주 오래되었다는 생각과는 달리, 사고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은 듯, 모든 게 너무도 생생히 드러나 보였다. 두 동강이 난 대형트럭 밑으로, 상국이 타고온 버스의 대가리가 짖눌려 있었는데, 종잇장처럼 구겨져 몰골이 흉하기 말이 아니었다. 다리가 차 밑으로 깔려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사람에, 차가 굴러떨어질 때 창 밖으로 튕겨져나와 두개골이 으깨져 죽어있는 사람에... 널려진 시체와 상해자들로 계곡은 온통 피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구겨진 차체 사이로 점점이 튀어진 핏자국이 참혹한 참상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너덜거리는 살점과 분수처럼 솟구치는 뼈마디를 감아쥐고 몸부림치는 사고자들 위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빗줄기는 거세지기만 했다. 심장을 도려내듯 처연히 울부짓는 외마디소리를 말없이 듣고 있던 상국이 번쩍 눈을 떴다. 잃어버린 물건이라도 있던지 차쪽을 힐끗 바라보더니 다급하게 소리쳤다. "한국이 너어...내 옆에 탓던, 그 왜 조막만한 난쟁이, 난쟁이 말이다." "...?" 구급차에서 울리는 사이렌소리가 저 위쪽 도로를 따라 점점 커지고 있었다. "백대가리 말여." "왜야. 있드라만." "죽었냐 살었냐니깐. 살었쟈? 살어 있어야 혀." 한국이 고개를 홰홰 내저었다. 상국의 목소리가 떨렸다. "...! 그럼, 주...죽었단 말이냐?" "너 끄잡어낼 때 보니까 있긴 있든데 살 거 같지 않드라. 구급차라두 일찍 왔음 모를까, 인저 오지 않냐. 죽었을겨. 한참 전에." "넌 임마! 그래두... 그래두 그렇지. 사람이 있음 딜구나왔어야 될 거 아녀." "얀. 너 살리기두 바뻣당께. 그짓말 아녀야. 봐라, 저기." 한국의 손가락 끝으로 종잇장처럼 구겨진 버스가 다시 묻어났다. 굳게 닫힌 출입문 대신 차창 하나가 깨져 있었는데, 누군가 나오려고 무던히 애쓴 흔적이 보였다. 상국이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있더니 또 다급하게 소리를 질러댔다. "그 작자 시체라두, 시체라두 끌구나와야. 얼릉! ㅇ어짐 물거품이여." "야는. 너야말루 쾅,하구 백히드니만 어ㄸ게 뺑 된 거 아니냐. 반쪼가리 나서 끄내지두 못해. 피범벅이드라. 허고 지금 죽은 사람 생각하게 된겨. 닐 봐라. 한쪽 어깨가 ㅇ어야 알어!" 상국이 얼굴을 찡그리며 가맣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꼬나봤다. 참고 있던 통증이 일시에 엄습해왔다. 눈에서 뚝뚝 떨어져내리는 빗물을 혓바닥으로 내치며, 상국이 미친 듯이 고함을 질러댔다. 14. "너, 너어...아이고야! 제발 꼬장 줌 부리지 말구. 내 시키는 대루만... 다른 사람들한테 들킴 말짱, 말짱 도루묵 되구 마는겨...! 내 죽은 담에 물 떠놀 생각 말구. 제발 내 이렇게 빌겠다. 뭘 꿈적거리냐! 얼릉 임마...!" 상국이 축 늘어진 팔을 덜렁거리며 악을 써댔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그냥 뒀다간 일껏 살려놓은 놈 지레 죽일 것만 같았다. "알었어. 알었어야. 니 시키는대루 할팅께 지발이지 악 좀 쓰지 말어라 야." 상국이 다시 눈을 허옇게 치떴고, 그의 곁에 쪼그리고 있던 한국이 차 쪽으로 뛰었다. 한국이, 그가 나왔던 문틈으로 들어갈려 해봤지만 모가지를 디밀기도 전에 걸렸다. 분명 자신이 빠져나왔던 차창이었다. 한국이 고개를 짜웃거리며 돌을 집어들었다. "요상허네. 사람두 풍선맨치루 커졌다 즉어졌다 허나배여. 상국이 쟈두 그려. 죽은 송장을 워디 쓸랴구. 돌았어...쟈가 돌았구먼." 종잇장처럼 구겨진 버스는 요지부동이었다. 창유리를 돌로 쳐봤지만 끄덕도 없긴 마찬가지였다. 힘겹게 차 안으로 들어간 한국이, 우욱 하며 구역질을 토했다. 신음소리와, 신음소리보다 먼저 코에 와닿는 피비린내였다. 흩어진 옷가지와 신발짝.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진 승객들의 손가방과 휴대용품... 온갖 잡동사니와 깨진 유리조각이 통로 한가득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한국이 진저리를 치며 눈을 감았다. 착 짜부러든 의자등받이를 한 손으로 잡고 있던 한국이 눈을 떴을 때, 그는 또 다시 우욱하며 구역질을 토했다. 무언가 물컹하고 밟혔다. 머리통이 으깨어진 핏덩이었다. 어린아이였는데 바닥에 떨어지면서 머리가 깨어졌던지 두개골이 허옇게 보였다. 깨진 머리에선 아직도 선혈이 꾸역꾸역 흘러내려, 분홍으로 고운 색동옷이 검붉게 물들고 있었다. 젖병을 물고 있었던 듯, 플라스틱 우유병이 아이의 곁에 떨어져 있었는데 금 간 데 하나 없이 멀쩡했다. 역한 피비린내 때문에 구역질을 해대고 있던 한국이 우유병을 발로 밀쳐냈다. 우유병이 아이 쪽으로 굴러갔다. 포대기를 거머쥔 한국이, 죽은 아이 곁으로 가려다 말고는, 다시 흠칫했다.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한국이 서 있는 바로 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누구를 찾는 듯한 가녀린 소리였는데 희미하게 잦아들고 있어서,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한국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의식중에 힐끗 던진 눈길에 또 하나의 주검이 널려있지 않은가. 15. 그가 찾으러온 난쟁이의 시신이었다. 닭집의 육계처럼 고개가 모로 꺾여서는 창 쪽으로 쑤셔박혀 있었는데 살아날 가망은 전혀 없어보였다. 포의에 가려져 있어 그런지 난쟁이의 몸에선 피가 보이지 않았다. 시체라도 꺼내와야 한다고 악다구니를 쓰던 상국의 목소리가 뒷전에 우렁우렁했다. 난쟁이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한국이 무슨 생각을 했던지 황망히 돌아서는 게 아닌가. "아주머니유! 아주머이..." 한국의 팔에는 피투성이가 된 여인이 들려져 있었다. 기차역 광장에서 노인을 들어나를 때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어디에 저런 힘이 남아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용쾌하기 그지 없었다. "민우야...우리 민우를...내새끼 민..." 따뜻한 온기를 느꼈던지 여인은, 헛소리처럼 내내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끈적끈적한 핏물이 한국의 앞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야 임마...! 한국이 너... 으으윽! 백대가리, 난쟁일 데려오라니깐. 아이구우..." 장탄식으로 내뱉는 상국을 본체만체하며 한국은 뜀박질을 계속했다. 푸른 도마뱀처럼 풀섶을 헤치며 길이난 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병원은 사고자와 사고자들의 가족들로 일대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사고자들은 거의가 중환자들이어서 몇 개의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병실도 병실이었지만, 그 많은 사고자들을 어느 한 병원으로 집중 수용하기엔 치료와 시술에 필요한 의료진과 장비가 부족했던 것이다. 또한, 사고자들을 한곳으로 입원시키는 데서 오는 부작용을 십분 감안했을 터였다. 이를테면 환자들의 집단의사표시와, 그 가족들의 사후처리에 대한 결집된 요구사항을 미연에 분산시켜, 사고가 났다 하면 통례적으로 떠오르는 보상문제를 좀더 손쉽고 용이하게 해결해보자는 가해자측의 속셈이 작용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교통사고라는 것이 전혀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돌발사고이기 때문에, 승객들의 안전과 생명을 무엇보다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경찰당국이나 사고대책반의 입장에서야 이런저런 정황을 따질 만큼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이러한 분산수용은 관행처럼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한국이 수술실 쪽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앉아있었다. 침통한 표정으로, 또는 흐느끼면서, 수술 결과를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가족들의 틈에 끼어, 한국 역시 그들처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수술실 앞에 앉아 있었다. 16. 상국이 입원한 병원은 인근에서는 가장 크다는 종합병원이었다. 여타 병원에서는 볼 수 없는 최첨단 시설을 두루 갖춘 현대식병원이었다. 분산수용이라는 지침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경상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고자들이 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형씨 담배나 피우러 갑시다." 곁에 있던 사내가 도저히 더는 못참겠다는 듯 담배갑을 뒤적였다. 한국이 고개를 내저었다. '출입금지'라는 붉은 글씨의 금표가 철렁했다. 주위의 모든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누군가 벌떡 일어났다. 담배갑을 뒤적이던 사내였다. 이동식 철제침대가 하얗게 밀려왔다. 아무도 말하는 이 없이 기립했다. 하얀 천으로 덮여씌어져 있었는데 튀어나온 발가락이 얼음덩이처럼 싸늘하게 굳어 보였다. "누...누굽니까?" 사내가 물었다. 뒤따르던 간호원이 고개를 푹 수그리더니 철문 안으로 사려졌다. 철제침대가 덜컹거리며 멀어졌다. 엘리베이터의 빨간 숫자가 'B'를 가리켰다. 모두들 제자리에 앉았고, 한국이 눈을 부볐다. 머틀머틀했다. 눈을 몇 번인가 껌벅였다. 곁에 있던 사내가 보이지 않는다. 눈을 껌벅이는 사이, 어디론가 떠났나보다. 소금발 같은 침묵이 흐르고, 다시 철문이 열렸다. 한국의 가슴이 철렁했다. 직감이었다. "전상국 씨 보호자 되시는 분... 계신가요?" 사람들이 사람들을 살펴본다. 한국이 흠칫 놀라며 간호원을 쳐다본다. 부엉이처럼 눈만 껌벅일 뿐이다. "전상국 씨 보호자 되시는 부운...?" 한국의 다리가 휘청했다. 대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끄응...! 벽에다 손을 짚고서야 간신히 일어날 수가 있었다. 그가 힘겹게 일어났을 때, 철제침대가 밀려왔다. 낯 익은 얼굴, 상국이 거기 있었다. 장례행렬의 만장처럼 너풀너풀, 한국이 뒤를 따랐다. 한국이 따라들어간 곳은 회복실이었다. "수술상태는 양호합니다. 아직 마취 중이라 깨어나자면 한참 걸릴 겁니다. 물을 찾더라도 절대 줘선 안 됩니다." 환자의 손목을 들었다 놓더니 휑하니 나거버리는 집도의였다. "박사님 말씀, 명심하시겠죠. 급한 일이 있으면 즉시 절 부르세요." 한국이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간호원마저 부리나케 의사의 뒤를 좇아갔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환자들의 신음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올 뿐인 병실은, 음산했으며 괴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한국이 병상 밑에 쪼그리고 앉았다. 걱정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요대기로 돌돌 말린 상국을 쿡 찔러보는 한국, 그러나 상국은 미동도 없다. 17. 야야...상국아, 죽으믄 안 되야. 니 입으루 그러지 않았냐. 늙은 애비 두고 퍼런 자식이 먼저 간다는 거, 불효두 이만저만 불효가 아니라구 안핸. 덜컥 겁이 나는 한국이었다. 다행히 숨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문이 열리며 수술을 끝낸 또 다른 환자가 들것에 실려왔다. 깁스로 동여진 상국의 어깨가 들썩했다. 요대기가 따르르 하며 떨렸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머리를 툴툴거리더니 재채기를 해댔다. 눈을 뜨는가 싶었는데 등을 활처럼 굽혀서는 머리를 사타구니 속으로 박았다. "으으...!" 상국의 몸이 목공소의 톱날처럼 떨렸다. 가래 끓는 소리로 비명을 질러대는데 차라리 내가 저 자리에 누웠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으으...추워... 무울...물...!" "정신이 좀 드냐. 심들 것지만 이를 꽉 물어야. 의사선상님이 수술은 잘 됐댜." 헐렁해진 요대기를 덮어씌우려던 한국이 망연자실했다.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상국이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눈에선 눈물이 찔끔거렸다. 어금니를 욱신거리며 질러대는 비명이 비수처럼 불안스러웠다. "아부지! 나 죽어... 으흑...! 으으, 아부지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담요를 덮어씌운 한국이 뛰었다. 다행히 간호사은 멀리 있지 않았다. 눈자위의 눈물을 쓸어내리며 한국이 간호사의 치마꼬리를 무작정 잡고 늘어졌다. "쟈 상국이, 상국이 죽어유. 지발..." 그러나 간호사은 무심하기 이를데없었다. "가 계세요. 시간되면 봐 드릴테니까. 침상에서 굴러 떨어지지만 않게 하세요." "가유. 지금. 쟈가 죽어간다니까요. 야...?" "글쎄 아저씬. 별일 아니라니까요. 마취에서 깨어나자면 원래 그런 거예요. 춥고 떨리고 가래 끓고, 안심하세요. 별거 아니니." 잡고 있던 한국의 손길을 매정하게 탁 털더니 간호사은 링게르병을 들고는 어디론지 가버리는 게 아닌가. "히... 빌기 아니라고. 쟈가 지금 저런디도. 오살할..." 한국이 제자리로 돌아와보니 상국은 반 미치광이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안타까운 눈으로 그냥 바라다보기만 할 뿐 달리 손쓸 방도가 없었다.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상국이 뿌옇게 번져왔다. "참어라야. 어금니 꾹 깨물고...빌일 아니란뎌." 요대기나 더 덮어줄까 하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마저 여의치 않았다. 병상은 만원이었고, 다들 이쪽에는 무관심했다. 통증과 한기와 갈증으로 버둥거리던 상국이 이내 조용해졌다. 18. 잠이 든 것 같았다. 시간이 되었던지 담당의사와 간호사이 들어왔고,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상국이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그들이 나간 후, 얼마가 더 지났을까. 죽은 듯이 누워있던 상국이 부스스 몸을 털었다. 초조한 눈으로 지켜보던 한국이 마른침을 꼴깍 삼킨다. 상국이 눈을 떴다. 피곤하고 지친 얼굴로 한국을 멀겋게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어뗘야. 심들드라두 꾹 눌러 참어야. 수술은 잘 됐댜." 상국이 힘없이 웃었다. 양쪽 어깨는 물론 턱 밑까지 깁스붕대로 감겨 있는 상국은 석고상을 방불케 했다. 축 쳐진 몰골이 측은했다. 한국이 상국의 손을 잡았다. "미안타야. 병원 신세는 내가 져야 하는 건디... 괜히 나 땜에..." 상국이 눈을 감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광대뼈까가 튀어나오도록 어금니를 옥물었다. "은숙인...?" "누구? 너 방금 누굴 찾었능겨." "미선이 년 말여, 임마..." "잉. 난 또... 연락했어야. ㅇ드라." "뭐야! ㅇ어...? 학원 파한 지가 운젠데. 한국이 니 잘못 들은 건 아니고?" "뭔 소리냐? 갼 있었어." "그럼, 누가!" "너 시방 니 처 얘기하는 거 아녀?" "그렇다니까! 그래 지금 시간이 및 신데 집구석에 ㅇ음?" 꼴에 성깔은 살아있던지 경황중에도 큰소리가 나왔다. "헷갈린다야. 우쨌든 니 처, 그려 지수씬 ㅇ드라. 니 나오고 그 질로 나갔담서...미선이 갸만..." "얘기했냐? 설마 애한테 겁 준 건 아니겠지.너." 눈을 감고 하는 말이, 풀에 감긴 듯 맥이 없었다. 한국이 속도 모르고 손을 내저었다. "아녀야, 아녀! 교통사골 당혔는디 웃대가리가 몽지리..." 상국이 눈을 번쩍 떴는데 눈알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한국이 찔끔 놀라며 더듬거렸다. "들어오는 대루 연락하마 혔응께 소식 있을껴. 곧 오시것지. 너무 맘쓰지 말어라야. 칼질헌 덴 승질부리는 기 질 해롭다는겨." 상국이 끄응, 하며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눈을 도로 감았다.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던 절뚝발이가 텔레비전 볼륨을 올렸다. 뉴스시간인 듯, 남녀 두 앵커가 번갈아가며 진행을 맡고 있는데 수해에 관한 기사가 헤드라인으로 비쳐졌다. 늦장마. 수해. 예상치 못한 태풍과 그 행로. 앞으로의 예상강우량... 이러한 것들이 주요기사로 방영되고 있었다. 19. 혹시나 하고 쳐다보았지만 상국 일행의 교통사고에 대한 보도는 없었다. 지방뉴스시간에 잠깐 비쳤는데 대형사고인 점을 감안해본다면 그 비중이 너무나 빈약했다. 아마도 교통사고가 발생한 곳이 도계(道界)지역이어서 그런가 보았다. 뉴스가 끝날 쯤 되어 상국이 입을 열었다. "한국이 너어...내 말대루 확실하게 했겠제?" "뭐얼...?" "난쟁이말여 임마. 백대가리..." "난 또. 걱정말어야. 바위 틈에다, 아무도 모르게 나무쫑가리까지 꺾어 감쪽같이 덮어놨응께." 상국이 미심쩍다는 표정이었고, 한국이 걱정 말라는 듯 시원했다. "그려...잘했다. 마지막 희망인겨. 돌배 그 자슥이 그짓말 할 리는 없고." 상국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한국이 걱정스럽다는 듯 그 앞으로 바짝 붙었다. "근데...니가 하두 들볶아서 숨기긴 숨궜다만. 대체 아무짝에두 소용ㅇ는 시첼..." 상국이 손을 내저으려다 말고 악, 소릴 토해내며 우거지상이 되었다. 대신 부리부리한 눈알을 내두르며 한국의 입줄부터 봉하고 나섰다. "쉬잇...! 조용히혐 마. 뽀롱나믄 너나 나나 유치장신세란 걸 그세 잊었냐." 상국이 말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그것두 임마 남의것이고 보면 다 재산인겨. 쥔두 모르게 빼돌렸는데 죄가 안 되겠냐. 헌게 입 꾹 다물고 있어. 낼 아침이면 자동으로 알게 된팅게." "얀. 절손되구 혼자 떠돌아다닌다매. 죽으믄 그뿐이지 까마구 말구야 쥔이 어디 나서것냐." 상국이 답답하다는 듯, 한국을 턱 밑까지 불러 앉혔다. "해서 하는 소리여 임마. 병원 영란실이란 데, 너두 알랑가 모르겠다만, 임자 없으면 그냥 화장이여, 화장...! 근게 장사라두 지내주자면...알것냐 이제. 근데, 얼굴이 왜 그 모냥이냐? 오라... 이 전한국이 좋은 일 한다니께 믿기지 않는다 이 말인데... 너, 내 이런 말하믄 어떻게 들을지 모르지만, 나두 이젠 뭔가 느낌이 오는 것 같어. 난쟁이가 죽기 전에 하던 말, 어사무사해서 그렇지 조금은 알것두 같구. 어쨌건 낼 아침이면 자동으루 알게 될팅께 너두 좋은일 하는 셈치고 죽은 척혀. 알것냐." 말을 마친 상국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더니 속으로 히죽 웃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한국이 의외라는 듯 상국을 쳐다본다. 너같이 앙살맞은 놈에게도 그런 깊은 뜻이 있을 줄야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 미선을 앞세운 은숙이었다. 한국이 엉거주춤 일어섰고, 은숙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병상머리에 뜨악하게 섰다. 20. 그들 모녀 뒤로 간호사이 따라붙었다. 상국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웃는 것도 같고 우는 것도 같은, 우스꽝스럽고도 기묘한, 그러면서도 어딘지 노기가 서린, 그런 애매한 표정으로 방금 들어온 은숙과 간호사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은숙이 고개를 떨구며 무슨 말인가 할려고 할 때, 그러나 "자. 아,하고 벌리세요." 하며 그녀보다 간호사이 먼저 상국의 입에다 체온계를 물렸다. 간호사의 손길은 민첩하고 날렵했으며, 잘 훈련된 조련사의 몸놀림처럼 능란하면서도 빈틈이 없었다. 혈압을 잰다. 봉합부분을 점검한다. 링게르병에서 떨어지는 염수량을 조절한다. 체온을 체크한다. 모든 것이 정상임을 확인한 후, 마지막으로 환자에게 병리상태를 물어왔다. "불편하시거나 어디 이상있는 덴 없으시죠?" 간호사의 손놀림이 부드럽기 그지없건만 상국은 줄창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흐트러진 담요자락을 다독이고는 그녀가 막 돌아서 나가려할 때였다. "아가씨...!" 상국이 그녀를 황망히 불러세우더니, "물어봅시다. 어디가 얼만큼 잘못된 겁니까." 하며 역시 씨광한 얼굴로 묻는 게 아닌가. 그녀가 한국을 쳐다보며 생긋 웃었다. "내일 종합진찰을 받아보셔야 알겠지만,일차검진 결과는...양쪽 쇄골하구 목뼈가 부러졌습니다." "뭐요? 쇄골? 금방 쇄골이라구 하셨소!" "호홋...아저씨두. 지금 동이고 계신 어깨뼈 말예요. 오른쪽 팔도 이상이 있긴 한데 골절상인지 타박상인지는 더 두고 봐야 알 것 같아요." 상국이 은숙을 흘끗 쳐다보더니 기어드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것뿐입니까. 이상있다는 곳이..." "네. 아직까지는요." "그럴 리가... 쇄골인지 사골인지야 꿰 맞춤 된다지만. 어이구구...!" 상국이 죽을 상으로 입을 따악 벌리자 서 있던 간호사이 달려왔다. "어디 또 달리 아픈 데라두 계세요?" "으헉! 아이구야...! 허리가, 허리를 통..." 상국이 죽는 시늉으로 허우적거리자 뒷전에 서 있던 은숙이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이제껏 간호사의 구두끝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한국이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듯 입에 침을 발랐다. "얀. 니 허린..." 상국이 한국을 노려보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21. "그려 한국이 너, 한국이 니가 날 구해냈으니까 알겠구나. 쾅, 하구 백혔을 때 내 허리가...너 그때 내가 죽었는 줄 알었다구 했지, 그치? 허리가 부러져서. 교통사고로 내 허리 나간 건 현장에 있던 한국이 자, 자가 더 잘 압니다. 아이구구! 허리야...!" 상국의 눈초리가 어찌나 매서웠던지 한국이 찔끔해선 도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누구보다 그의 성깔을 잘 알았다. 눈꼬리만 째졌다 하면 입을 다무는 게 호수였다. 대신 간호사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액스레이촬영엔 이상이 없던데...우선 참고 기다려보세요. 박사님이 오시면 상의드리겠습니다. 교통사고라는 것이 그래요. 다 완치가 됐지 싶어 퇴원했다가도 다시 입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그녀가 병록카드에 무언가 열심히 적으며 문을 열고 나가자 상국이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이 너어! 증말...껀껀이 걸고 넘어질래? 이건 임마 내 일이여, 내 일! 죽어두 내가 죽고 부러져도 내가 부러진다는데 니가 왜 자꾸 나서냐 엉?" "야는. 내가 뭘...?" "그래두 이게. 또오! 아이구구...! 나 죽어..." "알었어야. 알었어. 앞으룬 니가 뭔 말을 하든 입 봉하면 될 거 아니 것냐." 상국의 얼굴이 여전히 씨광했으나 조금은 누그러져 있었다. 화투판에서 멍텅구리 열끝짜리 일곱 개 해놓고도 피박이라 하면 돈 물어 줄 놈이 전한국 아니던가. 큰소리 칠 데가 따로 있고 윽박지를 데가 따로 있을 것이니. 제딴에는 근심스러이 서 있는 아내 쪽도 마찬가지였다. 여적지 어디서 뭔 지랄로 싸돌아다니다 이제사 나타난 거냐고 다그치려던 울화통이, 허리가 어쩌고 저쩌고 하다보니 지레 수그러들었다. 툭 하면 뒤틀리는, 그놈의 허리병이 원수였다. 어쩌면 이번 교통사고는 아주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이참에 아주 뿌리를 뽑으리라는 각오였다. 죽은놈이야 시왕전(十王殿)에 들어 하소연을 하든 육도윤회를 거쳐 미축으로 환생을 하든, 지놈이 알아서 할 일이겠고, 살아있는 이 전상국이야 등잔같이 살아있는 눈이요, 입이 아니건가. 요번 기회에 허리병을 완치하던지 평생 먹고 살 보상금을 받아내던지, 뭔 수를 써서든 구원(久怨)을 청산할 것이라고 내심 벼르고 있는 중이었다.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지만 자야했다. 상국 자신보다 한국을 먼저 재워야 했다. 내일 아침이면 당장 해야 할 일이 막중했던 것이다. 새우잠으로 쪼그리고 누운 한국을 보면서 상국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뼈마디가 욱신거리고 통증이 자심했다. 잠이 들 만하면 꿈자리까지 뒤숭숭했다. 22. 뱀으로부터 시작한 꿈이, 귀면수의 철퇴에 얻어터지는가 하면 이로가 말하던 발설지옥인지 하는 데까지 끌려가 시달림을 당하곤 했다. 깨고 나면 그 꿈이 그 꿈인 것 같고, 다시 잠을 청하려 들면 모골송연한 꿈자리가 병실보다도 생생하게 펼쳐졌다. 한밤을 악몽으로 허옇게 지새운 상국이 눈을 떴다. 말이 눈을 떴지 감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밖에선 양철지붕에 돌 던지듯 빗소리가 요란했다. 잡놈의 늙은이 나하고 무슨 원수를 맺었다고... 상국이 흠칫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난쟁이 이로의 노기 띤 음성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한국아...! 한국이 너 어디 있는겨?" 벌레 씹은 얼굴로 선하품을 물고 있던 상국이 허겁지겁 한국을 찾았다. 고지박인 양, 앉은 채 졸고 있던 은숙이 부스스 몸을 털었다. 선잠으로 설치긴 상국이나 매 한가지였다. "한국이...한국인 어디 있지? 느루실루 간 건 아녀!" "어어휴...! 당신두...꼭두새벽부터 웬 난리예요. 누가 뭘 어쨌다구요." 은숙이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상국의 목소리가 누그러질 줄 몰랐다. "한국이! 한국이 말여!" "네에...!?" 은숙이 후닥닥 일어났다. 옆자리가 허전했던 것이다. 미선이와 같이 붙어자던 한국이었다. 분명 한국이 누워 있던 자리였는데 잠을 잔 흔적도 없이 말끔했다. 불길한 예감이 퍼뜩 스치는 은숙이었다. 하거나 말거나 남편 상국과는 달리 이내 평정을 찾는 그녀였다. "어디 화장실이라두 간 게죠. 벌건 대낮에도 길이 서툰 사람이 어딜..." 당장 화장실에라도 가보라고 소리치려던 상국이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화장실 간 놈이라면 찾지 않아도 돌아올 것이고, 남자화장실에 들어가서 기웃거릴 은숙이 아니었다. 아침상이 들어올 때가 되었는데도 한국은 돌아오지 않았다. 미치고 까무러칠 노릇이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혹시라도 모를 일이니 집으로 전화를 걸어보라고 은숙을 내몰았지만, 전화를 걸고 돌아온 은숙은 여전히 태평이었다. "안왔데요. 지 색시 될 처자하고 같이 나갔단 앤디 무슨 걱정이냐며, 도리어 나무랍디다. 신새벽부터 걱정끼쳐드리기도 뭣하고 해서 당신 교통사고소식은 그만 뒀어요." 상국이 들고 있던 숫가락을 휘저었다. 서툴기도 한 왼손질이었으나 그보다 귀에 거슬리는 은숙의 말투였으니. 23. "밖엔?" "뭐가요?" "날씨말여. 비가 여즉 오냐고." "소리 들오봄 몰라요. 길바닥이 아니라 물바다입디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동이째 퍼붓는 우세가 칠월장마 저리 가랍디다." "옘병할! 으헉. 아이구구...! 씨부럴 눔의 팔은 해필 오른쪽이야." 회진이 시작되었다. 담당의사가 선두에 섰고, 상국이 간호사에게 한 말을 고대로 의사에게 박았다. 굴신을 못할 정도로 허리가 아픈 것하며, 혹시 출근길에 이러이러한 사람을 보지 못했느냐까지. 하얀 가운을 걸친 담당의사가 고개를 끄덕였고, 또 고개를 내저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옳고 그른지 참으로 애매하게 보이는 제스처였다. 똥 마려운 강아지 투견장에 내몰린 격으로 안절부절 못 하는 상국이었다. 은숙이 거든다고 거들었으나 쓰리고 답답한 속마음까지는 어쩔 도리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노릇이었다. 아무에게나 드러낼 사정도 아니었다. 한국이 아니면 해낼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고, 또 한국이라야만 했다. 날만 밝아오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행방불명이라니. 홀랑 벗은 알몸으로 종합진찰이란 것을 받은 상국이 은숙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와보니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석배였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었다. 설마 저놈이... 반들거리는 대머리 하며 짝 빼 입은 양복바지하며 그놈일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했던 것이다. 아주 낯선 곳에 들어설 때처럼 상국이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그가 혼 빠진 놈처럼 정신없이 쳐다보는 쪽은 석배도 석배였지만, 그의 곁에 서 있는 미모의 숙녀분. 명년 4월 5일 식목일로 택일을 점했다고 했던가. 주연실이 고개를 까닥해 보이자 상국이 어질증에 몰리는 표정이었으니. 마치 그 얼굴은, 저 멀리 낙도에서 올라온 어린 학생이 서울특별시에 있는 63층인가 하는 빌딩에 올라서서 인왕인가 북악인가 하는 곳에 초점이 맞추어진 망원경을 들여다 볼 때처럼, 아주 상기되고 흥분된 얼굴이었다. 아무리 쳐다보아도 초점이 맞지 않던지 문고리에 턱을 걸고 서 있던 상국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석배 저놈, 제놈이 병문안을 받는 거라고 착각을 했던지 거들먹거리며 서 있는 꼴이 또한 가관이었으니. "돌배 니눔이 여길 우ㄸ게 알고. 앉어라야 앉어." "메스콤에 시달려 그러냐. 우째 헬쓱허다. 많이 다친 덴 ㅇ고?" "보다시피 꼴이 말이 아니다. 일기불순에 악재까지 겹쳤다." "듣자하니 니 혼자가 아니라 한국이까지 같이 탓었다더니. 첨엔 내 혼자 올라 했는데 한국이 소리가 나니까 여그 연실 씨도 궁금하다며...우리 연실 씨 원래가 잔정이 각별하거던." 상국의 눈썹이 꿈틀했다. 24. "그 새끼. 그 새낀 말두마라. 어딜루 튀었는지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나 몰라라 하군 오밤중에 어딜루 샜다 샜어...말이 형제지간이지 따지고 보면 내가 이렇게 된 것도 다 지놈 위하자고 했던 일인데. 어째 집이루 가자구 할 때부터 뒤로 슬금슬금 빼더니 기어이 새뿌렀다. 잡눔으 새끼! 형이고 나발이고 배때지 가르면 아마 구렁이 열댓 마리쯤은 우굴거릴거다. 엉성한 거 같애도 지 속밖에 챙길 줄 모르는, 노린재보다 더 독한 놈이여 그 자슥이. 에이, 순...!" 상국이 주연실을 쳐다보는 눈이 좀전과는 판이했다. 독오른 푸독사처럼 면전에다 대고 퍼붓는 욕설이 들어보라고 하는 소리 같았다. "너두야 어지간하다. 곰배팔이도 흔들면 안으로 굽는다는데 넌 어째 그 모양이냐. 말하는 쿠새가 남보다두 흠하다. 딴 볼일이 있었겠지. 설마하니 너 이런 꼴로 놔두고 도망이야 갔겠냐." "아념마. 다 짚이 데가 있으니 하는 소리지. 꼴에 그 자슥, 직장이 어떻고 월급이 어떻고 나불대는 게... 따지고 보면 다 니눔, 김석배 잘 만난 탓이다." "샛긔넌. 건 또 무슨 잡소리고." "생각해봐 임마. 그 자슥이 누구 땜에 저렇게 됐는지. 니가 한 일이니 니가 더 잘 알 거 아녀." "관 두자 연실 씨 앞에서 이런 얘기 한다는 자체부터가 내가 챙피하다. 돈은 돈대루 떼이고." "돈?" "그려. 시간비 십만 원." 주연실이 발 탕, 굴렀고 김석배가 입을 딱 벌리며 자지러졌다. 김석배,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던지 절름거리며 의자를 끌어다 앉는다. 상국은 비스듬히 누워서, 석배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서 말로써 말이 많은데 교통사고와, 그 사고를 당한 아픔을 달래고 쓰다듬어줄 만한 위로의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이, 전부 이런 얘기뿐으로, 밤고양이 교미하는 꼴로다 싸우자는 건지 정을 나누자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야, 너참. 나 찾아오잠 앞으룬 애께나 먹어야 할 거다." "왬마. 이참에 아주 내 눈까정 멀었으면 하고 바라는 모냥이다만, 애석하게도 이상ㅇ다. 1.5, 2.0 절뚝백이라서 그렇지 아직은 유리알인게." "그게 아니라 가게를 옮겼다 이 말이다. 중언부언하자면 좀 크고 광 나는 곳으루다 이사를 혔다 이말이지. 돈 좀 썼다." "뭐여? 이사?" "그려. 이사." "어디루?" "어디긴. 냉중에 와보면 알겠지만, 저번 있든 곳 열배? 맞어. 한 열둬 배쯤은 될겨. 손님 의자만 해두 열두 개가 넘은게." "얼씨구 이 자식이 요오...내가 병원에 갇혀 있응게 아주..." "그짓말 아녀야. 연실 씨 체면도 있고 나두 이잔 종업원 둘 때 됐지 않었냐. 무리 좀 했다만 종 부리고 사니께 편하긴 그만이드라." 상국이 그냥 입만 딱 벌리고 있었다. 25. 축하한다고는 해야겠는데 어깨죽지가 쑤시는 것은 둘째로 하고, 당최 뱃가죽이 땡겨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출입문이 화작작 열리며 몽달귀신 같은 검은 그림자가 허청했다. 병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어어라! 자가...? 한국이 아니냐 너!?" 병상 밑으로 기어들 듯 물러서던 석배가 눈을 부비며 더듬거렸다. "뭐야! 누구라고...?" 놀라기로야 등을 돌리고 있던 상국을 당할 것인가. 주위의 모든 시선이 문쪽으로 향했다. 비에 쫄딱 젖은 채 멀건 등신처럼 서 있는 허수아비. 한국이 틀림없었다. 석배가 부축했다. 상국 앞에 앉히고 보니 이게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흉악했다. 머리는 봉두난발이었고, 걸레조각이나 다를 게 없이 찢기고 헤진 옷에선 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름이 오싹했다. 영락없는 물귀신이었다. 더구나 찢기고 헤진 옷 틈새로 비죽비죽 튀어나온 살갗에선 벌건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어, 귀기까지 풍기고 있었다. "아니! 너어..." 상국이 어찌나 놀랐던지 입만 딱 벌리고 있었다. "누구하고 싸웠냐? 날강도한테 린치당했구나 그챠? 돈이 없으니까 두들겨 맞은 거지? 도대체 어느 놈들이데?" 남의 일이어서 그랬던지 상국보다는 석배가 더 침착했다. 그러나 석배의 묻는 말에 한국은 무표정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저 멍하니 앉아있을 뿐이었다. 두 뺨에선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키 어려운 물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석배 야 말대루 누구한테 ㅇ어 터졌냐? 어떻게 생겨먹은 놈들이던? 몇 놈이고?" 침착을 되찾은 상국까지 다그쳐 물었으나 한국은 역시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답답했지만,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윽박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신창이로 앉아 있는 한국이 그만큼 측은하기도 했던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던 한국이 고개를 푹 떨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째믄 좋으냐... 우째믄. 허이구, 내가 떠내려 갔어야 하는 건데..." "...?" "일찍 갔어야 하는걸... 아녀...일찍 갔어두 그랬을겨. 등신같이 고만..." "야 참 답답하다. 어딜?" "거길 갔었어야. 어제..." "뭐야! 어제...? 너어, 그럼...!" 상국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흑빛으로 변했다. 26. "석, 석배야...잠깐, 잠깐만 나갔다 와주라. 야 한국이 하고 단독으루 할 말이 있어서 그런게. 잠깐이면 돼. 얼릉 임마." 상국이 애걸하는 시늉으로 김석배를 쳐다봤다. 영문을 알 리 없는 김석배로서야 형제지간의 집안 얘기이거니 했다. 주연실이 한국에게 무슨 말인가 할 듯했으나 상국의 눈초리가 너무나 따가웠고, 또한 김석배의 손길이 자신의 허리를 칙칙하게 감아왔으므로 눈길만 주었을 뿐, 별 말 없이 김석배의 뒤를 따라갔다. 김석배와 주연실이 보이지 않게 되자 이번엔 아내 은숙까지 밖으로 내모는 상국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게 되자 그제사 상국이 입을 열었다. "한국이 너어 그럼...어제 거기 교통사고현장엘 갔었다 이 말이냐?"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캄캄한 밤중에? 니 혼자?" 상국의 목소리가 떨렸다. 멀건 등신처럼 넋을 놓고 앉아 있던 한국이 이마에 흘러내리는 물기를 소매로 훌치며 상국을 쳐다본다. 쳐다보는 얼굴은 온통 피멍이 들어 푸르딩딩하니 죽어있다. 한국이 잔뜩 겁에 질린 눈초리로 꿈꾸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백설겉이 허연 말이...아녀 첨엔 죽은 노인이 뱀처럼 기어오더니, 허연 두루매길 입구...꼭 생시만 같었어. 그러더니 히이힝 하고는 하늘루 날러오르는데...백설겉이 허연..." "뭔 말이냐 시방. 차근차근 종을 대봐라. 알아묵기 쉽게." "초지녁에 그러고 나니 내내 뒤숭숭한 게 잠이 와야지... 몰러 나두. 귀신한테 쏠렸던가벼." 초점 잃은 눈동자를 허공에 박은 한국이 혼잣말을 계속 이어갔다. "밖엘 나가보니 비가 울매나 쏟아지는지...그냥 뒀다간 장사 지내기두 전에 빗물에 떠내려보내지 싶드라. 남의 눈을 피해 부랴부랴 묻어둔다는 곳이 가만 생각해본게 도랑 여분대기 아녔겠냐. 캄캄하거나 말거나 길만 따라감 되지 싶어 나두 모르게 갔었다. 죽은 노인이 자꾸 부르는 것도 같았고..." "그으, 그래서...?" "가다보니 날이 붐하게 새드라. 및 시간을 걸었는 지두 몰러. 그냥 대구 갔응께. 나오긴 나오드라만..." 한국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리곤 입을 꾹 다물고 마는 게 아닌가.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상국이 마른침을 삼켰다. 상국에겐 그 다음이 중요했다. 이번 여행에 있어 톡 까놓고 말하면 죽은 그 난쟁이 노인이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멀쩡한 한국을 병원으로 데려가겠다는 발상부터가, 원주가 아니더라도 그 노인이 가는 곳이라면 땅끝 어디라도 따라 나섰을 상국이었다. 27. 이 여행의 종착역은 노인의 행선지였던 것이다. 상국의 흉금을 알 리 없는 한국이었다. 살아생전에 불쌍했던 노인, 불구덩이에 넣어서는 안 된다는, 그래서 어디 따뜻한 산자락에라도 묻어줘야 한다는 상국의 말을 고스란히 믿고 있던 한국이었다. 그런 한국에게, 왜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갔었느냐고 따져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쨌건 그 다음이 궁금한 상국이었다. "그래서? 그곳엘 가보니까 뭐가 어찌 되었길래?" 상국이 다음 말을 다그쳤다. 그러나 한번 입을 다문 한국은 소죽은 귀신이었다. 젖은 옷이 몸에 착 달라붙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속살이 허옇게 너불거렸다. 앉아있는 발치가 흥건했다. 한국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오지랖을 쥐어짰다. 고여 있는 물 위로 방금 짜낸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백대가리 난쟁이...이론가 하는 노인은 그냥 있더냐고! 앉은뱅이 앞에서 난쟁이가 호령한다드니 니가 그짝이구나. 아이구구...! 팔이야..." 상국이 뛰어내리지도 못하고 그냥 울상이 되어 버렸다. 한국이 저도 딴에는 신경질이 났던지 발을 탁,하고 구른다. 볼기를 칠 때처럼 찰싹 소리가 났다. 고여있던 물이 방울방울 튀었다. "떠내려갔다구...떠내려보냈다구 안핸." "뭐야...! 떠내려가? 떠내려보냈다는 건 또..." "간밤에 물이 울매나 불어났든지 바우 틈에까지 도랑물이 넘쳐선...있긴 있드라. 첨엔 살아있는 줄 알었어. 물에 젖어서 그렇지, 상처 하나 ㅇ이 멀끔한 얼굴이...조금만 늦었어두 물살에 씰려보낼 뻔혔어. 안전한 곳으로 옮겨놔야지 혔는데..." "...!" "급작시리 물이 뿔더라. 고뱅이까지 차는 거여. 시체라구 좀 즉으냐 얼릉 안었는데...뭔가 푸드득 하더니...증말여야. 기절할 뻔혔다. 깜짝 놀랬어. 히잉...! 하더니, 백설겉이 허연 말이..." "...?" "날개를 달군 날아오르는데...그짓말 아녀. 눈으루 똑똑히 봤응께. 근데...근데, ㅇ드라...소시라치게 놀래선 바우 우루다 올라오구보니, 말두 사람두..." "소지품은!" 상국이 한탄조로 소릴 질렀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엔 절망스런 표정이 짙게 깔려 있었다. "옷가질, 난쟁이가 입고 있든 옷가질 뒤져보지 않었냐고. 호주머니에 집히는 게 ㅇ드냔 말이다." 한국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껌뻑였다. "ㅇ드라니깐. 아무 것두...그냥 그러구 말었어...올 땐 다행히 차가 있드라. 운전수두 내가 돈이 ㅇ는 걸 알었든지 빗길에 조심허시오 허군 그냥 가드라. 지금 생각해본 게 그차 운전수두 꿈 같어. 크다만 버쓴데두 손님 하나 안 싣구." 한국이 꿈을 꾸듯 눈빛이 흐릿했다. 그런 한국을 앞에 둔 상국이 허망하게 웃으며 장탄식이었다. 28. "끝이구나...끝이여...넨지랄루 나만 병신이 되고..." 상국이 상반신을 축 늘어뜨리곤 허탈한 표정으로 앉아있는데 한국이, "근데 야. 좀 전에 나간 사람 혹시...석배 동상 아니드나?" 하며 이제야 정신이 든다는 듯, 달뜬 얼굴로 대드는 게 아닌가. 대답할 기력도 없는 상국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수고와 기대가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내려, 숨소리 고르기도 버거운 상국이었다. 그저 모든 게 한자락 꿈이거니 맥을 놓고 있는데 퍼렇게 얼어붙은 입술을 지근거리며 한국이 또 물어왔다. "석배허고, 갸 곁에 혹시...연실 씨... 연실 씨 아니드나." 상국이 차라리 웃었다. "넌 아직도 다방냄비 타령이냐. 죽은 송장 하나 못 챙겨 떠내려보낸 주제에...다 임자 있는 몸이다. 어디 가서 옷이나 갈어 입어라. 미선이 쟈가 집은 알테니 내 옷이라두 갈어 입구. 그래, 아예 ㅇ어지는 게 낫겠다. 니 얼굴 질레 봤다간 내 명두 다 못보구 가겠다." 상국이 미선을 불러세우려는데 석배가 들어왔다. 보이지 않았으면 좋을 성싶은 주연실까지 뒤에 보였다. 그렇다고 결혼 날짜까지 잡아놓은 두 사람을, 붙어다닌다고 탓할 입장은 못 되었다. 단지 한국과 그녀와의 특수한 관계, 그러니까 급작스럽게 위장되었던 맞선 상대자였다는, 그런 서먹서먹한 사정을 고려하여 볼 때, 상국으로선 석배나 그녀 스스로 한국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었다. 또 그것을 그들 둘 역시 모를 리 없건만 어쩌자고 저렇게 철없이 나대는지 그게 짜증스럽고 답답한 상국이었다. 김석배 저놈이야 돈에 눈이 멀고 나이에 뒤가 마려우니 그렇다 치고 저년 저 요망한, 김석배의 말대로라면 재벌2세에 까치다방 사장이 되시는, 사내를 홀려도 애오이 늙은오이 가리지 않고 덤불 그루째 후려잡을 저 쥐인지 양인지 하는 다방냄비는 도시 알다가도 모를 계집이었다. 한국이 누구 때문에 저 모양 저 꼴이 되었는지 저도 인간이라면 땅짐도 하고 어림도 할 일 아닌가. 다방에 근무하면 다 저렇게 낯 두꺼워지는가 하는 생각이 들자 고만 눈썹이 위로 째지고 마는 상국이었다. "여직 안 가고 우째 또 들어왔냐?" "가긴 임마. 널 이렇게 두고...하긴 갈려구 혔지. 혔는데 연실 씨가..." 생각없이 떠들던 석배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황소눈을 벌겋게 뜨고 쳐다보는 한국이, 빗물에 쫄딱 젖은 너저분한 몰골에도 불구하고 히 하고 웃고 있었던 것이다. "연실 씨...연실 씨가 맞쥬?" 한국이 석배가 흐려놓은 말끝을 이으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29. 이래선 안 되겠다 싶던지 상국이 그들을 자리에 앉혔다. 그리곤 손 쓸 사이도 없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자신의 기대와 계획에 대하여 보복이라도 하듯, 난쟁이 이로의 사망 사실을 김석배에게 비수처럼 들이대었다. "나두 첨엔 그 점쟁이가 탓는지두 몰렀다. 타고본게 조막막한 난쟁이가 아니 것냐. 설마했다. 돌배 니눔 말대루라면 뛰어두 멀리 뛰었을거라 생각했거던. 긴가민가 해서 자세히 다가가본 게 참말로 그 영감이더라. 기름기 잘잘 흐르는 게 어디서 돈도 많이 번거 같드라. 역시 난놈은 난놈이여." 김석배보다 주연실이 먼저 흠칫했다. 피해 당사자이니 놀라는 건 당연하리란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기왕에 엎질러진 물, 거짓말이래도 시원하게 해보자는 심술이었다. "밤색 양복으로 짜악 빼 입었는데, 청춘이여 청춘. 참말로 부티 나드라. 지갑을 은근히 뵈 주는데 죄다 수표여 수표. 차아...! 차에 오르기 전에만 그 영감인지 알었으면 내 버스 바꾸에 모가지를 디미는 한이 있어두 돌배 너한테 연락하는 건데...탁 꺼우러지고 말었으니." "아이구머니나! 그럼... 그분이 돌아가셨다 이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사고로 죽은 것도 죽은 거지만, 그 아까운 시체까지 물에 둥둥 떠내려갔으니." "얀. 상국이 넌 우째 맹탕 그으..." 주연실이 안 됐다는 듯 슬픈 표정을 지어보이자 곁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국이 보리알에 뭐 끼듯 또 끼어들 기세였다. 상국이 이를 악 물고는 성한 팔을 덜렁거렸다. "한국이 너어, 또...근데 돌배 닌 우째 암 말두 ㅇ냐?" "샛긔넌. 그 영감 죽은 거하고 나하고 뭔 관계가 있다고. 뜬 구름 한자락 오고감이 인생이라더라. 그 영감이 나한테 새겨들으라면서 한 말이다. 죽었음 죽은 거지." "뭐어야! 뚜룩쳐 갔다는 돈 이백만 원은?" "크흣...그러고보니 너 아직 고 말 고대로 갖고 있었구나. 너한테 얘기해 준다는 게 깜빡 했는가부다." "그, 그럼...그게 아니란 말이냐!" "놀래긴. 넌 우째 남 안 되기만 바라는 놈 같냐. 종업원들이 잘못 알았던겨. 꼼꼼한 연실 씨가 미리 챙겨둔지두 모르고 아가씨들이 오도방정을 떨었다는겨. 그짓말임 니가 직접 연실 씨한테 물어봐야." 상국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연실 쪽을 쳐다본다. 30.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분 만나면 사과라도 할려고 그랬는데...온다간다 말 한마디 않고 가셔서 여비 한푼도 못드렸거든요. 세상을 내다볼 줄 아시는, 참 훌륭한 분이셨는데 비명에 가시다니..." 상국의 몸이 꿈결처럼 흔들렸다. 실성한 놈처럼 흐흐거리더니 이내 멍한 눈빛으로 허탈해졌다. 난쟁이 이로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말 울음소리로 들려오고 있었다. 비는 이제 그쳤던지 창 밖이 환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환해질수록 어쩐지 불안하고 초조한 상국이었다. 이제 아무도 없다. 잘 있어라 야. 담에 또 올께. 참 이런 얘기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뚝 했다는 니 허리 말여.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참에 아주 고쳐뿌려라. 엄부렁을 써. 증인이 필요하믄 이 김석배가 있지 않냐. 세상은 그저 약게 살어야 하는 기다. 설마하니 니 허리디스크 하나 고쳐줬다구 버스회사가 망하기야 하겠냐. 또 망하면 어떻고. 상국이 쓰게 웃었다. 몸조리 잘 하세요. 석배 씨 오면 종종 들릴게요. 얼마 안 되지만 치료비에 보태 쓰세요. 상국이 '쾌유'라고 쓴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하나 둘 셋... 아내 은숙이 보고 있었으므로 봉투째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부성부성한 얼굴로 은숙이 집안일을 걱정했다. 가보라고 했다. 그녀가 펄쩍 뛰더니,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말을 지어붙였다. 이살 가든지. 비만 왔다하면 아궁이가 좁다하구 개삼이 터지니. 대충 손질하고 얼른 올게요. 제가 늦으면 도련님이라도 먼저 보낼테니. 미선아, 가자 얼른. 승질 부리지 말구...내 휘딱 가설랑 옷 갈어입구 올팅께. 그래두 다리가 성해서 다행이다야. 요강 깔구 앉었음 우쨀 뻔했냐. 히... 간호사이 들어왔고, 그녀의 간병을 받는 상국이 조금은 부러운 듯 한국이 힐끗거리며 은숙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후로 내내 눈을 감고 있었는데 악몽이었다. 잠이 들만하면 죽은 난쟁이가 보였다. 그냥 난쟁이가 아니라 생판 보도 못한 쌍두사거나 이무기로 변해 있었다. 가위 눌려 헛소리를 해대면서도 눈은 뜨이지 않았다. 가까스로 눈을 떠보면 식은 땀이 흥건했다. 이젠 눈을 감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눈꺼풀이 감겼다. 자연스레 난쟁이 이로가 나타났고, 어느샌가 그는 시뻘건 아가리를 딱 벌리고 달려드는 흉맹스러운 괴물에 쫓기고 있었다. 헛소리를 해대던 그가 눈을 떴다. 창틈으로 보송보송 마른 햇빛이 들이쳤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신선한 햇살이었다. 8. 라이브쇼 1. 주연실이 토끼처럼 눈을 부비더니 실내를 쭈욱 훑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녀가 가방을 뒤적였다. 갈피로 가름된 책이 펼쳐졌다. 책은, 이 지방의 문인들이 일년에 두 번씩 엮어내는 동인지였다. 신의 노래로 불꽃으로 이 밤 깊은 물살되어 홀로 흐르다 잦아지는 강물결 물가 어드메 연녹두 물풀의 적요로움도 만나 꽃비 맞이하며 꽃비 채우며 하늘길 먼 집 가고 또 가야 하는. 金昊淑이란 시인이 쓴 "먼 집"이란 시의 전문이었다. 얼굴 알음은 없었지만 같은 여자여서 그런지 그녀의 시가 마음에 들어, 지금처럼 누굴 기다리던가 짬이 날 때면 스스럼없이 접하게 되는 시인이었다. 더구나 요즘 쏟아져나오는 시들을 보면 하나같이, 깃대는 없이 깃발만 요란하게 나부끼던가 아니면, 전사(戰士)의 창날처럼 깃대만 섬짓스럽게 휘번득여, 첫장을 펼치기도 전에 고만 머리부터 내두르게 되는데 그녀의 시에선 그런 것이 없어 좋았다. 광부가 채광을 하듯, 글줄 사이 틈틈이 박혀 있는 시의를 캐내려가던 그녀가 책에서 눈을 뗀다. 창문이 덜컹했다. 밖을 내려다본다. 바람이 불고 있었고, 가로수 잎들이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아침에 일어나보면 거짓말같이 피어나 있는 봄날의 새닢과 같이, 가을날의 낙엽도 그렇게 스러져갔다. 포도 위를 어지럽게 굴러다니는 낙엽을 본다. 실내는 따듯하고 아늑했음에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옴츠렸다. 을씨년스럽고 심란했다. 밖엘 나가면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그런 심상이었다. 한줄기 바람에 저렇게도 맥없이 스러지다니... 앙상한 가지가 전신처럼 흔들린다. 엄마, 왜 우린 아빠가 없지. 어릴 때 늘 어머니에게 묻던 말이다. 없긴. 있잖니, 이 엄마가. 치이... 아부진 아니잖아. 이것아. 엄마가 있다는 것은 아부지가 있다는 것이다. 단지 이 자리에 보이지 않을 뿐이란다. 그랬었다. 그 말을 믿고 아버지란 사람을 찾지 말았어야 했는데... 여러분, 여러분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아뇨. 오래 전, 어느 성직자와 같이 했던 논쟁이었다.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당신은 절대로 존재하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2. 보이지 않으니까요. 보이지 않는 것까지 믿기엔 보이는 것이 너무나 많으니까요. 눈에 보이는 것도 다 믿기 어려운 세상인데 보이지도 않는 허상을 믿으라는 건 맹목이고 사기이며 진실을 호도하는 사술일 뿐입니다. 그것은 곧 분별을 흐리게 하는 행위이며, 분별을 흐리게 하는 행위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는 것보다 더 위험한 죄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있음과 없음'은 그 자체로 정언입니다. 당신의 하나님이 절대자라면 당신은 절대로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모든 사부대중에게 진리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을 차단했다는 그 죄 하나만으로 이유는 충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리하였노라는 당신의 변명을 하나님이 받아들인다면, 당신의 하나님은 지독한 에고이스트이던가 편벽주의자여서 당신이 말하는 그 하나님의 자격이 벌써 없어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하는 것만이 나에게 관여할 뿐입니다. 믿음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설명이 뱀처럼 길군요. 말이 많으면 위험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있음으로 당신 아버지도 있겠죠. 당신 아버지가 있었으니까 당신 할아버지도 있었겠죠. 당신 아버지가 땅에서 솟구치거나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자 그런 식으로 위로 올라가 봅시다. 당신의 조부와 증조부와 고조되시는 분들, 당신이 보았습니까. 당신의 눈으로 확인했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의 선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존재했던 모든 것들, 그리고 앞으로 존재할 그 모든 것들까지 포괄합니다. 그분은 힘이고 보이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엄연합니다. 당신이 당신의 할아버지를 의심하지 않듯이, 그리고 당신의 아들이 당신을 의심하지 않듯이. 당신은 지금 나뭇잎은 보면서 땅속에 묻힌 뿌리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역시 길군요. 출구도 없는 미로여행처럼.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 있다고 믿어야 할 만큼 현실은 너그럽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틈입할 여지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그리곤 휑하니 나왔었는데 뜨개질을 하다 말고 시침을 떼지 않았을 때처럼 허전한 것 같기도 했고 찜찜하기도 했었다. 그러한 생각은 그녀의 가슴에 두고두고 남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뇌리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당시엔 자신의 말이 옳은 듯했고, 그래서 추호의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과연 그러할 것인가란 생각이 들었다. 3. 그것은 곧 회의였다. 자신이 없다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고보면, 지금까지 견지해온 지극히 현실적이고 유교적인 인생관에 변화를 예고함이기도 했다. 나이를 먹었고, 그만큼 죽음에 가까워져서일까. 아니면 자신과 반대입장에 있던 자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거기에 주눅이 들어서일까.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사후에 관한 영적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한 개인의 출생과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노정에 있어서, 신은 어쩌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따지고보면 있음이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가. 전존재를 포괄하고 있는 현실이란 또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돌덩이처럼 단단한 것이면서도 아무런 기약이나 예고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어디 비누방울뿐이겠는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벌벌거리고 걸어다니던 앞집의 김아무개를 난데없이 생겨난 묘둥지와 동일시해야 하고, 풀무치나 딱정벌레를 골탕먹이던 개미귀신을 명주잠자리와 같다고 믿어야 하는 게 현실 아닌가.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치밀해보이고 세상의 그 어떤 병기로도 깨뜨릴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해 보이는 현실이, 그러나 어쩌면 허위와 위선과 맹목으로 교묘히 위장된 그림자덫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구에게서도 간섭받음 없이, 오로지 자신의 독립된 판단과 의지로 이제껏 살아왔노라고 주저치 않고 말하는 이 있다해도, 되돌아보면 주변의 모든 상황이 다 그렇게 되어 있었고, 베틀의 씨줄과 날줄처럼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게끔 모든 상황은 조작되고 정리되어 있지는 않았던가. 거대하고도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서 조종당하고 통제받지는 않았던가. 반항할 수도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는, 태어나면서부터 받아든 길을, 수십 리 떠나온 일벌이 제 집을 찾아가듯, 사망이라는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그렇게 달려온 것은 또 아닌가. 사람은, 단순히 무엇이 되고자 태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이 되고자 해도 그 무엇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머무를 간이역은 어디에고 마련되어 있지 않다. 시간에 관계되는 한 믿고 의지할 만한 곳은 전무하다. 보라, 과거에 연연할 것인가. 이미 지나가버린 것을.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 찰나에 지나지 않는 순간인 것을. 그렇다고 당도하지도 않은 미래에다 삼세간에 유일한 자신을 맡길 것인가. 무엇이 될 수도 없고, 어디에고 기댈 곳 없이, 부침하는 탁류의 버들잎처럼 돌부리에 채이고 물살에 휩싸이면서 열려진 물길을 따라 가고 또 갈 뿐인 것이다. 인생은 그저 과정이고 변화 그 자체일 뿐이라면... 4. 그렇다면 신은...그래 꼭 '신(神)'이라고 명명하지 않더래도 그와 비슷한 무엇은 있는 것 아닐까. 비폭의 계곡에 물길을 만들고 그 위에 물줄기를 들이댄 이. 역으로, 물줄기를 퍼부어 물길을 만들고 버들잎을 띄운 이. 거역할 수 없고, 이탈할 수 없는 물길과 주변 풍광들. 어쩌면 현상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매김된 것인지도 모르며, 변하고 또 변이되는 것은 시간이 만들어낸 착시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먼 집'을 나름대로 상상해보며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러자 바람소리가 귓전에 곧추 서서는 팽이처럼 돌았다. 머리가 아뜩했다. 그녀가 머리를 손으로 감싸쥐며 잠깐 동안 고개를 숙였다. 한 장의 스냅사진이 낙엽에 섞여 포르르 날렸던 것이다. 후리후리한 키에 쪽을 진 머리결로 앉아 있는 중년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늘 왼쪽 무릎은 꿇고 오른쪽 무릎은 세운 자세로 경대 앞에 앉아 있었는데 립스틱을 바르던가 아이브러쉬를 매만지고 있었다. 쪽진 머리와 농염한 화장기. 어딘지 어색하고 촌스러울 것 같은 데도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아마 다른 여자가 그런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면 희극무대에 올려진 배우처럼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을 것인데,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느껴졌다. 서구의 이지적이고 현대적인 신선미와 동양의 정숙함과 은자적인 고전미가 교묘히 어울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감탄사를 연발케 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미용술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체격조건과 이지적인 마스크, 그리고 은연중에 배어나오는 단아한 기품이 그녀로 하여금 그렇게 만드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그녀는 창부적인 기질과 숙녀다운 기품을 한몸에 지닌, 어느 한쪽으로 규정짓기 힘든 인물이었다. 책장을 덮는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러고보니 스넵사진의 여인과 빼어닮았다. 훤칠한 몸매며 갸름한 얼굴은 물론, 선이 굵은 눈썹까지.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에겐 볼우물이 패여 있다는 것이고, 표정이 좀 어둡고 눅눅하다는 것인데 얼핏 보아선 판에 박은 듯 분간키 어려웠다. 어두운 그늘을 지우려는 듯, 그녀는 손거울을 꺼내 들더니 억지 웃음을 지어보였다. 눈을 치떠보기도 하고 입술을 삐쭉이 오무려 쪽, 하곤 거울에다 입맞춤을 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표정을 지어보며 흥흥거리던 그녀가 이내 시무룩해졌다. 5.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거울을 도로 덮었다. 어떠한 기쁜 표정을 지어보고 아무리 즐거운 일을 떠올려봐도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없어지기는 커녕 더욱 무겁고 짙어만 갔던 것이다. 늘 그랬다. 그녀는 이제껏 그녀의 어머니를 꼭 기억해 내야겠다고 해서 기억해 낸 적은 한번도 없었다. 문풍지가 떨리면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리고, 부엉이 울음소리 다음엔 도둑고양이처럼 산길을 넘는 밤호랑이가 연상되어지듯, 오늘처럼 이렇게 허전하다거나 심사 울적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떠올려지는 그녀의 어머니였는데, 도둑고양이처럼 은밀하기도 하였고, 부엉이나 호랑이처럼 두렵기도 하였다. 이러한 감정은 그녀의 어머니가 지니고 있던 이지적이고 단아한 기품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했던 어린시절이 그리 유쾌하지 못했던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기억대로라면, 그녀의 집은 방이었다. 농짝 하나와 그 사이에 끼어있는 야트막한 경대. 어른 두 사람만 누워도 칼잠을 자야 하는 작고 좁은 방이 그녀가 보낸 어린시절의 전부였다. 작은 방이었음에도 여러가지 잡다한 가구들이 너절하게 널려 있었으나 그녀의 뇌리에 아직도 생생한 건 구닥다리 벽시계였다. 길쭉한 분침은 언제나 앞으로 한번 뒤로 한번 까닥거리며 곧추선 불알을 만지작거렸다. 밤나무 색깔의, 가지도 않던 그 벽시계가 그렇게도 단단하게 뇌리에 박혀진 까닭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것이 남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벽시계, 그것도 곧추서 있는 시계불알을 생각할 때면 그는 늘 남자들, 꼭 제 아비뻘 되는 나이 지긋한 남자들을 잊지 못한다. 어찌된 셈인지 그녀의 어머니, 그러니까 스넵사진의 그 여인은 봉창에 해가 떨어질 때쯤되야 일어나선 어디론지 나갔다. 경대 앞으로 각인된 여인의 모습은 오후의 일상일 것이다. 아침은 으레껏 굶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지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고작 두세 시간도 못넘겨 저녁을 먹는 것도 다른 집에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의 때거름이나 규칙없는 식사시간에 대해 투정해본 적은 없었다. 점심은 굶고 저녁은 죽으로 떼우는 다른 집 아이들에 비한다면 그 정도의 게으름은 차라리 복에 겨울 일이었다. 솥에 담긴 밥을 혼자 퍼 먹을 때도 한얀 쌀밥임을 확인하고는 일을 하러 나간다는 어머니가 오히려 자랑스럽기까지 했던 것이다. 저녁 어스름 집을 나간 그녀의 어머니는 밤이 늦어서야 들어왔고, 어린 그녀는 잠에 골아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일어나 보면 대개는 여인 혼자 자고 있었는데 어떤 때는 낯선 사내와 같이 자는 경우도 있었다. 6. 그럴때면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또 자는 척해야 했고, 그 사내가 자리를 털고 나갈 때까지 억지 잠을 청해야 했다. 그렇게 자는 척하고 있다보면 여인과 사내가 한덩어리가 되어 이불 위를 뒹굴기도 했고, 두 몸뚱이가 겹으로 포개어져 도저히 흉내도 못낼 괴상한 소리와 신음 같은 걸 지르기도 했다. 실눈을 가늘게 뜨고 보면 언제나 여인이 사내의 아래쪽에 깔려 곱사등이처럼 뒹굴었는데 어느 땐 숨이 넘어갈 것 같아, 우리 엄마 죽이지 말라고 소리를 지를 뻔한 적도 있었다. 여인이 사내의 배꼽놀이에 올라앉아 춤을 출 때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는 극히 드믄 일이었고, 설사 그렇다 해도 여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으니, 사내가 방에 있을 때는 언제나 불안하고 두려웠었다. 낯선 사내가 나간 다음에 일어나 보면 여인은 언제나 입술이 부르터 있어 이빨자국이 선명했다. 손톱에 피멍이 들어 있을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는 사내가 늦게 나가는 날이었다. 지금도 시계추를 보면 당시의 사내들, 꼭 털가죽이 벗겨진 토끼처럼 헐떡거리던 아버지 뻘의 사내들이 끔찍스럽게 떠올랐다. 국민학교 3학년이 되던 열한 살 때까지, 그러니까 유태중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나올 때까지, 여인과는 그런 식으로 같이 지냈다. 과거를 공유한다는 것은, 그것이 칙칙하고 어두웠건 아니면 아주 화려하고 유쾌했건, 기본적으로는 사고의 원천이 같다는 뜻일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행동의 양식 또한 닮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모든 인간은 과거를 공유하기 때문에 동류항으로 묶여질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이유로 아무리 악한 자라도 그자의 내면, 의식의 기저에 도도히 흐르는 '사랑'이라고 불리우는 휴머니즘을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소이연(所以然)이나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의 어머니와 같이 했던 과거를 기억하면 별수없이 얼굴엔 그림자가 드리우고 부엉이나 호랑이처럼 두려워지는 것이었으니. 더구나 그것이 예고되거나 예단된 회생이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떠오른 호적등본의 이름자 같은 것이어서 당혹하기 일쑤였다.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호적등본의 이름자도 그랬다. 어머니와 자신이 동성동본이라는 것은 그렇다치고, 아버지로 올려진 사람의 성씨가 자신과는 타성으로 되어 있다는 게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차라리 부란(父欄)의 이름이 공란으로 남아, 씨 없는 호박이란 놀림을 당하는 것만도 못한,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호적등본이었다. 시청 민원실을 나오면서 그녀는 수치스러움과 노여움으로 치를 떨어야 했다. 7. 안녕히 가시라는 창구직원의 말이, 창녀와 일을 끝낸 후 멋적게 내뱉는 퇴방치레 같이 들려 뛰다시피 걸어 나왔던 것이다. 그 후로 호적등본을 떼어본 일은 없었다. 호적등본이란 걸 뗄 일도 없었지만, 필요한 일이 있더라도 주민등록등본으로 대신했던 것이다. 그녀가 실내를 둘러본다. 사람은 없고, 벽시계만 저혼자 약속시간을 따지고 있다. 불알시계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다. 20분. 시침은 분침에 가려 보이지 않으나 네시일 것이다. 네시 이십분. 네시 정각으로 잡은 약속이니 벌써 20분이 더 지난 셈이다. 김석배나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었다면 초조해지고 불안스러웠을 일인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느긋하고 여유롭기까지 하다. 약속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다니. 또 바람이 불고 있나. 창유리가 따르르 했다. 노랗게 핀 은행잎이 무더기로 떨어진다. 인도와 차도와, 그 인도와 차도 위를 인파와 차량들이 안단테로 혹은 알레그로로 안개처럼 흐른다. 흐르다간 뿌옇게 사라진다. 그들의 뒤로 방금 내려앉은 은행잎이 떠돌이처럼 걸망을 꾸려서는 골목을 나선다. 나뭇가지와 태양볕에 묶여서 해보지 못한 일을 지상으로 내려온 지금에야 무슨 일이고 해보겠다는 뜻일까. 어둠은 코 앞이고 겨울은 바로 뒷전인데... "저어...손님. 혹시..." "...?" "주연실 씨 아닙니까." 손님이라곤 그녀 혼자뿐이었다. 그런데도 주인인 듯한 여자는 실내를 휘 둘러보며 조심스러워했다. "무슨 일이죠? 제가 긴데요." "카운터에 전화가 있습니다만." "무슨..." "불편하시다면 안 계신다고 말씀드릴까요." 주연실이 고개를 갸웃했다. 전화가 와 있다니. 누굴까...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석배에겐 비밀로 했었다. 다방 종업원들에게도 그냥 볼일이 있어 잠깐 나갔다 온다고만 했었다. 이곳에서 만나자고 한 전한국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전한국이 그 사람? 아닐 것이다. 길이 어두워 택시를 타는 한이 있어도 전화를 걸 만한 주변은 못되는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별로 좋지 않은 기분이었고 불길한 예감이 앞섰다. 옷깃을 여미며 그녀가 카운터 앞에 섰다. 8. 수화기를 집어드는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방유석이라고. 일전에 회장님의 부탁으로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만." 방유석...? 알 만한 인물이었다. 집을 뛰쳐나온 이후, 그녀는 한때 곤경에 처했던 적이 있었다. 젊은 여자가 몸하나 간직하고 있으면 어디 가서 입에 풀칠이야 못하랴만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자고 뛰쳐나온 집은 아니었다. 아버지라면 이름자도 거론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그에게 기대지 않고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었다. 사업을 하자면 자금이 있어야 했고 자금이 있다해도 그것을 지켜줄 방패막이가 있어야 했다. 아버지 유태중밖에는 없었다. 그에겐 평생을 쓰고도 남을 현금이 있었고 무엇보다 권력을 갖고 있었다.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사실이겠지만 권력이란, 시정의 모리배에서부터 세무사찰이나 위생검열에 이르기까지, 어떤 물리적인 위해요소이거나 적법한 저해요인이라 하더라도 전혀 문제될 게 없는, 더없이 든든한 보호막인 것이다. 자존심이 자괴심으로 허물어지는 한이 있어도 우선 당장은 유태중의 손이 필요했다. 이집이 아니면 어디 발 붙일 곳이 없는 줄 아느냐며 콧대 있는대로 세워갖고 나온 지가 엊그제인데 차마 직접 연락할 수가 없어, 아는 언니를 통해 슬쩍 귀뜸했었다. 당신의 딸이 지금 어디어디에 있고 이러이러한 곤경에 처해 있노라고. 며칠 후 언니되는 사람이 찾아왔고 유태중의 전령을 대동하고 있었는데 그자가 바로 방유석이었다. 회장님을 측근에서 보필하는 비서실장이라고 했었다. 노총각인 듯했고 눈알이 유난히 반들거렸으나 그가 누구던 개의할 입장이 아니었다. 목적은 오로지 사업에 필요한 자금이었고 그 외엔 하등 관심둘 필요도 없었다. 그 후로도 몇 번인가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돈과 관련되는 지극히 업무적인 것이었고, 다른 일이라 해도 유태중의 말을 전달하는 정도에 불과한 것이어서 개인감정이 섞여들 여지는 전혀 없었다. 의례적인 인사치레라도 해야지 싶었지만 저쪽이 먼저 다급한 듯 보였다. "만나서 말씀드려야겠으나 사정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습니다. 별도로 설명드릴 시간이 있겠지만 그때까지는 김석배 그 사람은 만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회장님의 당부도 당부지만 이건 제 개인적인 충고가 더 깊습니다. 그리고 전한국이란 얼간이 종자가 있는데... 그러죠, 거기까진. 아무튼 김석배란 인물은 더 이상 가까이 하지 않으시기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이 세번째 충고라는 말씀도 곁들이시더군요. 그럼..." 전화는 끊겼다. 이쪽의 말은 단 한마디도 들어보지 않고 자기가 할 말만 똑 떨어지게 하곤 끊어버린 것이다. 9. 빌어먹을 자식... 아버지란 자도 그렇지 어쩌자고 날이 갈수록 뻣뻣해지기만하는 저런 놈을 비서실장이랍시고 끼고 돌다니. 뭐야 이건 내정간섭의 차원을 넘어 개인의 프라이버시침해 아닌가. 건방진 놈. 만나기만 해봐라. 어째? 이번이 세번째라고? 이건 숫제 협박이 아닌가. 어림없을 걸. 꼴에 아버지라고 부권을 내세워? 부자관계라면 의절한 지 오래고, 알량한 자금 몇 푼 때문이라면 진작에 다짐을 둔 바대로 정당하고도 합법적인 상속지분에 불과하다. 골치 아프게 매달리던 개망나니 몇 놈 정리해 준 것을 공으로 삼아 행세를 하려드는 것이라면 청소년선도위원장입네 무슨 당의 정책고문입네 하는, 이루 헤아리기도 벅찬 감투부터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이곳에 내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하긴 시궁창에 파리 꼬이듯 몰려있는 저들의 패거리들이고 보면 손에 닿지 않는 곳,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있을까마는. 미행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죄 없이 두려워졌다. 반면에 짜릿한 희열 같은 것도 있었다. 아무려면 저들이 날 어쩔 것이냐는 생각이었고, 무엇보다 유태중이란 인간이 펄펄 뛰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고소하고 즐겁기까지한 그녀였다. 그의 명예에 손상을 입히고 그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일이라면 불구덩이 속이라도 뛰어들 자신이 있었다. 그녀에겐 가슴 깊숙이 박혀진 비수가 하나 있었다. 처음엔 아주 작아서 바늘동강만 하던 것이 날이 지고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커져, 이젠 심장 전체가 비수인 양 날카롭게 날이 서선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 비수는 너무도 섬뜩하고 전율스러운 것이어서 그녀 자신이 생각해도 몸서리치도록 소름끼칠 때가 있었으니. 복수심이었다. 아버지 유태중에 대한 복수. 성(性)을, 끈 없이 포장된 상품으로 여기며, 얼굴 없는 노리개감으로 치부하는 세상의 모든 남성들을 향한 복수였다. 그녀는 지금껏 그 비수를 갈아왔고, 앞으로도 계속하리란 각오였다. 그렇다면 김석배와의 약혼이 이율배반적이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 이율배반적이다 라는 사실 자체마저도 훌륭한 보복이 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녀로선 감정 없는 결혼이란 가장 소망스러운 것이고, 이혼을 전제로한 결혼이야말로 더 없이 편안한 것이었다. 누구는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의 행동이야말로 여성해방운동의 가장 첨예한 자기실천의 표본이 아니냐고. 그러나 그녀는 단호히 부인할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그에 가깝다고는 할 것이나 그 시작한 바 뜻이 다른 것이다. 모든 해방운동이 원한을 바탕에 두고 있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겠으나 보복을 수단으로 삼지는 않는다. 10. 해방이란 말은 차별됨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별화함이 없어지는 것이다. 상대를 멸한 다음에야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대등한 다음에라야 얻어지기 때문이다. 초록이 분홍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면 분홍을 분홍이라고 인정한 다음이라야 가능할 것이고, 초록과 분홍 모두 제 나름의 빛깔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분홍이 초록을 넘본다면 간섭이 될 것이고 초록이 분홍을 닮으려 한다면 예속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게 아니었다. 모든 남성에 대한 보복을 최초의 수단이자 최후의 목적으로 삼고 있으며, 남성을 인정하기보다는 무우 밑둥 자르듯 그 근본부터 잘라지기를 원했고, 남성다움에 비추어 그에 조응하는 여성다움을 찾고자하는, 일테면 대자적인 견지에서가 아니라 나 이외엔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다라는 칼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깃발 없는 깃대의 나부낌. 그 어떤 현란한 수사도, 정당성을 가차하기 위한 너절한 항변도 없이, 오직 복수와 보복이라는 단 하나의 창대를 닥치는대로 휘두를 뿐인 것이다. 그녀의 생각에 공감하고 그 행동에 동조하는 사람도 많았다. 다방이나 술집, 아니면 그와 유사한 직업에 종사하는, 말하자면 남성들로부터 공공연히 또는 은연중에 학대당하고 있거나 예속된 상태에 놓여진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한 그녀들의 태도에 대하여 시종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개인의 문제가 어떠한 경로와 매체를 통하여 사회전체의 문제로 확장 전이되어 가는가. 또한 사회전반에 만연된 부조리와, 도덕에 반하는 제 현상들로부터 각 개인은 어떠한 형태로 반응하고 속화(俗化)되어 가는가. 더 나아가, 이질적이고 상충되는 각기 다른 집단과 계층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의 성장을 포함한 역사발전의 추이를 어떻게 점칠 것이며, 와류(渦流)의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지 아니하고 내습(來習)되어 온 문화에 단절됨 없이, 오물 속의 구더기가 훌륭히 날개를 달아 이쪽과 저쪽의 공간을 하나로 주름잡듯이, 전체사회에 질척거리는 모순과 오니(汚泥)에 타락되지 아니하고 개인의 존엄과 인류의 가치를 어떻게 고양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복잡하고도 난해한 이러한 사회철학적 문제들엔 애초 관심도 없었으며, 또 그러한 것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킬 어떤 의무감도 느끼지 않았다. 철저히 보복하고 무참히 배신하리라는 각오였다. 남자인 한에 있어선 김석배도 마찬가지였다. 돈 많고 권세 있는 사람을 배필로 맞이한다면 우선 유태중이 좋아할 것이다. 아니 될 일이었다. 내일 당장 이혼을 하는 한이 있어도 아버지란 사람의 창자부터 뒤틀리게 해야 했다. 보잘것 없는 출신에 중졸이란 학력도 어지간 했고, 무엇보다 물려받은 재산이 없다는 것이 김석배를 택한 이유였다. 김석배와 결혼 날짜를 받아들자 당장에 취소부터 하라고 날뛰는 유태중이었다. 예상하고 짐작한 대로였다. 아버지란 권위를 앞세웠고, 그것도 여의치 않자 모든 배려를 중단하겠다는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속으로 콧웃음 쳤다. 다급하고도 성난 유태중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시원한 그녀였다. 11. 당신은 나를 대리하고자 하나 어림없다. 그것이 설령 신이라 해도 관용할 수 없는 것이다. 세계의 구조와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간섭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을, 질서와 기다림의 사이를 반복하면서 보이지 않는 호기심으로 미래를 유혹하기만 하는, 부르다 부르다 끝내는 제가 먼저 지쳐 죽고 마는 답답하고도 미련한 그런 방관자가 아니라, 불꽃처럼 튀어오르는 명쾌함과 복서의 코너웍과 같은 신속함으로, 틈과 틈 사이를 건너 세계와 우주를 일목요연하게 하나로 꿰뚫는, 그런 적극적이고도 현시적인 주재자이길 바라는 것이다. 또한, 의인의 피를 발라 강포한 자들의 비문을 세우는 일도 없이, 우직한 민초들의 근로를 착취하여 부귀한 자들의 천국을 완전하게 만드는 일도 없이, 어둡고 습한 혈거에 꿇어앉아 평생을 저주하며 써먹지도 못할 독기를 키우는 일도 없이, 오직 '신(神)'이란 이름으로 이 모든 것이 결말되어 지기를 소원하고 원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허물어진 곳은 쌓아 올려지고, 삐뚤어진 곳은 바로 세워지고, 가려운 곳은 시원해지길, 또 그렇게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집을 지은 자가 그 집을 관리해야 하듯 세상을 창조한 이가 세상을 주관해야 하며, 변호사가 피고인을 변호하듯 만사제물의 이도(理道)를 서리 서리 얽어놓은 신이, 인간을 대리해야 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치가 이러함에도, 신과 인간의 차이가 인간과 돼지의 차이와 같이 그런 것이라면 비약은 단순할 것이다. 사유의 산물로서의 신이라면 인간에게만 존재할 것이고, 따라서 신들의 세계에 있어서 그들의 행동과 언어는 모두 인간의 것으로 환원된다. 신은 인간에게 그 어떤 약속도 한 바 없고, 침묵하고 있는 제신은 정직한 것이다. 사상과 이념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신이라면 허무의 늪에서 어렵사리 건져올린 한 올의 지푸라기만큼도 못되는 것일 것이고, 유약하다거나 권능이 없다고 비난해서도 아니될 것이다. 오히려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이 정직한 것이며 떳떳한 자세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들이 보여준 나에 대한 기대와 발원을 감안하여 솔직하게 피력하노니, 너희들의 그 지극한 정성과 보살핌, 그리고 과분한 호의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스스로 여생을 마감하노라. 12. 뛰어넘을 수 없는 사유의 벼랑에 홀로 서서 과연 나는 너희들의 박수갈채를 계속 받고 있어야만 하는가. 나날이 심해지는 너희들의 죄행과 패륜에 분노하여 언제까지고 '아들을 살해하는 아버지'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인가. 나의 얼굴에 침을 뱉는 자는 그래도 회개의 인연을 맺고자 하는 자이나 대개는 침묵하고 방관하고 돌아 눕는다. 원수로 나를 대하는 자는 나를 닮을 것이나 친구로 나를 대하는 자는 나를 능멸할 것이다. 비극은 웃음에 있고 절망은 지나친 자신감에 있다. 미래는 현실에 따르나 보이지 않고, 현실은 과거를 좇으나 되돌릴 수 없다. 미래는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것 같으나 끌어낼 수 없고 현실은 반석처럼 단단하게 보이나 활동사진처럼 순간에 사라진다. 내가 해야 할 일이란 고작 이 정도뿐이다. 너희들은 간섭을 바라나 간섭할 수 없고, 소원을 말하나 들어줄 수 없다. 물러나야 할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음은 현자의 도리가 아니다. 내가 너희의 곁에 있음은 법리와 도리와 천추(天樞)를 모두 어김이다. 너희들의 소원을 기망함이 그 첫째요, 내 자신을 맹목함이 그 둘째요, 번복할 수 없는 결말을 유예함이 그 마지막이니라. 그리하여 나는 너희의 뜻에 따라 내 자신을 유폐함이니 애석하게 생각지 말라. 어쨌건 당신 유태중이 나의 아버지임을 자처하였고 스스로 그 자신을 유폐한 신의 자리에 대신 올라섰다면 어디 마음껏 간섭하고 재주껏 호령해보라. 어림없을 것이다. 이 주연실이 그렇게 호락호락 복수의 칼을 버리진 않을 것이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생각이 깊어서일까. 머리카락을 수굿이 올려쥔 주연실이 무료하게 밖을 내다본다. 낙엽이 지상으로 날아오른다. 부채살의 노란 은행잎이 그녀의 가슴 속으로 날아든다. 찰랑...! 돌멩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저 밑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돌멩이 하나. 어디까지 울리다 말 것인가. 가슴은 톱날처럼 떨리고 그믐밤처럼 답답하기만 하다. 담배라도 피워 물었으면... 하지만 내가 담배를 피울 줄 안다는 건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더욱 답답하다. 담배 한 개비 피워 무는데도 타인을 의식해야 되다니... 사람들은 나를 서어비스걸이나 호스티스쯤으로 여기겠지. 주인여자 말고는 아무도 없다. 딱 한 모금만이라도 빨아들이고 싶다. 해말간 연기. 봇물처럼 툭 터지는 가슴. 후련한 해탈감. 그 뒤에 오는 여유와 자유로움... 지갑을 뒤지던 그녀가, 그러나 무슨 생각이었던지 손놀림을 그쳤다. 13. 불빛 건너 환하게 드러날 유년의 과거가 한 모금의 담배연기보다 두려웠던 것이다. "앉으세요. 얼굴이 많이 상했군요." 성냥불 대신 전한국을 끌어댕기는 그녀의 목소리가 담담했다. "길이 서툴러서유. 오래 기다리셨쥬." "아뇨. 별로요." 그녀는, 서리 맞은 애호박처럼 어설프게 앉아있는 전한국을 보면서 나는 왜 이 남자를 만나자고 했을까 하고 자문해 보았다.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가늠이 서지 않았다. 김석배에 대한 반란? 세상 남자들에 대한 복수? 아니면 지루한 시간을 탕진하기 위한 맹목적인 유희? 그러나 어느 것도 아니었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맹목적인 만남도 있다니. 그것도 스쳐지나다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만남이 아니라, 약속하고 기약한 만남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왜 이 자리에 있어야 하고 무엇 때문에 앉아 있는지도 모른다니. "한번 꼭 뵐려구 했었는데. 이렇게 쉬운 걸. 히... 거진 슥 달째지유. 저하구 맞선 본 지가." 한국이 호박덩굴을 끌어내리듯 뒤꿍치에 몰래 숨겨둔 내심을 풀어놓는데, 그제서야 아차 그랬지 하며 얼굴색이 변하는 주연실이었다. 맞선이란 말이 아이들에게서 아주머니란 말을 들었을 때와 같은 묘한 기분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다고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우습기도 했고 한편으론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습삼아 던져보는 농구공과 같이 찌꺼기라든가 부담감은 전혀 없었다. "호호호... 그렇게 됐나요. 벌써. 결혼할 아가씨는, 그래 자 말고 달리 만나본 사람은 있었나요?" "웬걸유. 다른 사람을 만나다니. 그럴 리가유." "힘을 쓰셔야죠. 예전하군 틀려서 농촌이라구 그렇게 막무가내로 싫다고는 안 할 거예요. 진실하고 애정만 있다면 환경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거던요." "고맙군유.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다들 말은 그래두 막상 촌에 가보면 이젠 노총각들두 ㅇ어유. 나처럼 죄다 도시루 빠져 나와서... 옛날엔 여필 뭐라구 했다드만 시방 세상이야 어디. 차암..." "그래서 여성상위시대라고 안 하겠어요. 앞으룬 농촌만 그런 게 아니라 도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국민학교 교사로 있는 제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신입생들 자리를 정해주는데만 꼭 두 시간이 걸렸다면서, 그게 다 여자 애들 숫자가 모자라서 그랬대요." "모질라유? 우리 조카 미선이 말룬 학교가 즉어 유치원두 들어가기 심들다구 허던데..." 한국이 아주 의아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14. "그런 얘기가 아니라 남녀학생의 성비가 안 맞는다 이 말이죠. 남학생하구 여학생하구 반반이래야 짝이 맞는데 여학생 수가 모자라니 맨 끝에 가선 남자애들끼리 앉을 수밖에요. 한 반에 두세 명은 꼭 모자라는데 난리라는 거예요. 내짝은 왜 여자가 아니냐. 선생님이 날 밉게 봐서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냐. 요즘 아이들 어른 뺨 치는 세상인데 무슨 말인들 못 하겠어요. 거기다 학부모들은 학부모들대로 학교에 전화를 걸어 왜 내 아들은 짝을 그 모양으로 정해 놨느냐. 남자애들끼리 붙어 있으면 정서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심한 사람들은 직접 출교까지 해서 항의를 한다는 거예요 글쎄. 쥐방울만한 애들도 그런데 그 애들이 커서 정혼할 때가 되면 아마 남자들끼리 쟁탈전이라도 벌여야 할 거 아니겠어요." "거야 뭐 빌거 아니라구 하든데유." "네에...?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들썩한데도 별게 아니라니요. 누가요?" "병원에 있어본게 그렇더라구요. 맹탕 죽어나가는 건 남자들뿐으루 교통사고다 암이다 고혈압이다 함서 열에 일곱은 남자들이더라구유. 헌게 여자들이 즉은 거 겉지만 냉중에 노인들 숫자를 보믄 여자들이 훨씬 많거든유." "호호! 듣고보니 그러네요. 참 상국 씨는 여전히 병원에 있겠군요. 더구나 요즘 교통사고는 해결이 어려워 기러기 한백년이라는데." "그려유. 사람 많고 지저분하고, 즘잖은 사람들이 풀쐐기같이 쏴붙이기나 하고... 질레 있다간 병을 고치기는 커녕 ㅇ는 병 도루 맹글어 같고 안 나옴 다행이겠데유. 상국이 갸두 걱정이 태산이구유. 치료비야 보험회사에서 물어준다니 저야 태무심이겠지만 집에서 출퇴근하는 가족들 교통비하고 가용돈하고 소소하게 드는 것 같에도 솔찮은 모양이든데...상국이 쟌 뭐가 틀어졌는지 나몰라라 하구 있으니. 지 식구 지가 알어서 챙길 일이지만 딱하데유." "설마 나몰라라 하기야 할라구요. 별 뾰족한 수가 없으니 그저 속으로나 끙끙 앓고 있겠죠." "모르겠어유, 통. 갸 속은 하루만 있어봐두 빤했었는데 요샌 뭔 일루 혼 빠진 사람같이 헛소리만 주접거리고... 참, 연실 씬... 여즉 그 다방에 근무하시는감유." "그럼요. 어차피 얼굴 팔아 먹고 사는 물장산데 어디가면 별수 나겠어요. 왜요? 한국 씨도 제가 너무 오래 있다구 생각되시는가보죠?" "아, 아니유. 진득해서 좋지유. 촐랑새처럼 까불랑거려봤자 신역만 고될 거구유." 주연실이 농처럼 쿡 웃자 한국이 얼른 되물렸다. 오늘따라 그답지 않게 말이 길었다. 15. 주연실 역시 처음엔 방유석의 전화에 신경이 쓰여졌지만 한국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잠자리처럼 편안해졌다. 그런데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한국의 눈치가 첫날 만났을 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아마 자신이 김석배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석배 씨한테 무슨 소식 못 들으셨어요?" "가게 옮겼다구 하데유. 만날 때마다 자랑인게. 종업원 두구 사장자리에 올라섰다구." "다른 소식은요? 나이도 있고 한데 결혼이라든가...뭐, 그런거요." "히...갸두 어지간해유. 돈 벌었겠다 기술 있겠다 쌔구 쌘기 색실 거구만두. 눈이 장바구에 붙은 건지...그래두 갼 벌어논 돈이 택택한게 시름 없을 거구먼유." 주연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반쯤 남은 주스를 비워냈다. 밖으로 나오자 거리는 평일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뼘가웃 남은 석양이 단풍처럼 고운 노을을 뿌리고 있었다. 저녁노을을 마주하면 괜히 눈물이 돈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꿈이 뭐냐고 묻자 시인이라고 했던가. 시는 눈물로 써지나 밥은 눈물로 지을 수 없다며 시업을 포기하고 신발공장으로 간다더니... 주연실이 한국을 돌아본다. 아무 생각없는 표정이다. 그저 덤덤하게 걷고만 있다. 이 사람에게 시를 읽히면 돼지도 샹송을 읊을까. 낙엽이 발에 밟힌다. 생각이 많다는 건 살아가는데 걸림이 많다는 얘기겠지. 아니, 어렵게 살아도 생각없이 사는 사람이 오죽 많은가. 옴치고 뛰지도 못하는 사유의 늪에 걸려 허우적거리기보다는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살아가는게 현명한 건지도 모르고. 어디로 갈까요, 하려다간 그녀가 갈 길을 잡았다. 물어보나마나 암 데나요, 할 거니까. "히야...이거 좋기는 좋은데 정신 사납구먼유. 뭔 소린지 하나 알아먹을 수도 없구유." 그들은 극장식 맥주홀에 와 있었다. 저녁을 먹고 버드내 유원지를 돌아 어정거리다보니 시간도 어지간히 늦어 있었다. 강아지를 모는 아이놈처럼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쏘다니다보니 주연실의 심사 나부끼는 깃발인 양 더없이 홀가분했다. 그러했으니 무에 걸릴 것이 있단 말인가. 요란한 밴드와 휘황스레 번쩍거리는 조명이, 전한국의 말마따나 정신 사납게 할지는 몰라도 옆사람 눈치를 볼 일이란 더더욱 없는 것이다. 설사 면식이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해도 저 역시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한에 있어선 누구를 욕할 입장도 못되니까. 전한국이 눈을 멀뚱거리며, 신기한 듯 조금은 겁을 먹은 듯, 스테이지를 밟고 있는 젊은이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16. "한국 씨, 어때 이왕 마시는 거 양주로 하지.응? 어이! 이봐 여기 양주 한병!" 주연실이 흔들이초롱을 들어올리며 웨이터를 불렀다. 어디서 뛰어왔는지 검정색 양복을 두른 꺽다리가 허리를 굽실했다. 주연실이 다시 "양주!"하면서 손을 내저었는데 하얀 담배개비가 불빛처럼 흘렀다. 그런 주연실이 아무래도 제 정신이 아닌 듯했다. 다짜고짜 전한국에게 반말부터 트자고 덤비는 것도 그렇고, 혓바닥이 말굽자석처럼 굽어서는 풍뎅이 소리로 부부 하며, 웨이터를 종 부리듯 다루는 것도 그렇고. 술기운 탓만은 아닌 듯 싶었다. 술이라고 마시긴 했지만 한 잔이었다. 그것도 저녁 먹으면서 반주랍시고 걸친 맥주 한잔이었다. 그 정도에 흐트러질 주연실이 아니었다. 한국이 곁에 있어서 그랬던지 이상스레 마음이 편했다. 아마 석배만 같았어도 그렇게 마음을 풀어놓진 않았을 것이다. "한국 씬 여기가 어딘지 아세요?" "술 마시는...술집 아닌가유." "후훗! 술이야 어디가면 못 마실까. 라이브쇼라구 들어봤어?" "나이...뭔 소린지, 통..." "호호호...! 그럴 거 같아 일부러 이쪽으루 왔지. 기다려봐요. 세상이 어떤 곳인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될테니까." 전한국 앞이라 큰소리는 떵떵치고 있지만 기실 그녀 역시 이곳은 처음이었다. 다방에 들르는 손님들의 말만 믿고 찾아온 곳이었다. 일전에 자주 찾아오는 놈팽이가 했던 말이 있었다. "미스 주, 아주 희한한 곳이 새로 생겼는데 동행할 의사 있소?" "희한한 곳이요?" "암, 눈 뜨고는 못 볼 아주 희한한 곳이지." "아유 김 사장님도. 눈 뜨고 못볼 거면 뭐하루 가요. 그냥 여기 눈 감고 있지." "맹맥이 콧구녕하군. 여자들 눈엔 그렇단 얘기지. 아무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천하없어도 여자 혼자는 못 갈 곳이고 자, 시간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미스 주의 동행이라면 말복에 개 끌려가는 심정으로 따라갈테니. 흐허헛...!" 하면서 성냥갑을 던져줬는데 바로 이곳이었다. 궁금하기도 해서 다른 손님들에게 슬쩍 물어봤더니 다들 얼굴을 붉히며 무대장치가 특이한 생쇼 하는 곳이라고만 했다. 궁금증이 부쩍 더했다. 생쇼라니! 글자대로 풀이하자면 라이브쇼일터인데 어째서 구체적인 언급을 피할까. 일반적인 스트립쇼야 항간에 널려있다. 무대장치가 특이하다면... 17. 여성들이 보기엔 남성들에겐 비밀스러운 곳이 너무나 많다. 터키탕이니, 퇴폐이발소니, 러브호텔이니... 모두가 성에 관계되는 곳이고 음침하고 은밀한 곳이어서 남장을 하기 전엔 들어가 볼 수도 없고, 설사 남장을 한다해도 경험해보기는 어려운 곳들이다. 라이브쇼라는 것만해도 그랬다. 추측하기로는 남녀의 성합(性合)을 실연해 보인다는 말이고 보면 그리 비밀스러울 것도 없을 것인데 숨기자고만 드니 궁금증만 더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라이브쇼란, 물론 직접적으로 '라이브(Live)'란 말을 쓴 것은 아니지만, 고대그리스의 제일(祭日)에 공연된 의식을 그 기원으로 삼고 있다. 속살이 환히 내비치는 미모의 창부가 어린 소녀와 함께 무대 위에서 갖가지 체위를 바꾸어보이며 애무와 터치를 실연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다 끝판에 가서는 근육질의 건장한 남자노예를 불러들여 실제로 성교를 해 보이면 광란한 군중은 덩달아 흥분했고, 이것이 클라이맥스의 의사체험이기도 했다. 인간의 성(性)만큼 성스러운 것도 없을 것이다. 가장 깨끗하고 순결한 것이며 '인체의 어느 부분도 외설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은, 그래서 정당한 것이다. 로마 원형극장의 스트립쇼를 거쳐 현대의 하트발레나 누디티쇼에 이르기까지, 관객의 아낌없는 찬사와 갈채를 받으면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성희와 성극은 숨겨야 할 대상도 아니요, 비속한 것으로 치부되어 비난받을 일은 더욱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몰래 문구멍으로 들여다 보기만을 즐겨할 뿐 직접 무대에 올라서기는 주저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주연실 자신 역시 그랬다. 자신은, 자신의 성욕구를 억압해본 적은 없었다. 단지 분출의 대상이 없을 때, 그것을 복수의 무기로 사용한 것일 뿐이었다. 보복에 있어서 가장 완벽하고도 용이한 무기는 성이었다. 성적으로 희롱당하지 않은 여성이 없듯, 마찬가지로 성적으로 보복당하지 않은 남성은 없을 것이다. 보복당하는 남성쪽에선 그것을 즐긴다고 할 것이나 그녀는 철저히 복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굶주린 이리가 나무에 매달린 과실에 갖는 미련과, 그 미련을 삭이지 못한 채 되돌아서야 하는 절망감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고, 또 적절히 이용했던 것이다. 18. 세상의 모든 남성들이 다 그러할 것인데 특이한 별종이 둘 있었다. 김석배와 지금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전한국이었다. 김석배는 약혼자라고는 해도 어쩐지 자신을 피하는 눈치였다. 그것도 잠자리만 같이 하자고 들면 튀었다. 외팔이 풋밤 발리는 식으로 어찌어찌 한 번인가 잠자리를 같이 하긴 했었는데 뒤우뚱거리고 설설매는 꼴이, 망아지 빙판 건너는 꼴이었다. 앞발을 잡으면 뒷다리가 후둘거리고, 그렇다고 허리를 잡을 양이면 입에 게거품을 물었으니. 필시 이 작자 전한국 역시 그러할 터. "허...요상허네유." "뭐가?" 전한국이 양주잔을 물 마시듯 들이켰다. 먹으라고 놓아둔 안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보기좋으라고 띄어논 버찌만 우물거리고 있었다. 입술을 쩝쩝거리며 우거지상으로 앉아있는 전한국이 우습기도 했고 미련스럽기도 했다. 싱거워서 그러려니 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고 보니 무대 쪽이 요란했다. "잠잘 것두 아닌데 워쩔려구 저런 기여." "누가 알아. 한국 씨 잠자리 불편하다구 저기 재워줄지." 막이 올려지고 쇼가 시작되었다. 무대에는 밴드가 없었다. 대신 핑크빛으로 된 갑사가 무대 전면에 깔려 있었고, 원형의 검정색 침대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저마다 목구멍에 침을 삼키며 아주 야릇한 호기심으로 무대 쪽을 주시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밴드음이 작열하더니 갑자기 모든 조명이 꺼진다. 가슴 졸이며 기다리던 관객들이 여기저기서 휘파람을 불어제끼며 야유를 보낸다. 신사가 따로 없고 숙녀가 정해져 있지 않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들은 오직 하나, 대동단일의 유락집단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더 큰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한 트릭에 지나지 않음을... 빵빠레 빵...! 귀청을 쨀 듯한 밴드음이 홀 전체를 휩쓸고, 대낮 같은 불기둥이 무대에 쏟아진다. 오색영롱한 빛방울. 우유빛 안개. 눈이 부시도록 강렬한 섬광...환상이었으며 신비였고, 너무나 거대한 환희의 감동이 숨막힐 듯 펼쳐지고 있었다. 와아...! 야아...! 19. 목어처럼 입을 딱 벌린 한국이 그저 실신한 듯 앉아 있었다. 주연실이 허옇게 드러난 허벅지 사이로 손을 넣으며 스타킹을 끌어올렸다. 세상에 저럴 수가...! 오색의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원무를 그리고 있는 20여 명의 모든 무용수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의 상태였다. 비단잉어가 헤엄을 치듯 모시나비가 날아내리듯 아주 가볍고 우아한 몸놀림으로 육체의 구석구석 모든 신비가 여지없이 드러내보였다. 애마의 깃털처럼 나부끼는 삼단의 머리. 미끈한 다리와 풍만한 젖가슴, 능수버들인 양 하들거리는 허리. 교교히 흐르는 허벅지와 둔부의 짜릿한 곡선. 살포시 돌아들다 끝내는 하들하들 떨리고 마는, 오...! 복사꽃 무더기! 말조차 끊어진 자리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물에서 갓 건져올린 고등어 같은 떨림! 이슬비에 촉촉한 한 떨기 포도송이의 싱그러움! 새벽을 쪼개어 비취옥으로 채워도 얻지 못할 경이! 누가 저러한 장관을 망칙스럽다 할 것인가. 라이브쇼는 계속되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흥미진진했다. 숨소리 하나에도 끓는 피가 배여 있었다. 홀은 어느새 환희와 희열과 열락의 도가니로 변해 있었고, 관객들은 쇳물처럼 뜨겁게 녹아들고 있었다. 휘파람을 불거나 야유하기는 커녕 숨소리조차 크게 내는 이도 없었다. 원색의 강열하던 조명이 흐릿해졌다. 둘씩, 또는 혼자서 관능적인 율동으로 무대 위를 누비던 전라의 무희들이 썰물처럼 빠졌다. 무대의 전 조명이 꺼지고 스포트라이트만이 아주 느린 걸음으로 타원을 그린다. 졸린 듯 잔잔한 음악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검은 융으로 된 너울을 뒤집어쓴 한쌍의 남녀가 나비의 날개짓으로 날아오른다. 그들이 무대를 한 바퀴 휘이 돌아서는 막 원형침대 위로 올라서려 할 때, 난데없이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대 쪽에다 시선을 붙박고 있던 주연실이 기겁을 했다. 흐릿한 불빛 아래 통나무처럼 넘어져 있는 한국이 밟혔다. 이상하다 싶어 자세히 쳐다보았더니 그냥 있어야 할 양주 한병이 빈 병으로 굴러다니고 있지 않은가. 그녀가 한국의 곁으로 갔다. 그러나 눈길은 자꾸만 무대 쪽으로 향하는 걸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20. "한국 씨! 전.한.국 씨...!" 몸을 흔들어보고 팔을 잡아끌어도 보았으나 워낙 거구였던지라 꿈쩍도 안 했다. 주연실이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녀가 한국을 겨드랑이에 꼈다. 술냄새가 코를 찔렀다. 팔을 한국의 겨드랑이 끼고는 허리에다 힘을 넣으려던 주연실이 멈칫했다. 자신의 자세가 사내의 우듬지에 꾸리를 박고는 춤을 추던 어릴 적 어머니의 그짓과 너무나 흡사했다. 얼굴이 인두로 지진 듯 화끈거렸다. 더구나 잉걸불에 쪼인 고무공처럼 부풀어오른 젖무덤이 한국의 볼에 닿자 그녀는 차라리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렸다. 더운 입김이 신음처럼 새어나왔다. 간신히 시트에다 한국을 기댄 연실이 아아, 하며 입을 딱 벌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무대 쪽에서 애코로 전이되어 왔다. 뼈마디가 녹아내리고 살점이 보풀리듯한, 눈물이 나도록 황홀한 신음소리였다. 성합의 절정에 이른 무대 위의 남녀가 그 희열을 도저히 참지 못하여 내는 교성이었다. 주연실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술잔을 들이켰다. 뜨거운 술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리며 면도 칼처럼 짜르르 했다. 명치에서 불이 확 붙었다. 속이 뒤집혔다.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지는 듯했다. 이렇게 쉽게 취하진 않았는데... 그녀가 젖꼭지를 쥐어뜯으며 냉수를 들이겼다. 아무래도 이상한 노릇이었다. 술을 먹지 않고도 취하다니... 무대는 끝났지만 손님들은 여전히 흥청거렸다. 2부 쇼를 예약한 사람들이거나 옆자리의 호스티스와 남은 시간을 계약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일어나야 했다. 흔들이초롱을 흔들어보이자 웨이터가 뛰어왔다. "술은 됐어요. 이 손님을 어떻게..." 주연실이 술값을 치르며 웃돈을 지불하자 꺽다리 웨이터는 야릇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이런 일엔 이골이 났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주량이 약하시군요. 큰길까지는 어떻게 해보겠습니다만, 그 이상은 곤란합니다. 택시를 부르시던가 싸모님께서 알아서 하셔야겠습니다." 꺽다리가 카운터 쪽으로 가더니 다른 동료를 데리고 왔다. 둘이 수근거리더니 한국을 짐짝처럼 끌었다.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한국의 곁에 주연실이 쪼그리고 앉았다. 21. 행인 중의 어떤 이는 검시관처럼 빤히 들여다 보고는 혀를 끌끌 차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고개를 돌리고는 외면하기도 했다. 잎도 다 털린 은행나무가 을씨년스레 떨고 서 있었다. 가로등불빛이 창백하게 일그러졌다. "한국 씨! 한국 씨이...!" 연실이 한국의 어깨죽지를 흔들며 깨워봤지만 한국은 죽은 시체처럼 꿈쩍도 안 했다. 난감했다. 어떻게 해야 될지 앞뒤가 서지 않았다. 그때 마침 택시가 왔다. 얼음판에 썰매처럼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택시가 섰다. 그러나 잠깐 주춤했을 뿐, 택시는 곧바로 내달렸다. 그 뒤로, 서너 대의 빈 택시가 그녀의 앞에 주춤거렸건만 번번이 그냥 지나쳤다. 길바닥에 드러누운 한국을 가리키기만 하면 택시운전수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줄행랑을 쳤다. 한참을 그렇게 빈 택시를 잡겠다고 펄쩍거리던 그녀가 무슨 생각이었던지 공중전화부스로 갔다. 신호음이 가자마자 사내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튀었다. "의림소방대 소방교 김무학입니다." "저어..." "당황하지 말구 침착하십시오! 침착해야 합니다. 어딥니까? 주택갑니까 시장입니까!" "저어...그런 게 아니라 다른..." "여보세요! 글쎄 장소만 말씀하시라니까요. 지금 계신 곳이 어딥니까. 말씀을 하셔야 출동을 할 게 아닙니까!" 그녀가 고심 끝에 전화를 한 곳은 소방소였는데 젊은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그는 당장 어디 불이라도 난 줄 알았던지, 그리고 그녀가 경황이 없어 당황하고 있는 줄 알았던지 아주 다급하게 다그쳐 묻는 게 아닌가. 그럴수록 망설여지는 주연실이었다. 그렇다고 말도 해보지 않고 끊을 수는 없었다. "화재는 아니구요. 다른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럽니다만..." "뭐요! 다른 급한 일이오?" "위급한 환자가...도와주셨으면 해서요." 그제서야 젊은 소방관은 안심이 된다는 듯, 한 옥타브 낮아진 목소리로 늘어졌다. 상태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바로 출동할테니 너무 걱정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구급차는 거짓말처럼 빨리 왔다. 차에서 뛰어내린 노란 불꽃 두 개짜리가 긴장된 목소리로 외쳤다. 22. "어딥니까! 누굽니까? 아아, 이제 보니 저기 계신 분이군요." 그녀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이자 젊은 소방관이 한국 쪽으로 뛰었다. 인도 한가운데 내동댕이쳐진 한국을 다급하게 흔들어보던 소방관이 주연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뭐요, 이게! 술취한 주정뱅이 아냐! 니기미...! 그래 이걸 치워달라고 소방댈 부른거요? 내 원...!" 그냥 차에 오르려는 소방관을 주연실이 붙들었다. 그들을 보낸다면 꼼짝없이 거리에서 한밤을 떨어야 할 판이었다. "술에 취하긴 했지만 주정뱅이는 아닙니다. 평소엔 술을 전혀 못하는 사람인데 과음했던가 봅니다. 제 혼자 힘으론 도저히 어쩔수가 없어서요. 죄송한 줄 압니다만 도와주시지 않으면 얼어죽을 겁니다." 얼어죽는다는 말에 그 자가 난감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핸드백을 뒤지더니 지폐 몇 장을 슬그머니 그의 호주머니에 찔러넣었다. "힘드시겠지만 근처 아무 데 여관에라도 바래다주시면...정말 죄송합니다. 택시를 잡아도 그냥 가더군요. 집이 시골이라 아는 사람도 없고, 이래선 안 되지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119로 전화했습니다." 소방관이 흠칫했다. 그녀가 그에게 지폐를 건네주는 것을 감시라도 하듯 구급차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소방관이 걸어왔던 것이다. "무슨 일인가, 위급환자라면서. 한담하고 있을 시간이 어딨나. 자자 어서 서둘러! 거들어줄테니." "그게 아니라. 저어...의식불명이긴 합니다만 취한입니다. 분대장님!" "뭐야! 취한? 자네 지금 취한이라고 했나?" "네에. 취한이긴 합니다만 그냥 두었다간 갈 데 없이 얼어죽을 친굽니다. 어쩔까요?" "이 사람 이거 말이 왜이래 갈팡질팡 종이 없어! 이 여자분은?" "아저씨가 책임자이신가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시골 계시는 제 오라빈데 과음을 하셨나봐요. 숙소까지만이라두 바래다주시면 그 은혜 정말 잊지 않겠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가로등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말버릇이 그랬던지 분대장이라는 자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애교있는 말씨에도 불구하고 내내 불퉁그러져 있었다. "그래 숙소라는 곳이 어디요?" "저기 빤하게 보이는 여관이랍니다. 얼른 데려다주고 들어가죠. 분대장님." 먼저 온 소방관이 바지춤을 추켜올리며 한국의 곁으로 다시 걸었다. 분대장이라는 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뒤를 따랐다. 23. 젊은 소방관이 한국의 어깨를 걸쳤고 분대장이라는 자가 축 쳐진 한국의 다리를 고논에 볏단 걷어올리듯 움켜 들었다. "조심조심 몰어. 죽은 송장보다 산 송장이 더 드러운 법이야. 바짝 치들라니까!" "사안 송장보다 죽은 송장이, 우떻다구요? 니기미... 우라지게 무겁긴." 풋내기 소방관이 땅바닥에 끌리듯 떨어진 한국의 머리를, 통마늘 엮어묶듯 막 들어올리려고 끄응 하고 힘을 주려는 찰나였다. 웬걸, 거꾸로 쳐박혀선 시체처럼 미동도 않던 한국이 우웩! 하며 토악질을 시작하는 게 아닌가. 젊은 소방관이 질겁을 하며 손을 뗐지만 한국이 토해 놓은 오물은 이미 그자의 바짓가랑이에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푸하핫, 푸후후...! 이제야 알겠나. 산 송장이 왜 드러운지. 키힛!" "니기미. 옘병할..." 곁에 있던 주연실이 어찌할 줄 몰라했다. 손수건으로 소방관의 바지를 닦아주려 했지만 그 자는 겅중겅중 뛰면서 욕지거리만 내뱉고 있었다. 제가 토해놓은 오물에 대가리를 처박고 있는 한국의 꼴이 말이 아닌 건 당연했다. 시큼한 시궁내와 끈적끈적한 오물을 털어내고 있는 소방관에게, 다행히 분대장이라는 자가 다그쳤다. "이 사람아! 질래 그렇게 밤대거리 할 건가. 어서 들어! 자네 뱃속 갈라놓으면 그만 못할 줄 아나. 숯검댕이라도 살려내야 할 사람이 산 송장 하나 다루지 못해 빌빌거려? 어서 들자니까. 상황 떨어졌을지도 모르고." 그들의 뒤를 고개 숙인 채 수인처럼 따르는 주연실.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하고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자고 저런 무녀리를 만나 이런 고생을 생으로 자청한단 말인가. 하지만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깊어질수록 한국에 대해선 왠지 모를 안쓰러움이 앞서는 주연실이었으니. 김석배의 얘기를 듣고 전상국의 병문안을 가자고 했을 때, 그때만 해도 한국에 대한 감정은 별로 없었다. 아니 별로가 아니라 기억 자체가 까마득했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병실문을 들어서자 그게 아니었다. 아차, 나의 과거 속 어딘가에 저런 사람도 있었지. 수수울처럼 바람구멍이 많아 빈 것 투성이인 채로 엉성하고 허술하기 그만이어서 꼬장꼬장 따지거나 시비를 틀 줄 모르는 사람. 에멜무지로 덤성거려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듯이, 돌아보는 사람없이 고독을 무거운 짐처럼 짊어지고 있으나 그 고독이 뭔지도 모르고 서 있는 사람. 전한국. 바로 그가 아니던가. 24. 그만큼 비집고 들어갈 틈이 많고, 혼자 버려두자고 하면 내가 먼저 짐이 될 사람. 세상의 모든 남자를 저주하여, 늘 독과 한을 복어알처럼 뱃속에 담고 다니던 자신이었는데 어쩐지 한국에게는 그런 적의를 가질 수 없었다. 독을 품었다가도 바람이 불면 연기처럼 흩어졌고, 한을 물었다가도 한국의 축 쳐진 어깨를 볼 양이면 자신의 짐처럼 풀어지고 말았다. 한국이 좋아할 것 같아서 만나자 했고, 정말로 좋아하는 한국을 보자 자신도 그저 좋았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랬는데 일이 이렇게 꼬이고 말다니. 돌아가는 소방관에게 사례비로 얼마간을 계산하려 했지만 젊은 소방관이 먼저 나서서는 이런 일은 임무중에 하나라며 극구 만류했다. 소방관들도 돌아가고, 전한국과 주연실마저 여관으로 들어가고 나자 사위는 더욱 조용해진 채로 밤별만이 하얗게 떨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창 밖이 한꺼번에 수런스러워졌다. 칼칼하게 찢어지는 싸움투의 말소리. 질주하는 경적음. 가물가물 울어제끼는 뻐꾸기소리. 한국이 눈을 번쩍 떳다. 뻐꾸기가 울다니... 그러나 눈을 뜨는가 싶었을 때, 그의 온 몸이 파리하게 떨렸다. 한국이 벌떡 일어났다. 진저리를 치듯 더북 머리를 내두르며 어깨를 조였다. 으헉...! 여기가...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어지럽고 낯선 소음. 소음보다 더 어지러운 빛줄기. 귀곡처럼 울어제끼는 늦가을의 뻐꾸기. 어지럽고 낯설고 황황하기까지한 이곳이 대체 어디란 말인가. 고개를 푹 떨구던 한국이 어디서 본 듯한 느낌에 고개를 다시 들었다. 그리곤 주위를 찬찬히 뜯어본다. 그래 분명 이곳이 꿈이 아니라면 꿈이 아닌 곳에서 본 기억이 선연했다. 전신을 비추어도 천장이 보이는 벽거울. 회백색으로 쪽쪽 뻗은 갈포벽지. 밤색으로 반질거리는 경대. 먹빛 자르르 흐르는 장농과 구석장. 코처럼 풀어헤쳐진 돌돌말이 휴지. 이곳이... 이곳이 어디드라. 이곳이... 한국이 눈꺼풀을 꿈뻑거리며 벽지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려... 맞어. 요상헌 집구석. 그제서야 제정신이 든다는 듯 돌돌 말은 이불을 화작작 걷어붙였다. 치를 떨며 망연자실했다. 어딘가 모르게 서늘하다 싶었는데 알몸뚱이가 아닌가. 25. 그렇거나 말거나 벌떡 일어섰다. 정신나간 사람처럼 구석구석을 뒤지던 한국이 고목처럼 쓰러졌다. 다시 벌떡 일어나선 장농을 뒤졌다. 으흐흐, 하는 울음소리를 짐승처럼 부르짖으며 휘청거렸다. 실신한 사람처럼 얼마간을 그렇게 방구석과 장농 사이를 돌아치던 한국이,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자신의 거시기를 현미경 보듯 쏘아보는게 아닌가. 그러나 수수목엔 이상이 없었다. 아니 이상이 있었다 해도 알아볼 요령이나 방도가 없지 않은가. 벌겋게 충혈된 눈 앞으로 전화기가 잡혀왔다. 수화기를 집어드는 손이 덜덜 떨렸다. 벽거울 속에선 벌거숭이 사내가 오염된 물이끼처럼 흐물거리고 있었다. 끼르륵, 하는 비웃음소리가 한참이나 들리고 나서야 목소리가 들렸다. "네에..." 늙은 여자였다. 졸음기와 짜증기가 뒤섞여, 도로의 소음만큼이나 어색하고 낯설었다. 수화기를 당장 내려놓고 싶기도 했으나 창피한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저어...지 옷이 몽지리..." "손님, 지금 어디루 전화하셨수. 여근 내실인디..." "...옷이, 월급통장이 든 옷이 암만 찾어두..." "답답한 냥반! 글쎄 여근 빨랫집이 아니라 내실이라 안 허우. 내실." 주인 여자가 무단히 신경질을 부렸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이건 밟힌 정도가 아니라 껍줄이 홀라당 벗겨진 신세이거늘, 아무리 머저리 같은 전한국이라해도 알었어유, 하고 순순히 물러날 사단이 아니었다. "무신...옷이 ㅇ어졌다는데두유 저금통장 든 옷이. 암만 찾어두 ㅇ다니까유." "고만합시다. 꼭두새복부터. 아가씬지 아줌씬지 빨랫집 간다구 합디다. 이제 됐수. 재수가 없을라니깐, 밸..." 전화선이 딸깍 하고 끊겼다. 한국이 노려보던 수화기를 내팽개쳤다. "오살할...! 이년이 사람 만만히 보구선. 히! 접때야 그냥 당혔지만 요참엔 고솔 혀뿐질껄." 수리매에 놀란 꿩처럼 덤부사리에 숨어선 보이지도 않는 수수목을 저주스럽게 쳐다보며 한국이 씩씩거렸다. 이참에 아주 끝판을 보고야 말겠다는 듯, 다시 수화기를 움켜쥐었다. 끼룩 끼루룩... 히, 이년이 시방 사람 물 멕이겠다 이거지. 끼르륵 낄... 지년이 날 비웃어? 오살할...한 번 당허지 두 번 당헐 줄 알고. "아줌마, 아줌마두 증말 너무하네유. 그기 우떤 돈인 줄 알어유. 돼지우리간에서 두 달씩이나.." 26. "이 손님이 듣자듣자하니까 밸 못 할 소리가 없네. 이봐요! 돈은 뭔 돈이고, 통장 통장하는데 그래서 날 두고 어쩌란 말이우. 오오라! 그러고보니 그년이 날 속였구먼. 어쩐지 술집 지집년 겉드라. 좌우당간 난 딱 잡아 모르는 일이니 손님이 알어서 하슈. 내 그년 돌아가는 응뎅이짝이 어쩐지 기름 바른 가래떡맨치 휘이휘이 수월하게 돌아가드라니. 우쨌거나 딴 맘 먹을 생각일랑 아예 마슈. 손님 겉은 냥반 쉬었다 가라고 요대기 깔아준 기 짜투리 빼구두 십 년이우. 그년 응뎅짝 보자하니 밤새껏 올려 쌓고 내려 쌓고, 만리장성 만리장성합디다만 만리장성이 아니라 태평양을 건너고도 남을 대사를 치루었겠습디다. 애시 이년은 모르는 일이니, 잡아서 가두든지 천길 물 속에 끌어박든지 손님이 알어서 하슈. 내원 새복부터 밸..." 수화기를 움켜쥔 한국의 손이 수수목처럼 스르르 풀렸다. 악다짐으로 몰아세우는 주인 여자의 목소리도 목소리였지만 허옇게 말라붙은 머리숱이 그제사 눈에 띄었던 것이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러고보니 가물가물 피어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그려 그랬었지. 그럼 연실 씨허고...설마. 그다지도 고매헌 연실 씨가...생시가 아닌겨. 내가 꿈을 꾸고 있제. 그려 꿈일거구먼. 히, 밸 요상헌 집구석... 한국이 들고 있던 수화기를 맥없이 내려놓았다. 그리곤 경대 위에 세워진 자신의 모습을 멀겋게 쳐다보 았다. 그러자 간밤의 일들이 뱃전에 집어등처럼 일렁거렸다. 어둑신한 실내. 무슨 커피전문점이라 했던가. 휘늘어진 버들, 그리고 천 년은 묵었음직한 노송의 무리. 물길도 없는 수면에 파랑이 일고, 조매로이 떠다니는 버들잎. 야등이 켜지기 시작하던 번화가. 맥주 딱 한잔만 하자고 해서, 갈비찜이었지 아마 저녁으로 먹은 게. 그리곤...기억이 다시 물결처럼 흔들렸다. 흔들리는 물결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길바닥보다 더 시끄러운 소음. 번쩍거리는 불빛, 그리고 느린 듯 걸어가던 스포트라이트... 한국이 거울을 들여다본다. 수치심 때문이었는지 침대의 이불을 끌어당겼다. 물이 끓어넘치듯 심장이 헐떡거렸다. 솜털 하나까지 환하게 보이던 나녀의 무리. 불꽃처럼 타오른던 기억이 거기서 딱 끊겼다.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더럽고 창피하고, 그래서 애꿎은 술잔만 죽이다 정신을 잃고보니 이렇게 낯설고 어색한 아침이 아닌가. 27. 세상에...말세여 말세. 밸눔의 시상 콱 망하구 말거구먼. 깝데기 홀랑 벗고 춤을 추다니. 그것두 무슨 구경거리라고 손뼉을 짝짝거리는 놈이나. 히, 밸...연실 씨도 그렇지. 그 숱한 델 놔두고 해필이면 그런 망칙한 곳엘...한국이 머리를 내두르며 속으로 한탄했다.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자신에 대한 반감이, 슬며시 주연실에로 넘어가선 그래도 무슨 실수는 하지 않았나 하는 걱정으로 앞섰다. 어쨌거나 당장에 입고 나갈 옷이 문제였다. 두 달치 월급이라고 묻어둔 저금통장을 생각하니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속눈썹이 유난히 길고 분냄새 진하게 풍기던 낯선 계집에게 홀려 생돈 30만 원을 털린 것이 엊그제 같은데 또 이런 봉변을 당하다니. 주연실을 만난다면 전말이 소상히 밝혀질 일이겠으나 이런 차림으론 단 한 발자욱도 나서지 못할 일이었다. 가슴을 치며 앉아 있는데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자, 이거나 걸치슈. 돈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신고할라믄 계집부터 잡아야 할 거유. 승질난다구 괜히 찔러 놨다간 손님은 손님대로 챙피만 당하고 우린 우리대루 성가시우. 꽃뱀 꽃뱀하드니 이녁이사 오늘이 첨이우. 세탁소 간다구 하길래 증말 그려려니 했지 설만들 손님 발목 묶을라고 수 쓰는 줄 짐작이나 했어야 말이지. 그년 어째 손님 끌구 들어올 때부터 요사하다 생각은 했지만, 밸 히한한 년두..." 방금 전화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말소리가 뚜억거리긴 마찬가지였으되 인자한 누님같이 부드러웠다. 이불을 뒤집어쓴 한국이 그저 눈만 멀뚱거리고 있었다. 말끝마다 그년, 그년 하는데 도대체 그년이 누구냐고. 그러나 극도의 수치심으로 고개만 떨구고 있는 한국이었다. 주인여자가 혀를 차며 문을 닫았다. 한국이 그녀가 던져놓고 간 옷가지를 부리나케 입었다. 도둑놈 뒷간 찾듯 문을 나서고 보니 한 뼘 정도 솟아있는 태양이 먼저 떨어졌다. 태양을 끌고가는 한국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래도 아직은 이른 아침이었던지 도로엔 희끗희끗한 무서리가 곱게 피어 있었다. 마주하는 사람마다 그를 몇 번씩인가 쳐다봤다. 신새벽에 부지런을 떠는 거렁뱅이도 다 있나. 벌거벗은 가로수 밑을 허둥거리는 반바지. 기장이 짧으면 단추구멍도 솔던지 배꼽이 허옇게 드러나 보이고. 머리는 말총같이 뻣뻣한데 쇠비듬이 끼었다. 똑바로 걷는 길이 불뚝불뚝 솟구쳤다. 허청거리는 다리가 왜가리처럼 삐쳤다. 28. 집이라고 찾아들긴 했으나 인기척하나 없다. 세무서에 다닌다는 청년 방 앞엔 끌신 한 짝만이 덜렁 놓여있다. 출근을 한 다음이거나, 한국이 저와 같이 외박을 해서 방을 비운 탓이리라. 상국의 처라도 있겠지 하여 일부러 헛기침 토하며 어슬렁거렸지만 상국이 세들어 사는 방 역시 괴괴하기만 했다. 단벌로 끌고 다니던 굽 높은 구두가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그녀 역시 없는 게 분명했다. 빈 집이거니. 한국이 별 생각없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불이 훤했다. 전기스위치를 끄려던 그가 멈추섰다. 썰렁한 냉기를 끌어안고 새우잠을 자고 있는 어린애가 있지 않은가. 조카 미선이었다. 울다 지쳐 잠이 든 듯, 눈물 자국이 두 볼에 선명했다. 먹다 남은 생라면이 손에 쥐어져 있고 마른 스프가 방바닥 군데군데 흩어져 있었다. 누군가를 계속 기다렸던지 머리를 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건드리기만 해도 일어날 자세로 다리를 꼬고 있었다. 한국이 싸아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불보퉁이를 끌어내렸다. 퀴퀴한 곰팡내가 벼룩처럼 뛰었다. 이불을 덮어주는 한국의 손이 수전증환자처럼 떨렸다. 이른 아침에, 제 집에서도 버려진 아이가 있다니. 흐으...망할 놈의 세상... 미선이 눈을 찌뿌듯이 뜬 지도 모르고 이불자락으로 서러운 감정을 싸고 또 싸매는 한국이었다. "삼춘..." "...!" "배 고파...히잉..." "엄만, 니 엄만 어딜 갔길래... 니 혼자 밤을 새운기여 그래." "몰러 병원 간다구 그냥... 아직 안 왔어?" 한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또 한번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었다. 미안허다. 이 삼춘이, 이 못난 삼춘 잘못인겨. 내가 병원에 있어야 하는 걸. 나 때문에 니가... 한국이 아예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옷을 갈아 입을 겨를도 없이 한국이 부엌으로 나섰다. 장마 끝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부엌바닥은 질척질척했다. 불을 피울려 했으나 연탄 한장 보이지 않았다. 밥쌀이라도 일굴까 하다간 손을 털었다. 무엇보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횃대에 걸려 있는 상국의 옷으로 갈아 입은 한국이 미선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29. "삼춘이 얼릉 병원에 가설랑 니 엄마 불러 올테니 쪼매만 기다려라. 잉. 배가 고프드래두 꾹 참고. 니 엄마 얼릉 불러 올테니. 알었쟈?" 퍼렇게 언 입술을 달싹거리며 미선이 고개짓을 끄떡였다. 어른스럽게 눈웃음까지 쳤는데 눈에는 아직까지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한국이 뛰었다. 시계탑이 있었다던 사거리와, 집채만한 도장이 세워진 볼링장을 거쳐, 신호등의 불빛이 파랑이거나 빨강이거나 뛰고 또 뛰었다. 병원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수선한 분위기가 난장판이었다. 메스를 들이대듯, 섬뜩한 한기가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야이 개눔의 새끼덜! 뭐야? 뭐가 어쩌고 어째...! 주둥이로 나오는 대로 나불거린다고 다 말인 줄 알어? 엉!" "글쎄 선생님. 저희들도 오죽하면 그럴려구요. 집에 가서 기다리시면 차후에 곧바로 연락드린다고..." 팔을 걷어붙인 사내가 드잡이질로 악에 악을 쓰고 있었다. 의사로 보이는 하얀 가운의 중년사내가 캑캑거리며 비는 시늉을 하고 있었지만 사내는 아랑곳없이 분기탱천한 채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는 게 아닌가. 원무과에 있던 간호원들이 우르르 뛰어나왔고 구경꾼들이 울타리를 쳤다. 하지만 사내의 분위기가 워낙 험악했으므로 아무도 말리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곁에 있는 간호원들만이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좋다 좋아 이 새끼야! 이왕 죽은 목숨 너 죽고 나 죽고 어디 한번 해보자 임마. 뭘 봐 이년들아! 성한 목숨 맨날 칼질로 도려내는 놈들이 사람 죽는 거 첨 봐! 죽어라 이 새끼야, 어서 죽이란 말이다! 흐흐...!" "선생님 진정하세요 진정... 제가 어떡해든 손을 써보겠습니다. 케엑...! 제발 이 팔만, 켁! 이 팔을 놓으셔야지 원장님하고 상의를 드릴 게 아닙니까. 아버님 모시고 잠시만, 잠시 잠깐만 기다려보십시오. 제발 진정하시고. 이런다고 해결되겠습니까." "씨부럴 눔. 좋아 니눔들이 기다리라면 기다리마. 하지만 내 이 노인네 죽기만 죽으면 병원이고 지랄이고 화장터로 만들팅께로...쌍눔의 새끼덜. 페에...!" 기다려보라는 의사의 말에 그제사 수굿해지는 사내였다. 사내가 손을 풀었다. 하얗게 질려서 발버둥거리던 의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곁에 있던 간호원들 역시 돌개바람에 불티처럼 흩어졌다. 30. 그래도 구경꾼들은 풀어지지 않았다. 사내가 접수대 턱 밑에 앉아서 헉헉거리는 노인을 물기 어린 눈으로 훑어보았다. 그리곤 비분강개한 어조로 외쳤다. "수운 날강도들, 수운 개새끼들입니다 글쎄. 이 분이 제 아부진데요. 벌써 세번쨉니다. 올 때마다 다음 다음 하더니, 오늘 기껏 한다는 소리가 뭐라는지 아십니까. 입원을 하긴 하셔야겠는데 병실이 없으니 여섯 달 후에 오라는 겁니다 글쎄. 이런 쥑일 놈들이... 여섯 달요? 여기까지 오는데도 몇 번씩 숨이 떨어진 노인넨데 여섯 달 후에면, 땅 속에 들어간 송장을 파오란 말 아닙니까! 병원이란 데 어디라 할 것 없이 돈빼끼 모르는, 수운 날강도들입니다. 가란다고 갈줄 알아요! 못갑니다. 죽은 노인네 이 바닥에서 까실구는 한이 있어도 절대 못나갑니다. 페에...!" 어느새 맨 앞줄로 나와 있던 한국이 제 일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그러한 표정으로 누군가 물었다. "암만. 그래 뭐하시던 분이오? " "촌에 사는 노인들, 왠 만큼 아파선 그저 괜찮다 괜찮다 하거든요. 더군다나 농삿일이란 게 몸으로 부대껴야 하는 일이고 보니 어디 성한 데가 있을까마는, 왠지 지난해 겨울부턴 착 짜부러드는 게 시남시남하드라구요.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도 아무 이상없다구, 그냥 담인가보다고. 그러려니 했죠. 곰곰히 생각해본 게 미련한 노인이 병원비 몇 푼이 겁이 났던 걸 모르고...당신 한 목숨 탁 꺼우러짐 자식새끼 손주새끼가 뭔 소용이 있다고. 흐으...! 미련한 노인네 미련 떨고 있더니 저 지경입니다. 다 이놈 잘못이죠. 어린새낀 고뿔 한축만 갱켜도 사흘이 멀다 하고 열불나게 찾아들던 놈이, 명줄이 간당간당해서야 찾아왔으니." 소매를 걷어붙인 사내가 노인 곁으로 가려할 때 조금 전의 의사가 뛰어왔다. "어렵긴했습니다만 해결됐습니다. 원장 선생님께 빌다시피 사정했습니다. 병상을 하나 더 놓더라도 이 분만은 입원시켜야 한다고. 하아 참. 사실 이럴 때가 제일 곤혹스럽습니다. 휴우! 어이, 미스 강! 이분 응급실로 우선 모시고 입원절차 밟아드려요. 자자 가시죠." 사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의사가 앞섰고 그 뒤를 따르는 사내가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감사를 표했다. 한국이 히죽 웃으며 위층계단을 탓다. 엘리베이터라는 게 있었으나 일부러 피했다. 성한 두 다리 놔두고 손가락만 까닥거린다는 게 오히려 귀찮았고, 무엇보다 탈 때마다 다른 사람의 요령을 빌리기가 면구스러웠다. 31. 임마. 이런 데선 사정이고 나발이고 볼 거 ㅇ어. 일단 목소리 큰 놈이 장땡이라니께. 설마한들 악 좀 썼기로니 천장이야 허물어지겠냐 그렇다고 목구녕에 피가 나오겠냐. 목구녕에 피가 좀 나오면 어뗘. 여그가 병원 아니냐 병원. 헌게 무조건 큰소리부텀 질르고 댐비는겨. 엄부렁을 써 임마. 허리가 삐끗한 정도가 아니라 왕창 나가부렀다고. 알 것냐. 그러잖아도 시끄러운 한국에게, 조언이랍시고 거들던 석배였다. 석배 갸, 도가 텄어. 맞어. 긍께 일단은 목소리가 크고 볼 일인겨. 히...잘 된겨. 꼭 울 아부지 겉든데. 병실 문을 디밀자 누렇게 뜬 상국이 떠올랐다. 부성부성한 얼굴이 아무래도 불면증 탓만은 아닌 듯했다. "우째 니 혼자냐? 니 처는 우뜩하고." 누워 있는 환자들을 보자 저 역시 눕고 싶어지는 한국이었다. 피곤했다. 그리고 괜시리 세상이 싫어졌다. 결혼이고 나발이고 누르실 집에나 갔으면 싶은 심정이었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고 엎드려 자도 등창에 시달린다고, 생각해보면 이놈의 도시는 들어설 때부터 싹수가 노ㄹ었다. 장닭이 지붕 꼭대기까지 날아오르질 않나, 튀어나온 흠집 싸발라도 시원치 않을 맞선 본다던 날 석배란 놈 면도칼에 눈두덩일 베이질 않나, 어디 그뿐이랴. 풀풀 쉬어터진 수꾸무신기 한 사발 꿀꺽하겠다고 생돈 30만 원을 날리질 않았나. 직장이라고 붙어있을 만하니 파출소에 걷어들려 본의 아니게 파직당한 꼴이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교통사고까지, 거기다 죽은 난쟁이 노인이 백마로 둔갑하여 등천까지 하였겠다. 끝내는 홀딱쇼에 애꿎은 양주병만 죽이다 새벽 댓바람에 알몸으로 내몰림을 당하다니. 참으로 이놈의 도시는 해괴하고 엉뚱하기만 할 뿐 정 붙일 데라곤 손톱만큼도 없었다. 한국이 축 쳐진 상반신을 허물어뜨리며 의자에 앉자 상국이 혀를 찼다. "너야말루 이적지 어딜 쏘다닌 거냐. 너 기다리느라 잠 한숨 못 잤다. 병원에 간다구 했다는 놈이 생전 와야 말이지. 도대체 뭔 일 있었냐?" 한국이 찔끔했다. "그럴 사정이 있었어야. 니 집엔 미선이 갸만..." "뭐야! 사정...? 그래 그 사정이란 게 뭔지 내가 알아선 안 된다 이 말이냐.?" "얀. 다음에 아르켜줄께. 사정상 지금은 말하기가 그렇다. 그보다두 지수씨 말이여..." 32. "꼴에 비밀이다 이거냐. 내참 드러워...이리루 온다는 걸 냅두라 그랬다. 미선이하구 집이나 지키라고. 난 니가 늦게라두 올줄 알었지. 이젠 니 얼굴 쳐다만 봐두 한 십 리는 되는 거 같은 게 지겹다 지겨워." "뭐여? 긍께 그럼 지수 씨가 여기두 없었다 이말이냐." "너 시방 누구하고 말장난하자는 거냐. 미선이 델고 집에 있을 거라니깐." 한국이 이상하다는 듯 무슨 말인가 하려할 때 마침 병실문이 열렸다. 회진인가 했지만 간호원은 아니었다. 물기 축축한 머리카락을 뒤로 젖히며 들어서는 사람은 주연실이었다. 주연실을 확인한 한국이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한국과는 달리 그녀는 아주 태연했다. 간밤에 일쯤은 까마득히 잊은 듯 보였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상국이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부볐다. 주연실. 김석배의 처 될 사람이 아닌가. 돈 많고 떵떵거리는 잘난집 딸이라고 했던가. 무엇이 아쉬워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저 혼자 찾아왔단 말인가. 병문안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상국이 그저 눈만 멀뚱거리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자니 더욱 이해 못 할 건 한국이었다. 엉거주춤 서서 당황해 하는 꼴이 아무래도 평소 같지가 않았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인가 벌어졌음이 분명했다. 그래 저놈이 비밀이라고 했겠다? 그렇다고 물색없이 나댈 일도 아닌지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고 죽은 척 있는데 주연실이 종이가방을 불쑥 내미는 게 아닌가. "자요. 갈아 입으세요." 한국이 받아들고 보니 옷이었다. "이건..." "한국 씨 옷이에요. 세상에...양주를 물 마시듯 퍼마시는 분이 어딨어요. 그러니 취하죠." 주연실이 어이없다는 듯 쿡 웃었다. "그럼 이 옷이..." "그래요. 한국 씨 거예요. 오바이트를 얼마나 해대는지. 아유, 챙피해서 혼났어요. 이른 새벽에 어디 세탁소에 문 열어논 곳이나 있어야 말이죠. 부랴부랴 손질한다고 했는데 얼룩이나 빠졌는지. 근데 참, 여관에선 뭘 입고 나왔어요? 옷두 없었을 텐데." 뭐야? 여관...! 잠자코 듣고 있던 상국이 입을 딱 벌렸다. 혹시 잘 못 들은 건 아닌가 하여 주연실과 한국을 번갈아 쳐다봤지만 그들 둘 사이엔 전혀 어색한 낌새가 없지 않은가. 33. 한국이 태연스레 옷을 뒤적이며 얼떨떨해 했다. "그럼 연실 씨가 제 옷을...? 전 또..." "앞으룬 적당히 드세요. 그리구 이거..." 그녀가 핸드백을 열더니 무언가 꺼냈다. "저금통장하구. 자요, 도장. 한국 씨 이제 보니 부자던데요. 언제 술 한잔 사셔야 해요. 아참 이런! 내 정신... 급한 일이 있어서 고만 가봐야겠어요. 그럼, 담에 또..." 손을 흔들며 뛰다시피 나가는 주연실을 망연히 쳐다보는 한국이었다. 꼭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한국이 그러했으니 곁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상국으로서야 듣긴 들었으되, 꼴에 양주가 어떻고 여관이 어떻고, 하도 기가 막히는지라 그저 입만 딱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른팔에 동여진 깁스붕대의 끈이 풀어졌는지도 모르고 상국은 그저 눈만 멀뚱거리며 뻘쭘히 열린 문을 쪼아보고 있었다. 잠깐 동안의 시간이 어색하게 지나고, 상국이 꿈결처럼 말문을 열었다. "너어... 그러고 본 게 엊저녁 내내 양주 마시고 돌아다녔다 이 말이냐. 허고 여관이란 건 또 뭐냐? 설마하니 저 여자하고 같이 잤다는 말은 아니겠제? 아서라. 난 모르겠다. 돌배 그 자슥 알면 살인 날 일이다. 살무사처럼 뒤엉켜 죽던 사마구처럼 배때지에 깔려 죽던 내야 알 바 아니다만 제발이지 그 불똥이 나한테까지 튈까봐 걱정이다. 난 죄 ㅇ다. 암...! 너 겉은 것두 형이라구 노인이 시키는 대루 한 것밖엔. 친구 잃고 핏줄 ㄲ기자고 너 불러올린 건 더더욱 아니고. 설마 저 여자하고 같이 잔 건 아니겠제? 우째 암 말두 ㅇ냐? 밤새 진기를 다 빼부러 말할 기력두 ㅇ다 이거냐? 시방." "히, 얀. 빌소릴..." 한국이 그제사 히 웃으며 털푸덕 주저앉았는데 그 바람에 바지통의 실밥이 투둑, 튿어졌다. 허옇게 드러난 허벅지를 내려다보며 한국이 변명처럼 더듬거렸다. "술이 하두 취해서... 양주가 독하긴 독하드라야. 맛이야 빌루 그렇드라만. 고매한 연실 씨가... 아서라 야. 같이 자긴. 근데 석배가 알면 어쩌고 함서 그게 뭔 소리냐? 석배 동상이 우ㄸ다고, 내사 좋기만 하드라만. 넌, 야 그기 탈이여... 접때도 그 동상 면전에 앉히키 놓고 가게가 사흘이 가나봐라 나흘이 가나봐라 올년에 안 망함 명년에 망할기다 함서 축원을 올리드니, 이잔 ㅇ는 데서두 악담이냐. 심사가 그르케 악해서야 다 된 밥도 논으루 가겠다. 야안." 34. "어얼시구. 쪽박살이 삼년에 남는 건 성주풀이뿐이더라고 니 짝이 그 짝이구나. 집에 갈 노자돈두 궁할텐데 돌아가신 난쟁이맨치로 아예 자리 깔구 길바닥에 나앉어라. 타령두 장타령인게 동전걸이 지폐루 들이겠다. 좌우당간 그년하고 별일 없었다니 근심이 안심이다만 이젠 나두 니 뒤는 끝이다. 목발 없는 앉은뱅이 뛰어야 봐야 제자리봉창인거 너두 내 신세 알 거다. 긴 얘기 해봐야 그렇고, 참 그 통장... 다른 맘 없응께 구경이나 하자. 들긴 뭐가 들어 있기나 한 거냐?" 눈을 둥그렇게 뜬 한국이 손에 든 통장을 얼른 뒤로 숨겼다. "으...ㅇ어야. 아부지가... 그려, 아부지가 농자금 내면서 맹근 빚통장이여야. 얀. 증말이라니까." "하긴. 니가 뭔 돈이 있다구. 안 봐두 훤하다. 그냥 해본 소린 게 화장실 가서 옷이나 갈어입구 와라. 남사스러운 건 둘째치고 질래 그렇게 앉어 있다간 성해낼 옷 하나 없겠다." 상국이 아예 통장엔 무관심한 듯 가볍게 대꾸하자 물색없이 나대는 한국이었으니, "근데 빌일은 빌일이다. 지수씨가 여기두 ㅇ다믄...아녀. 그럼 내라두 가봐야 쓰겠다." 하며 주섬주섬 옷보따리를 챙겨드는 게 아닌가. "뭐야! 가아? 어딜...?" "집 말여야. 빈 집이여. 미선이 갸 혼자만 있는." 상국이 벌떡 일어나려다 말고 입을 딱 벌렸다. 그러잖아도 땟물 꼬질꼬질한 얼굴이, 석쇠 위에 올려진 해태 꼴로 일그러지는데, "뭐어...!? 빈 집? 빈집이라고!" 상국이 거푸 일어나려다 말고 악!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하거나 말거나 곁에서 바라보고 있던 한국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했다. 통장만 무사하다면 그 외엔 별일 아니라는 투였다. "빈 집은 아녀야. 미선인 있었응께." "넨지랄! 그게 빈 집이 아니고 뭐냐. 그래, 밤 새도록 미선이 혼자 있었다 이 말이냐? 니덜, 지수 은숙인 어딜가고! 내 이걸...그냥!" 상국이 구르듯 기어이 일어섰다. 허리에 감긴 요대를 왼팔로 거며쥐고는 깁스붕대로 동여진 오른팔을 덜렁거리며 병실 밖으로 나가는 상국을 보고나서, 아니 그 후로도 얼마를 더 앉아있고 나서야 아이쿠,하며 뒤따르는 한국이었지만 사태는 이미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고 있었으니. 상국은 어느새 간호대기실에 놓여진 전화기를 멱살이라도 잡듯 집어들었다. 전신음이 삐리릭거릴 때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한국은 제 가슴 속에서 나는 소리인 양 쿵쾅거렸다. 35. "뭐야! 누구? 다, 당신이라구?" 상국이 까치독사처럼 모가지를 치켜들고는 고래고래 고함을 쳐대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크고 험악했던지 잡담을 나누고 있던 간호원은 물론 지나가던 환자들까지 기겁했다. 다들 뻣뻣한 얼굴로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뒷걸음질쳤다. 그런 그들을 그 자리에 묶어두기라도 하듯 상국이 또 고함을 쳐댔다. "누굴 병신으루 알어! 어! 바른대루 똑바루 못대! 내가 시방 병원에 있응께 살판났다 이거지. 뭐야? 애가...어째! 밤새두룩 헛소릴하구 미열...? 그럼 병원엘 데리고 오든지. 그, 그래서 약방엘 잠깐 갔다왔다고?" 상국이 말소리를 누그러뜨리며 한국을 꼬나봤다. 딸애가 아프고 어쩌고 한 게 사실인지 아닌지 대라는 투였다. 속에선 주먹만한 불덩이가 튀어오르는 한국이었지만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을 경황이 아니었다. 양 볼을 씰룩거리며 한국이 고개를 둬 번 끄덕였다. 이번엔 무슨 소린가 저쪽의 말소리가 길었고, 듣고 있기가 거북했던지 상국이 가래침을 컥, 뱉어냈다. 그리곤 좀전까지만해도 금강석같이 등등하던 기세가 갑자기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더니 목소리마저 전화통 밑으로 기어들었다. "글쎄 그런 게 아니라... 뭐야! 일부러 모함이라니. 무슨 소릴 그렇게 하는 거여. 한국이 저도 다 걱정해서 해본 말이겠지. 아, 알었어. 쟈 말만 믿은 내 잘못인 게 고만 끊자고. 알었다니까!" 상국이 수화기를 힘없이 떨구며 한국을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귀가 있으면 다 들었을테고 어디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식이었다. "아녀야. 증말루... 그려 내 잘못이다. 미선이 갸 말만 듣고 확인할 새두 ㅇ이 뜀박질혔응게. 할 말은 ㅇ다만, 참말로 지수씨가 받긴 받은 거냐? 설마 미선이 갸가 그짓말을..." 상국이 꼴도 보기 싫다는 듯 한참을 째려보더니 도마 위에 올려진 물고기처럼 입을 딱딱 벌리며 휭하니 병실로 들어갔다. 같이 따라 들어갈 맘이 아니었다. 화장실로 가서 옷을 갈아 입었다. 말끔하게 세탁한 옷을 입고 나니 그런대로 기분이 좋아졌다. 더구나 자신이 입고 있는 이 옷이 주연실이 세탁해준 것이라 생각하니 아주 묘한 감정까지 일었다. 야릇한 흥분 같은 게 얼굴에 번지면서 온 몸이 이상스레 가벼워지는 것도 같았다. 일순 피곤함이 싹 가셨다. 통장을 펼쳤다. 자신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조금은 낯설지만 신선하게 다가왔다. 한 장을 더 넘기자 곧고 정갈하게 박음된 5라는 숫자와 0이라는 숫자들이 누르실의 느티목처럼 서 있었다. 36. 동전처럼 살아서 주르르 흘러내릴 것 같은 통장의 숫자들을 흡족히 바라보던 한국이 다음 장을 얼른 넘겼다. 갈피처럼 짚히는 게 있었는데 펼쳐보니 색종이로 된 쪽지가 묻어났다. 주연실. 223-6342. (까치다방)이라고 씌어져 있었고 맨 밑엔 '연락 바람'이라는 말까지 붙어 있었다. 한국이 하마터면 야,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까치가 날개를 접듯 통장과 쪽지를 속호주머니 깊숙이 챙기는 한국의 손이 떨렸다. "한국이 너 요새 실성실성하는 것 같다. 엉뚱한 말로 남을 골탕먹이질 않나. 괜히 히죽히죽 웃기나 하고. 쥐인지 양인지 하는 다방 냄비 때문이라면 애초에 맘 달리 먹어라. 열 번 찍어서 될 나무 같으면 내 열 번이 아니라 평생이라도 도끼질 하라고 하겠다만, 아서라. 그 여잔 석배 갸가 벌써 찍어논 나무다. 죽은 고기 낚겠다고 낚시질 하는 놈이나 썩은 나무 베겠다고 도끼날 들구 나서는 놈이나, 하나같이 비오는 날 고논에 물 대기 식이루 말짱 헛일인겨. 니 지수씨가 했던 말 하나 틀린 거 ㅇ다. 그 여자가 그런 여자여. 갈 데까지 간." 한국이 자리에 앉자마자 벌레 씹은 얼굴로 다그치는 한국이었다. 할 말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지 머뭇거리거나 거리끼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러나 늙은 아비처럼 훈계조로 일관하고 있는 동생의 말을 그저 듣기만 하고 있는 한국의 얼굴이 내내 부드러웠다. "왠만하면 그만해 두라야. 암만 봐두 넌 석배 동상하고 연실 씨하고는 잘못 사군 것 같다. 우째 틈만 나면 못 잡아묵어 안달이냐. 그만큼 좋은 사람들이 어딨다고." 결혼이다, 결혼! 하면서 김석배와 주연실과의 혼인 사실을 말해버릴까 하다간 한국의 얼굴을 보매 차마 그러하지는 못하고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뉘이는 상국이었다. 돌아누우려 했지만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얼마 동안 눈을 감고 있던 상국이 잠꼬대처럼 입을 열었다. "어제 참 누가 찾어 왔드라. 너 먹으라고 깡통 한 박스 갖고 완 걸 다 피돌렸다. 먹긴 나도 먹었다만." 한국이 조는지 고개를 꾸벅였다. "왠 아가씬데 동생이라며 찾아왔는데 듣고보니 딱하드라. 사고 났을 때 니가 업고 나온 여자 말여. 니가 아니었음 죽었을지도 모른다며 널 꼭 한번 만났음 한다는 겨. 생명의 은인이라고. 남편 잃고 얼마 안 되 자식 하나 있는 것까지 끌어묻었다니... 그 여자 팔자도 어지간하드라." 한국이 아예 코까지 골았다. 얼마간을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던 상국도 잠이 들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붉은 단풍잎 역시 늦가을 햇살을 바래며 그들처럼 그렇게 졸고 있었다. 9. 그리고 떠도는 손님별 1. 첫눈이라도 오려나. 땅거미가 우중충하고 하늘엔 구름이 끼었다. 이젠 떨어질 이파리도 없이 나무들은 맨살로 바람을 맞고 있다. 하늘은 어둡고 대지는 칙칙하며, 숲과 나무는 그런 하늘과 대지를 지주 목처럼 떠받들고 있다. 메마른 바람이 한기를 느끼게 한다. 어디 한기뿐이랴. 이런 황량하고 건조한 바람이라면 바위 틈에서조차 저주의 기운이 귀젖처럼 흘러나오리라. 땅에 끌어 묻힌 자들 중에 어느 누구라 한들 원과 한을 품지 않은 자가 있으련만, 그래도 봄이면 그 한과 원이 싹으로 자라 꽃으로 지고, 차라리 동토의 겨울 한가운데라면, 표표히 흐르는 눈발 한 송이만으로도 잡다한 인간사쯤은 감쪽같이 덮어버릴 수 있을 것을... 그러나 지금은 가을. 가을이 늦어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는 하나 변란에 남은 미망인의 치마꼬리처럼 모든 게 어수선하고 뒤숭숭할 뿐이다. 싹 틔울 단 한 알의 여망도 없이, 남 몰래 갈무리할 눈발 한 자락도 없이, 풀풀 날리는 아릿한 아픔과 툭툭 채이는 생채기가 저녁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늦가을인 것이다. 그러한 썰렁하고 을씨년스러운 바깥 날씨를 바라보는 유태중 역시 마음은 천근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이 난국을 어떻게 처리해 나간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봐도 난마처럼 꼬인 상황을 타개할 묘책은 어디에도 없었다. 검찰지청에 있는 1호검사의 말로는 상부의 지시가 워낙 강력하여 자신들로서도 수사 자체를 기피할 명목이 없게 되었다고 했다. 오히려 그자는 아주 못마땅하다는 듯, 일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기자 나부랭이들 하나 요리하지 못했느냐며 되레 모든 책임을 유태중과 언론에게 돌렸다. 평소 친분이 자별 하다고 믿어온 경찰서장이란 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검찰의 수사지침이 하달된 이상 형식상으로나마 수사흔적은 남겨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설마 위원장님에게까지야 누를 끼치겠느냐며, 이런 일이야 원래 매스컴만 조용해지면 저절로 수그러들기 마련이니 너무 마음 졸이지 말고 다함께 기다려보자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유태중이 아니었다. 말로는 안심하라느니 문제될 게 전혀 없다느니 하면서도 막상 수사가 시작되고 나면 내가 널 언제 봤냐느냐는 식으로 냉담해질 게 틀림없었다. 설사 그 본인들이야 그러할 의사는 아니라 해도 사건배정 자체에서부터 배제 당할 건 뻔했다. 경찰의 생리가 그랬고 수사의 원칙이 그러했다. 그들을 탓하기 전에 먼저 손을 써야 했다. 그러나 손을 씀에도 한계가 있었다. 2. 문민시대의 사정이란 게 도시 종잡을 수가 없었다. 위에서 막으면 밑에서 들고 일어나고, 하부기관에서 유야무야하자고 하면 상급기관에서 극성이었다. 이리 틀어막고 저리 마무리 지어 겨우겨우 끝났는가 싶으면 이번엔 또 생각지도 않은 매스컴이 들쑤시고 일어났으니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그저 난감할 따름이었다. 회사 전반의 상황이 이러하다면... 밖에선 바람이 부는지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그래, 바람의 지혜를 배울 일이다. 한없이 느린 듯하면서도 번개보다 빠르고, 더없이 약한 듯하면서도 태산을 무너뜨린다. 가장 비굴해 보이나 가장 강직하고 가장 천열(賤劣)해 보이나 가장 고고(孤高)한 것이 또한 바람 아니던가.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그렇다고 용렬하게 우쭐대는 법도 없이 그저 조용한 듯하면서도 천지산하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지혜가 있지 아니하던가. 그러하니 애시 더하고 덜함이 있을 리 없고, 안과 밖이 다를 리 없겠거늘, 나아가는 행보가 이러하고 다스리는 마음이 이러하매 어디 철벽이 가로막고 있다한들 무에 서두를 것이며 바늘구멍 만한 포망에 에워싸여진들 무에 조급해 할 것인가. 풍류를 안다고 하여 멋을 부릴 일이 아니요, 이끌고 나아가는 재주 비상하다고 하여 아귀 잡히는 대로 모다 챙겨 넣을 일 또한 아닌 것을. 중역회의를 마친 유태중이 썰렁한 한기를 느끼며 참담한 기분이 되어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처세의 달인답게 한 가지의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주변의 분위기가 이러하다면 무언가 주기는 주어야 한다. 손가락 하나 보전하겠다고 미련을 떨다 어깨죽지까지 잃는 우를 범해선 아니 될 것이다. 버릴 것은 버리고 포기할 것은 미련없이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현명하다는 것은 집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내줄 줄도 아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바람의 지혜 아니던가. 현시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복지원이다. 그렇다고 복지원 전부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것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에 다름 아니다. 저들 역시 복지원 전체를 문제삼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 또한 쇠뿔하나 바로잡겠다고 소를 잃게 할 정도로 우매하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상대방이 보기엔 가장 많은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가장 쓸모 없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안락의자에 깊숙이 파묻힌 유태중이 멀리 창 밖을 내다보며 연신 콧구멍을 후비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있을 때면 버릇이 되어 있었다. 모근째 뽑혀져나온 코털을 담뱃불처럼 비벼 끄더니 인터폰을 눌렀다. "음. 미스 장. 지구당사무실좀 대줘." 곧바로 뚜우 하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3. "아, 사무장. 나요, 유. 그래요. 그렇다니까. 그래, 의원님이 해외에서 돌아오시는 날짜가 언제라고 하셨소." "아아. 스위스건 이태리건 상관없고. 귀국하는 날짜 말이오. 뭐요? 글쎄 오래 라는 게 언제냐니까요. 젠장할...! 알았어요, 알았어. 아, 아니오. 그럴 필요 없소." "어쨌건 당에서도 나름대로 대책이 있으리라고 믿소만, 오늘 당장이라도 연락을 드려야 할 거요. 이번 사건이 의원님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건 사무장이 더 잘 알거요. 뿐만 아니라 본건이 공론화 된다면 정치쟁점으로 비화될 소지도 있고... 글쎄 듣기 거북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시급한 사실 아니겠소. 그래요. 그래. 나 역시도 의원임을 최대한 배려는 하겠지만 막다른 곳에 몰리다보면 본의 아니게 털어놓는 경우도 있지 않겠소. 더군다나 바지저고리들만 앉아서 수사하는 것도 아닐테고. 하아, 내원. 이렇게 딱해서야. 이게 무슨 게임인 줄 아시오. 이것 봐요, 사무장! 무언가 착각을 해도 단단히 한가본데 이건 상대방을 밟고 올라서야 내가 이기는 시소게임도, 그렇다고 저쪽이 잃은 것만큼 이쪽이 얻게 되는 제로섬 게임도 아니란 말이오. 아시겠소. 내 말. 허허...글쎄, 원인이야 이쪽에 있든 언론에 있든 지금 그런 걸 따질 계제입니까. 발등에 당장 불이 떨어졌는데, 요새 유행하는 거 뭣이냐 스위스, 이태리 찍고 영국으로 돌 그런 한가한 시간이 아니라는데두요. 그야 그럴 테지만. 어쨌건 믿겠습니다. 그래요 그래. 물론, 내가 없더라도 메모를 남겨 놓으면, 그럽시다. 그래요." 유태중의 목소리가 튀는 걸로 보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자신이 곤경에 처한 이 마당에 해외나들이란 게 그랬고, 누구보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할 줄로 알았던 사무장이란 작자의 말투가 사뭇 귀에 거슬렸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신이 조사받기를 기다렸다가 일부러 출국해버린 것 같은 인상이 짙었다. 그렇기 때문에 배신감 또한 깊을 수밖에 없는 유태중이었다. 물론 냉철히 따지고 보면 이번 일과 국회의원 정태철과는 관련이 없었다. 자신이 조사대상에 오른 이유는 지역유지의 토착비리를 엄단하라는 사정기관의 지시에 따른 것이고, 때문에 검찰이나 경찰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일반적인 조사일 뿐 범법의 혐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유태중이 정태철에 대해서 그렇게도 불쾌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자신의 그 많은 배려들, 다시 말해서 선거가 있을 때는 물론 선거구관리 명목으로 정치자금을 요청해 올 때마다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인데, 막상 자신이 막다른 곤경에 처하자 도움은커녕 외유랍시고 훌쩍 떠나버렸으니 서운한 정도가 아니라 일말의 배신감 같은 기분마저 들었던 것이다. 유태중이 입술을 씰룩거리며 일어섰다. 4. 당할 때는 당하더라도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가 찾아간 곳은 경찰서였다. 이번 일로 해서 두번째가 되는 셈이었다. 일전에 찾아오긴 했으나 별로 깊은 교감을 주고받진 못했었다. 서로의 친분으로 보아서야 흉허물이 있을까마는 공과 사가 별나게 엄연한 경찰서장이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누구라고 감히 위원장님의 사업에 이래라 저래라 하겠습니까. 설만들 저희들이라고 그 정도까지 눈치가 없겠습니까. 안심하십시오. 그저 시대가 바뀐 탓으로 한번쯤 거치고 지나야 할 홍역이거니 생각하십시오." 경찰서장의 말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런 안이한 말이나 듣자고 찾아온 유태중이 아니었다. 넥타이 매듭을 손으로 매만지며 짐짓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불안하고 초조하기 그만이었다. "물론 그러시겠지요. 저 역시 서장님의 인품을 존경해온 터라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인 줄 압니다. 하지만, 하다보면 뜻대로 안 되는 게 사람의 일 아니겠습니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고 아무리 깨끗한 돈이래도 구린내 안 나는 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욱이 사업이라는 거 막힐 땐 뚫어줘야 하고 샐 때는 막아줘야 하는데 이게 어디 순리만 갖고야 되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가끔은 편법도 있을 수 있겠고 나름대로 무리수를 던질 때도 있기 마련이거든요. 사람들이야 그저 사업수완이 능란하다느니 천부적으로 사업가 기질이 있다느니 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떠듭디다만 다 그 말이 그 말 아니겠습니까." 유태중이 커피 잔에 입을 댔다. 지금까지 마셔온 그 어떤 커피보다 쓰고 떫었다. 커피 잔을 내려놓은 유태중이 경찰서장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정공법으로 밀어붙이자는 심산이었다.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있어 정직 이상으로 확실한 화법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유태중이었다. "제가 부도덕하고 모자란다는 것을, 저는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말하기 좋아 사회사업가니 종교운동가니 합디다만, 기실 명색이 그렇다뿐이지 어디 정작 해놓은 일이 있어야 말이죠. 이번 일만해도 제가 부덕하고 흠이 많아 그러려니 자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찾아온 것도 어찌 보면 비굴함의 표상 아니겠습니까." 갑자기 경찰서장의 낯빛이 흐려지더니 펄쩍 뛰었다. 5. "아, 아닙니다. 절대,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위원장님. 저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저희들이 위원장님을 딴 뜻으로 보았다면 당초에 내사한다는 사실 자체도 귀뜸해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이 지역 발전을 위해서 헌신하신 위원장님의 공적이야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단지,크흠... 말씀드리기 좀 그렇습니다만 투서라는 것이..." "뭐요! 투서? 투서라면 누가 고자질을?" 유태중이 깜짝 놀랐다. 처음 듣는 말이기도 했거니와 너무나 의외였던 것이다. "그래 대체 그 자가 누구란 말입니까?" "투서의 내용만 그저 이렇다 알 뿐 당서에서도 그게 누구인지는 그저 막막합니다. 청와대를 필두로 안기부, 경찰청 여기저기 접수 안 된 곳이 없는가 봅니다. 저희들도 그게 누군가의 모함인 줄 알고 있습니다만 기명이라놔서... 문민정부 들어서고부터는 진정이니 고발이니 하는 이런 종류의 투서가 워낙 많다보니 무기명만 같아도 요령껏 어물쩡 넘어갈 수 있겠지만 정식으로 이름을 밝힌 건이라... 변명 같지만 처리결과를 회신해주어야 하는 고충도 있고... 어쨋건 사실 여부를 가리라는 상부의 지시이니 심기가 좀 불편하시더라도, 어쩌겠습니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죄다 허위라고 발뺌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저 원만히 처리되도록 서로 힘쓸 수밖에요." "수사과장한테 어느 정도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도대체가 이건 너무나 황당해서 그럽니다. 말씀하시기가 어려우시겠지만 그 투서 내용이... 물론 복지원만 걸고 넘어진 건 아닐테고. 이 정도까지 골탕 먹일 놈이라면 치밀한 사전계획을 준비했을거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공적인 문제에서부터 제가 훑어봐도 이건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사생활 문제까지... 아무려면 대수겠습니까. 위원장님의 청렴결백이야 세상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고." 유태중이 흠칫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저질러온 비위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일이 죄목을 달자고 하면 걸리지 않는 게 없을 것이었고, 때문에 그만한 벌을 묻고자 한다면 지옥이란 지옥을 다 돈데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한 유태중이었으니, 마치 염라전에 끌려간 망령이 죄보를 극구 부인하다 마침내 업경대 앞에 선 심정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그쯤에서 물러날 유태중이 아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태연히 쓸어내리며 평소의 위엄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후, 얼마간의 얘기가 더 있었다. 해가 넘어갔고 약속된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다. 경찰서장과 유태중이, 또 한 쪽에서는 수사과장과 방유석이 자리를 달리하여 만났다. 6. "실장! 그래 저쪽에선 무어라 하던가." 이튿날 아침. 방유석이 회장실 문을 두드리자 엊저녁의 일부터 묻는 유태중이었다. 물론 경찰서장과 자신이 만나 이러이러하기로 어느 정도 매듭이 지어진 상태이긴 했지만 실제적인 일이야 실무진에서 처리할 사안이었기 때문이었다. 과음한 탓인지 방유석의 얼굴이 부성부성했다. 그러나 조금도 피로한 기색이 없는 방유석이었다. 오히려 자신감에 차 있는 듯, 패기만만해 보였다. "그 작자 처음엔 얼마나 뻣뻣하게 나가던지 아주 애를 먹었습니다." "뭐야? 뻣뻣하게 나가다니?" "그치들 원래가 그렇잖습니까. 평소엔 쓸개라도 빼줄 것처럼 굴굴거리다가도 일단 사건이 터졌다하면 너를 언제 알기라도 했냐는 식으로 싹 돌아서는 거, 경찰들의 생리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다른 놈이라면 또 몰라도. 이런 처죽일...!" "너무 걱정 마십시오. 회장님이 지시하신 대로 따르기로 확약받았습니다. 하하, 그놈들 처먹은 것만큼 뒤가 구리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경찰서장과 회장님이 서로 합의를 본 사항이라해도 난 모르는 일이라고 펄펄 뛰던 놈이, 지난 추석 때 왜 직원들 회식이나 하라며 봉투한 것 있지 않았습니까. 그걸 들이대자 대번에 수그러들더군요. 그때 그놈 갖다주길 백번 잘했습니다. 지놈이 이제와서 토해낼 수도 없고. 흐흐... 그나저나 애들이 따라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계획대로 성사됐다니 다행이네만, 그놈 딴 소리 못 하게시리 단단히 조여 놓잖구." "암요. 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제놈이 아무리 뛰어봐야 이 방유석을 따르겠습니까. 삐끗도 못하게 아주 단단히 코를 걸어놨습니다." "허잇, 사람하군. 그게 그렇게 큰소리만 칠 일이 아니라는데두." 유태중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위기관리 능력이야 회사 내에서 알아주는 방유석이긴 했지만 나이가 젊어서 그런지 안목이 좁은 게 흠이었다. 전적으로 신임하고 있으면서도 이따금 챙겨보지 않으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낭패를 볼 때가 심심찮았다. "그자가 그렇게 나올 줄 알고 미리 손을 써 뒀습니다." "미리 손을 쓰다니?" "지난 번에 왜 회장님하고 유선옥에 갔을 때 봐둔 햇병아리 있잖았습니까. 진숙미라고 예쁘장한." 7. "그랬었지. 그런데?" "유선옥 마담한테 미리 부탁을 했었죠. 걜 미리 대기시켜 놓으라고. 교육을 어찌나 철저하게 시켜놨던지 만 원짜리 팁 한장을 줘도 거절하던걸요. 아무려면 이젠 지가 용을 빼는 재주가 있다해도 우리 말은 거절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어젯밤에 유선옥엘 갔었다 이 말인가!" "아이고 회장님도. 저라고 그 정도 머리가 없겠습니까. 일부러 고급요정은 피했습니다. 먼 뻘 되는 제 일가붙인데 숫보기라 그러니까 첨엔 내 눈치만 슬슬 보더니, 술 한잔 들어가자 지가 어딜 갑니까. 더군다나 양주로 쳐발랐는데요. 취중에도 뭔가 께림칙하긴 하던지 손을 훼훼 내젓는 걸 아주 꿀 붙여 합방시켰습니다. 흐흣..." 유태중이 고개를 끄덕이며 쓰게 웃었다. 선유옥 진숙미라면 자신과도 관계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일을 저지른 방유석이 괘씸하긴 했지만 어쩔 도리 없었다. "무난하게 넘겼다니 안심이네만... 그건 그렇고 교리 임야 건은, 복지원 변 실장에게선 무슨 연락 없던가?" 유태중이 무심히 받아넘기자 머쓱해지는 방유석이었다. 방유석으로선 한껏 칭찬을 들을 줄 알았는데 그게 무슨 잘한 일이냐는 듯 유태중이 시큰둥해 하자 고만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다음 주 중엔 아마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판결이 날 것 같답니다. 산주 쪽에서 일부러 출석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에 무슨...뭐라고 하더라..." "의제자백." "아, 네. 의제자백. 의제자백이라고 하더군요. 저쪽에서 두번 이상 재판에 불출석해서 그렇다 하더군요. 다투지 않은 사실에 대해선 자백한 걸로 보는 게 판례라며 원고 승소판결이 확정적이랍니다. 변상열이 그 사람, 우리 쪽의 일방적인 승리라며 좋아 하더군요. 헌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복지원 공손묵이 어떻게 나올지... 봉고차 운전수 역시 고분고분할 것 같지도 않고..." 방유석이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자신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가 심히 못마땅하다는 투로 유태중이 짜증을 부렸다. 아마 유선옥의 진숙미 탓이겠으나 거기까지야 알 리 없는 방유석이었다. "이 사람아! 어째, 라이벌은 닮아간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요즘 들어 부쩍 복지원 변상열이 그 사람하구 꼭 같은 소리만 하나. 해보지도 않고 겁부터 먹으면 낸들 어쩌란 말인가. 자네 말대로라면 경찰이야 우리 편일 거, 각본이야 짜여져 있겠다. 그래 앵무새처럼 따라하지도 못한다 이 말인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설득시켜! 얼뱅이 같은 그놈, 전한국인지 전중국인지 하는 놈이나 잡아들이고." 8. 방유석이 찔끔했다. 쓰리고 아린 속이 더부룩했다. 시원한 해장국 한 사발 끓여줄 사람 없다니. 이웃집 처녀 믿고 있다 과부장가 들게 생겼더라고, 방유석이 그짝이었다. 유태중이야 말만 나면 걱정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자네만큼은 내 사위가 되어 대양그룹을 이끌어나가야 하지 않겠냐고, 군입에 밥풀 붙이듯 성화였으나 막상 당사자인 주연실은 엉뚱한 놈에게 붙어 약혼까지 한 마당 아닌가. 이 기회에 아예 전한국이란 놈은 말할 것도 없고 철없이 날뛰는 김석배란 놈까지, 염전에 굴비 엮듯 줄줄이 잡아들일 각오였다. "전한국이라면 뛰어봐야 벼룩입니다. 연실 씨하고 병원에서 나오는 게, 애들 눈에 포착됐습니다. 현대병원 아니면 그 자의 형네집 둘 중에 한 군데입니다. 그 자보다 김석배란 자를..." 유태중이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하기도 싫다는 투였다. "누구? 김...김석배? 연실이 그 년하고 약혼인가 뭔가 했다는 놈 말인가? 알아서 하게. 함정을 파. 종신형을 시키던지 청부살인이라도 붙여 아예 없애버리던지! 지질이도 못난 위인하군. 내 그래 뭐랬나. 일이 이 지경에 이르기 전에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처신대로 하라니까 말로만 네네, 하곤 뭉기적거리더니 꼴 보기좋군. 딸년이고 지랄이고, 나두 이젠 그년 이름만 들어도 속이 뒤집힐 판이니 그년 얘긴 꺼내지도 말게. 복지원 쪽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자넨 오늘 중으로 극락교회나 다녀오게. 거기까지 손이 미치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니 비장부는 모조리 없애도록 하고. 김 목사 만나면 내가 그러더란다고 이르게. 집안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좋지 않으니 다들 언행에 신중하라고." 유태중이 곧바로 대양복지원을 향해 출발했고, 얼마 있다가 방유석 마저 자리를 떴다. 며칠 전부터 꾸물거리던 하늘이 기어이 눈발을 쳤다. 첫눈이었다. 바람도 없이 포근한 날, 함박눈이 꽃송이처럼 탐스럽게 휘날리고 있었다. 첫눈이 함박눈이면 서설이라던데 좋은 징조였다. 병실에 있던 어린 녀석이 먼저 야아! 소리를 질렀고, 사람들의 눈길이 우르르 창밖으로 몰렸다. 사람들의 눈길에 맞추어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상국이 화투판을 쓸었다. "오이! 뭔 짓이여. 애기패는 보지도 않고." 잔뜩 긴장한 눈으로 화투패를 쪼여가던 반백의 팔병신이 목청을 일궜다. 창밖에 내리는 눈송이만큼이나 소담하게 웃으며 상국이 자신에게 들어온 화투장을 폈다. 빨간 단풍잎 두 장이 보기좋게 하늘거렸다. 9. "히힛! 난 또... 장땡이구먼. 자, 이게 마지막이여. 땡값은 못 주더라도 패값은 줘야지." 머리 희끗희끗한 병신의 손에서 하얀 동전 두 알이 딸랑하고 빛났다. 상국이 조금 전처럼 그렇게 웃으며 왼팔을 흔들었다. "됐수다. 병신끼리 동전치기 할 일도 아니고. 간호사한테 된소리 듣기 전에 이거나 치웁시다." "허어... 눈발이 저렇게 우악스러우니 해 뜰 일은 없겠고. 별일은 별일일세 그려... 주는 돈을 다 마다하다니. 그 일이 뭔 일인지 나두 좀 알면 안 될거나. 전 씨?" 상국이 눈을 치뜨자 그제서야 시무룩해지는 반백이었다. 그자마저 제자리로 돌아가고 나자 썰렁한 한기가 침묵을 타고 돌았다. 그렇건만 가슴은 어쩐지 어린아이처럼 뛰었다. 다음 만남을 약속한 연인처럼 가슴은 왠지 모르게 설레였다. 첫눈 때문일까. 여인의 속살처럼 하얗고 풍만한 저 눈꽃 때문일까. 잔잔한 떨림을 느끼며, 상국이 깊은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함박꽃 같은 눈이 내리고, 또 내리고... 상국의 생각 역시 내리는 눈발을 따라 그렇게 자꾸만 깊이깊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레임이었다. 아! 얼마만인가. 알지 못할 설레임과 막연한 기대감, 그리고 시나위처럼 잦아드는 먼 과거에로의 울림... 그랬다. 아내 은숙을 만나던 날. 그날도 역시 첫눈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눈이 내렸고, 마냥 즐겁기만 했었다. 작은 실수일지언정 함박꽃 같은 웃음을 가져왔고, 주고 받는 잔잔한 우수의 그늘에서조차 깊고 아늑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아무런 이유도 없이, 또는 어떠한 목적도 없이 그저 만나기만해도 좋아지던 그런 때가 있었다. 우리 서 있는 이 자리가 두 쪽으로 갈라져 천길 만길 벼랑으로 쑤셔박힌다 해도, 너하고 나하고 쥐고 있는 이 손길은 영원히 풀지 않을 거라고, 내리는 눈송이 하나하나에 사랑을 다짐하며 밤이 이슥하도록 별밭 언저리를 맴돌던 그런 때가 있었다.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눈물을 줍고, 서걱거리는 왕대 끝에서 인생을 노래하던, 눈썹이 유난히 길어 눈물이 많았던 사람. 봄이면 나물 뜯을 줄 알았고, 여름이면 채발 아래 호박전이 별나게 좋았던 사람. 제목이 '나비부인'이라 했던가, 뽀얀 알전구 밑에서 소설책도 읽으며 대바늘 뜨개질이 고왔던 사람.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지 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야 어떠냐며 가난도 감로처럼 맛있게 견디던 사람.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10. 걸핏하면 언성이 높아지고 짜증이 앞선다. 예전 같으면 그저 웃고 넘어갈 사소한 일인데도 무단히 신경질을 부리게 되고, 그래서 그런지 웃음소리보다는 짜증 섞인 말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이래선 안 되지 하면서도 말을 하다보면 무심결에 언성이 높아진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가난 때문이리라. 가난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신체의 불구 때문이리라. 하지만 어찌한단 말인가. 가난은 예정되어 있었고, 몸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고는 운명이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개선될 여지란 없는 것이고 시간을 거꾸로 역류시키지 않는 한 운명을 피해가기란 불가능한 일 아니던가. 그렇다고 아내를 원망하거나 욕되게 한 적은 없다. 오히려 그럴수록 감싸주려 했었고 힘든 일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덜어줄려고 노력했었다. 아내와 미선이와, 그렇게 셋이 자면서 아내의 자리에 다른 여자가 들어섰으면 하고 바란 적은, 결단코 단 한번도 없었음을 맹세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녀와의 사이는 날이 갈수록 벌어지기만하고 감정은 황무지처럼 메말라갈 뿐이다. 가난 때문인가. 가난이, 사랑을 갈라세울 만큼 그렇게 잔인하고 혹독하단 말인가. 아니면 관계치 못함인가. 사랑하는 두 남녀 사이에 있어서, 더군다나 매일밤 잠자리를 같이 해야 하는 부부 사이에 있어서, 성관계를 갖지 못함은 정상적인 관계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성은 쾌락이다. 짐승 같은 쾌락도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 인간의 성관계는, 사랑이라고 하는 정신작용의 산물인 것이다. 사랑의 시작이면서, 그 사랑을 종국적으로 완성시키는, 가장 저급하면서도 가장 고차원적인 사랑의 형태가 성, 다시 말해서 섹스인 것이다. 부연하자면, 정상적인 신체를 갖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이러한 성(性)은, 때문에 가장 값싸게 얻을 수 있으면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쾌락이나 흥분보다도 높은 가치에 위치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관계하는 것을 보면 더럽다느니 추하다느니 하면서도, 막상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면 복사(腹死)의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판을 보고야 말겠다고 덤비는 이유도 다 이러하기 때문 아니겠는가. 일반적으로 볼 때, 가난한 부부일수록 잠자리의 관계가 잦고 격렬하다고 한다. 없이 사는 집일수록 자식이 많음은 이를 반증한다 하겠고, 일례로 흥부네 집이 그 표본이라 하겠거니와, 이는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갖고 있지 않겠는가. 11. 가난하다는 것은 돈이 없다는 뜻이고 보면, 욕구충족을 밖에서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그렇다고 도반(徒班)의 열(列)에 올라 허장성세로 호령할 일 또한 아니고 보면 억울과 억압을 하소연하거나 풀 길이란 처처 어디에도 없을 일이니, 그네들이 즐기고 향유할 수 있는 낙이란 잠자리에 들어 서로의 몸뚱아리를 어루만지는 일 외엔 따로이 무엇이 있겠는가. 가난한 집일수록 금슬이 좋다는 말은 이래서 거짓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상국으로선 어울릴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가난했고, 그 가난을 털어보자고 공사판에 뛰어들었으나 얻은 것은 허리병뿐이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인생이라면, 죽는 날까지는 살아 있어야겠는데 막막하기만 했다. 타향보다는 그래도 고향 근처가 나으려니 해서 찾아온 이곳 역시 죽는 날까지는 고사하고 하루 벌어 하루 살기에도 버거웠다. 사람들은 말하기 좋아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곳'이 세상이라 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빈손으로 돌아다닐 곳'은 없는 것이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발을 쳐다보며 상국은, 그래도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 진한 떨림에 감사하고 있었다. 인생이 아무리 그림자 걷기(步)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그리고 사랑이 아무리 불너울에 비치는 야명등 같은 것일지라도, 흔적을 바라 살아온 것은 아니고 불에 타는 듯한 정염을 구하여 아내 은숙을 탐한 것은 아니다. 지금은 이렇게 고달프고 힘겨울지라도 언젠가는 속호주머니에 신경쓰지 않고 가볍게 걸어볼 날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막연하지만 그래도 흔들림없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희망이 현시화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상처는 날이 갈수록 호전되었으며 버스회사측엔 좀 야박한 감도 없지 않았지만 덕분에 허리디스크도 나아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당장에 먹고 살 일이 난감하긴 했지만 이 고비만 어떻게 넘기면 적잖은 보험금도 지급된다 했다. 아내나 미선에겐 참기 힘든 고통을 강요하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어쩌겠는가. 버스회사나 보험사 측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에게 힘겨운 사고를, 자신에게만 유리한 쪽으로 배상을 청구한 것이 양심적이랄 수는 없겠지만, 고질병이 되어버린 허리를 고칠 방도란 달리 없지 않았던가. 목상인 양 앉아있던 상국이 길게 하품을 물었다. 깃발처럼 펄럭거리는 눈발이 제법 하얗게 쌓여 창밖은 어느새 신천지를 이루고 있었다. "사고를 당혔다드니 좀 어뗘. 전 씨?" 이런저런 생각으로 넋을 놓고 앉아 있는데 난데없이 고성만이 찾아들었다. 12. 참으로 오랜만의 해후였다. 치적치적 내리는 빗줄기를 가르며 기약없이 헤어진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계절은 첫눈을 맞고 있었으니, 세월의 무상함이었다. 그간 몇 번인가 만나긴 했지만 농담으로 시작해서 진담이 되어버린 아내 은숙에 대한 염탐 건으로 해서 서로 겸연쩍게 돌아서곤 했었다. 가뭄 끝은 있어도 장마 끝은 없더라고 전상국과 고성만의 만남이 그랬다. 신문마다 대문짝만하게 난 대형교통사고를 몰랐을 리 없고, 알았으면 찾아올 법도 한 치가 딴에는 좀 서운하기도 했었다. 서너 달 남짓한 세월이었건만 둘 사이의 오붓한 정은 십년지기나 다를 게 없었으니 말이다. 하건만 막노동 날품이란 게 어디 병문안인들 쉬우랴 싶어 속으론 섭섭했으면서도 누구한테도 내색해 본 적이 없는 상국이었다. 그랬던 것인데 막상 만나고 보니 반갑기 그만이었다. "야, 이게 누구냐! 고가 니눔이!" "그래 어뗘. 차도는 있는겨? 온다온다 하면서도 우째 짬이 나야 말이시." 고성만이 꾸러미를 내밀며 늦게 와서 미안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와준 것만해두 고맙지. 난 또 아주 잊었나 했다. 예병할 눔. 그래, 강짜 그놈도 여전하냐? 그러고 본게 공사두 어지간히 마무리 되겠구나 잉?" "누구? 강짜...? 난 또... 강 습장? 지 버릇 개 주겄어. 산 김씨 셋이 죽은 강씨 하나 못당한다고 주야장창 그짝이지." "공사는?" "멀었어. 전씨 이렇게 들어앉아 있지. 교회는 교회대로 흔들리지. 더구나 이젠 겨울 아녀. 근데 전 씨 얼굴이 어째 바람 든 무우 속살 같은 게... 안 보다 봐서 그런가? 병원에서 부황들 일은 아니겠고. 약살이 오른 거여, 약발을 받은 거여. 어째 부성부성하니 전 같지가 않어." 상국이 시큰둥했다. "보기는 잘봤다만, 그놈의 이론지 이백인지 하는 난쟁이... 이게 다 인과응보지 하면서도 아주 치가 갈린다. 잠이 들만하면 뒤통수부터 치고 댐비니. 질래 이랬다간 명대루 못살지 싶다. 근데 교회가 흔들리다니? 건 또 무슨 새 따먹은 소리고? 교회건물이야 철근 박은 세멘벽돌집 아니냐. 탄탄하기루 말함 불도자루 밀어두 끄덕ㅇ을 집인데." 상국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껌벅였다. "가끔 오는 유 사장이라는 작자. 지가 무슨 목사나 되는 거겉이 믿음이 부족하다는 겨. 낸들 알겠냐마는. 그저 어수선한 게, 강종술이 그놈까지 덩달아 똥 싸문댄 개처럼 설설거리고 돌아치니. 간주라고 주니께 받긴 받었다만... 참 전씨 몫은 본인이 직접 나와야 준다지 아마. 내가 대신 타다 준데도 언눔이 돈 그거 뗘먹을까봐 그러는지, 눈깔 허옇게 치뜨고... 드러워 관두라 혔어." 13. "흠흠. 건 잘한 짓이다. 고가 니눔, 호랭이 아가리에 날고기 물리는 격일텐데. 흣" 상국이 허물없이 웃자 고성만이 싱겁게 따라 웃었다. "망할눔의 인사하군. 내가 이러고 앉았음 전씨야말로 가불도 마다 않고 도둑쳤을걸. 근데 퇴원은 은제 되는겨. 봄 되기 전에 나서야 일 추릴 것 아니겄어." "짜개진 상처야 꿰매면 되고 부러진 뼉다구야 붙이면 된다지만, 흔적두 없는 허리가 문제다. 의사는 걱정 말라고 하더라만 젤 걱정이, 끄응... 이놈의, 디스크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눈발처럼 아내 은숙이 들어왔다. 고성만이 주접주접 일어나더니 꽁무니를 뺐다. 은숙 역시 어쩐 일인지 고개를 틀며 외면했다. 갑자기 서먹서먹해진 분위기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전상국이 둘을 쓸어봤다. "첨 보는 사이도 아닐테고. 고가 니눔은 시방 뭐하는 거냐. 누가 봄 내외하는 줄 알겠다. 당신도 그렇지 들어오다 말고 그게 뭐여? 석배 그놈 하군 영 틀린게 뻣뻣해설랑. 그러고 본게 노가다판 친구라서 빌 기 아니다 이건가 시방. 밸..." 그제서야 둘이 꾸벅 수인사를 주고 받았는데 그러고 나서도 서먹서먹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고성만이 몇 마디 하긴 했는데 건성이었다. 상국이 붙들려 했으나 다음에 오마하곤 쫓기듯 돌아갔다.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상국이었다. "당신도 그럼 안 돼. 알어! 뭐니뭐니 해도 사람 차별하는 것만큼 서러운 것두 없는 법이야. 당신 어째 사람이 그래! 행색이 좀 꾀죄죄하다고 대놓고 면박주는 경우는 뭐여. 누굴 앉히켜 놓고 등신 만들자는 것도 아니고." "이인. 누가 누굴 어쨌다고 야단이래. 자기가 아는 척 안 하는데 그럼 내가 먼저 실실 웃기라도 해요? 당신이야말루 당신 친구만 편드는 거, 사람 차별 고만하세요. 흐응...! 지가 뭐 대단하다구." 은숙이 되레 튀었다. 말이 궁한 상국이었다. "알었어. 고만하자구. 잘잘못이야 따지자면 병원에 있는 내 잘못인게. 건 그렇고, 집안에 돈도 말랐을 텐데 밀린 간주나 받아와. 고성만이 그 작자 거짓말 할 리는 없을 테고, 설만들 명색이 목사고 전도산데 장난질이야 치겠어." "거기 일이야 교회서 하는 게 아니고 사장이 따로 있다고 합디다. 요즘 한창 민선시장 물망에 오르내리는 유태중이란 사람이라지 아마." "누구? 유 뭣이? 당신은 발도 넓구만 나도 모르는 일까지." 은숙이 찔끔했다. 14. 그러나 상국으로선 스치고 지나는 말이었다. "태중인지 몽중인지 어떤 놈이든 알 바 아니고. 우리야 그저 돈만 받으면 될 일인게. 당신이 알아서 받아오라고." 창밖은 이제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 설 정도로 온 천지가 눈으로 뒤덮였다. 어디까지 땅이고 어디까지 하늘인지, 그저 뿌연 눈발만이 흩뿌려 하늘과 땅, 그리고 모든 산들이 아득히 멀어져갈 뿐이었다. 일순. 시간도 사물도 정지한 채, 모든 삼라만상이 깊은 정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세상의 몰락이, 지상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때가 온다면 바로 이러한, 눈 오는 날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올, 그 어떤 유언이나 흔적도 남김 없이, 조용히 저렇게 함몰해 갈 것이라고 믿었다. 시간이 모호했다. 아침인 듯하면서 아침이지 하면 영락없는 오후의 저물녁이었고, 이게 저녁이지 하고 따져볼 양이면 새참 거른 오전 한 때인 듯도 싶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려웠다. 맨날 보아오던 같은 병실의 집안 식구들이건만 생판 처음 대하는 사람같이 낯설었다. 사람들은, 다들 망망대해에 떠 있는 고도처럼, 저마다 침범하지 못할 굳건하고 견고한 영역을 둘러치고는 혼자만의 시간을 지키고 있었다. 꽃가루 같은 눈발을 맞으며 한국이 거리를 가늠하고 있었다. 서툴긴 했지만, 그리고 눈 덮힌 거리가 여전히 생소하긴 했지만 주연실과 약속한 장소가 분명했다. 한국이 어깨를 흠칫하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장관이었다. 희부얗게 내리는 눈. 그 눈만이 온 세상의 전부였다. 여인의 옷자락처럼 휘날렸다가는 나뭇잎처럼 하늘거리는 눈은, 열린 세상의 메시아처럼 야릇한 기대와 흥분을 일게 했으며, 축제의 서곡처럼 경건하기도 해서 그 감정을 어떻게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분명 신비와 경이로움으로 조각된 움직이는 환상의 실체였다. 한국은 누르실 앞으로 난 도랑물을 보면서 하도 이상한 나머지 한시간이고 한나절이고 내내 앉아 지켜본 적이 종종 있었다. 쨀쨀거리는 샘물이 모여 이 큰 물줄기를 맹글었을텐디 어쩜 이렇게 일년을 한결같을 수가 있을까. 설마 다믄 및 초라두 쉬겠지. 눈을 부릅뜨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꼬나 봤지만 도랑물은 한시도 쉬임없이 흐르고, 흘러내렸던 것이다. 저만큼 위에서 흘러오던 물이 이만큼 앞에서 탕탕거리고 지날 때, 종이배라도 띄워 끝없이 흘러가는 물줄기를 망연히 바라보면서, 자연의 위대함과, 그 자연 속에 묻힌 신비로움에 내내 감탄했던 것이다. 15. 어디 그뿐이던가. 바람이라도 조용한 날이면, 그런 물줄기 우론 앞산의 묘둥지가 설풋이 떠올랐고, 그러면 그는 기다란 작대기로 물 위에 떠 있는 그 묘둥지를 건져올리며 힘없이 탄식했던 것이니. 그려... 빌 기 아니구먼. 참말로 속절ㅇ는 기 사람살기여... 버쩍 마른 풀이파리도 이렇게시리 새순이 퍼런데, 잘났다고 떠들면 뭣혀. 영결종천... 히, 그려... 영결종천하면 그질루 종 치는 기 사람 사는겨. 참말로 애들 장난 같구먼. 그리곤 끝없이 흐르는 시간의 물줄기 앞에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돌아오던 한국이었다. 그랬던 것인데, 이렇게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자니 감회 또한 그와 같았던 것이다. 끝없이 내리는 눈발. 하늘 어디에 저 많은 눈고지가 있어 내리고, 또 내리는 것일까. 대지를 덮고, 15층이나 되는 높디높은 아파트를 덮고, 다시 산을 덮고... 하늘 끝 닿은 데까지 뒤덮은 희부얀 눈꽃들... 선택 받은, 축복된 날이라 생각했다. 이런 날이라면 며칠을 굶어도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몇날 며칠이고 이렇게 거리를 뒹굴어도 싫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좋은 날 연실 씨를 만나다니. 그저, 내리는 눈발을 따라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이었다. 그가 뿌옇게 내리는 눈발을 손으로 걷어내며 막 '카페 환타지아'로 들어서려고 할 때, 그보다 한발 앞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건장한 체구로, 모두 둘이었는데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신경 쓸 일이 아닌지라 비켜들어갈려고 몸을 트는데 그 중의 한 사내가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혹시 전한국 씨 아니십니까." "뭐유...!" 한국이 저도 모르게 놀라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곁에 서 있던 다른 사내가 다그치듯 물었다. "전한국 씨. 댁이 전한국 씨가 확실하죠?" "그, 그런디유. 무슨..." "경찰입니다. 서에까지 잠깐 가주셔야겠습니다." 한국의 얼굴이 납덩이처럼 창백해졌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예감이 좋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순순히 따라갈 맘이 아니었다. 역전 파출소에서 골탕 먹은 일도 있고, 무엇보다 안에선 주연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ㄹ겐 못 하겠는디유. 안에서 지다리는 사람두 있구유. 저번에두 꼼짝ㅇ이 잡혔다 상국이 갸한테 직장만 뺏겼는디..." "하안, 내원. 좋습니다. 전한국 씨 당신을 약취유인 및 불법감금혐의로 체포합니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와 불리한 진술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자, 이제 됐습니까." 먼저 사내가 영장을 내보였고, 다른 사내가 수갑을 채웠다. 16. 서늘한 한기가 팔목을 죄었다. 피할 사이도 없이 두 손이 묶여진 한국이 망연자실했다.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서 있는 그에게, 그러나 그들은 남의 일처럼 태연했다. "자. 이래도 못 가시겠다? 뻔뻔스런 작자하군. 뭘 임마 꾸물거려! 빨리 따라와! 너 같은 파렴치한은 법이고 지랄이고 요자리에서 때려죽여야 하는 건데. 민주사회라 법이 좋긴 좋다. 따라와 이 새끼야. 얼릉! 피차 피곤하게 하지 말고." "허허이, 사람. 피의자를 그렇게 함부로 다루면 쓰나. 이렇게 조용히 모셔 드려야지." 곁에 있던 놈이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얼결에 서 있는 한국의 옆구리를 내질렀다. 꺼우러지듯 한국이 주저 앉자 앞에 있던 놈이 히죽 웃으며 겨드랑이를 꼈다. "자자. 사람들 보기도 민망하고, 어서 가자고." 건장한 사내들에게 양팔을 끼인 한국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뒤를 돌아다 봤지만 왠지 모를 서글픈 감정이 눈발처럼 가렸다. 왜 이렇게 끌려가야 하는지, 죄가 있다면 그 죄명이 무엇인지 알고나 갔으면 좋으련만 두 사내는 우격다짐이었고, 말 붙일 여유도 없이 앞길을 다그치기만 했다. 한국이 기를 쓰듯 뒤를 돌아다 봤지만 뿌연 눈발만이 야속하게 쏟아질 뿐, 방금 떠나온 카페의 모습도, 그 카페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주연실의 얼굴도, 모든 게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돌아가야 한다고, 돌아가설랑 잠깐 늦을지도 모른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쇳덩이의 냉혹한 한기만이 팔목을 죄어왔다. 그가 끌려간 곳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쇠창살로 가려진 구치소였다. 사내가 수갑을 풀었다. 그리곤 다그치듯 소리를 꽥 질렀다. "자, 끌러!" "야아...?" "이런 젠장. 허리띠 말염마." 한국이 머뭇거리자 중키의 사내가 대신 한국의 허리띠를 끌렀다. 그리고 나선 호주머니를 샅샅이 뒤지는 게 아닌가. 소지품이래봐야 값 나갈 게 없었다. 통장. 그랬다. 한국이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틀었으나 그자의 손엔 벌써 저금통장과 도장이 쥐어져 있었다. "뭐야 이건. 으흠. 그래. 어디 보실까. 오십만 원이라... 너 이거 어디서 났어? 엉!" "이, 이건..." "아, 아. ㄷ어. 너하구 이런 걸루 노닥거릴 시간 없다. 서 형사, 이 통장은 내가 알아볼테니 이자나 배방하라구." 중키의 사내가 통장을 들고 나갔다. 주연실이 적어준 쪽지가 따르르 떨어져내렸다. 다행히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한국 역시 잡을 수 없었다. 가슴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며 눈앞이 아뜩했다. 천길만야의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17. "전한국 씨. 이런 생활 피차 피곤하니까 제발 조용히 좀 살자고. 응? 뭔 소린지 알겠지? 들어가봐. 다 같은 가족이니까 왕상거리지 말고." 남아 있던 사내가 값싼 습득물을 팽개치듯 암혈 같은 유치장 속으로 한국을 쑤셔박았다. 한국이 곤두박질치며 캑,소리를 냈다. 무언가 물컹하다고 느꼈을 때, 그는 욱 하는 비명을 지르며 또 한번 나뒹굴러야 했다. 누군가의 발길에 채였던 것이다. 끊어질 듯 땡겨오는 하복부를 쥐어뜯으며 백사장에 내동댕이쳐진 붕어처럼 입을 딱딱 벌리고 있는 한국의 귓전으로 노호한 목소리가 쇠못처럼 박혀왔다. "벌건 대낮에 새꺄, 눈깔두 ㅇ냐! 새끼... 등치만 커갖고 넌 느 애비도 안 키우냔 말이다." 눈을 비비고 떴지만 그저 밤처럼 캄캄하기만 했다. 저쪽 구석에서 또 다른 놈이 키득키득 웃었다. "쨔샤. 보아하니 눈뜬 봉사 같수다. 신고식은 담에 받기로 하고 좌석배치나 해 주슈. 키힛...망우통 들이대고 똥간 찾는걸 보니 초뺑이인 듯하오. 소학에 명심보감에...키힛, 너두 으른들 모시고 제대루 된 공부 좀 배워야 쓰겠다." 목소리로 보아 젊은놈인 듯했고, 이죽거리는 투로 보아 행내기는 아닌 듯 싶었다. 그제사 한국이 고개를 들었다. 사람과 사물이 뿌여니 어리 비쳤다. 되박만한 방에 세 명이 보였는데 모두 사복이었다. 그러니까 방금 들어간 한국까지 합쳐 네 명이 있는 셈이었다. 희미해서 잘 보이진 않았으나 창 쪽으로 앉아 있는 놈이 제일 연장자인 듯했고, 목소리도 기중 쇠었다. 방금 낄낄거리며 조롱섞인 농을 걸어온 놈은 그 자의 반대쪽에 앉아 있었는데 연치로 보나 입성으로 보나 그 자보다는 아래인 것 같았다. 그 밑으로 한 놈이 더 있었는데 감방살이 정도는 진작에 통달했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그저 범연했다. 그러니까 창 쪽으로 앉아 있는 늙수그레한 놈이 한국을 걷어찬 놈일 거였다. 그 맞은편에 있는 놈이 한참을 더 뭐라고 흉물을 떨었으나 한국으로선 들어도 알 바 아니었다. 감방은 대여섯이 들어서면 꽉 들어찰 정도로 작았다. 벽체는 회색으로 분칠된 콘크리트구조였고 바닥은 송판으로 짜여진 마루였다. 고개를 들었으나 내다볼 빤한 구멍 하나 보이지 않았다. 겨울인데도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창 쪽에 있는 늙다리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었는데, 이불을 들썩거릴 때마다 질식하리만치 역겨웠다. 더구나 한국이 일어나보니 하얀 물체가 반짝했는데, 도시 이게 무얼까하여 판자로 된 뚜껑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변기통이질 않은가. 18. 변기통을 깔고 앉은 꼴이었으니 악취가 심할 건 당연했다. 다행히 역겨운 악취는 시간이 지날수록 없어지는 듯했다. 대신 썰렁한 한기가 오금을 박았다. 한순간 구치소 안이 조용했다. 용궁에 끌려간 토끼란 놈, 달 쳐다보는 신세로 무릎에 턱을 걸고는 으스스 떨고 있던 한국이 어깨를 오싹 움츠렸다. 공포였다.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길을 놓쳐 산 속에서 한밤을 지새웠던 일이 어렴풋했다. 어릴 적 기억이었으니 어지간히 오래 묵었다. 세월이 지날수록 공포만이 또렷해지는 그 날밤의 그 무섭고 전율하던 기억을, 이런 데서 떠올리다니. 어느해던가. 가을이었을 게다. 그때만 해도 가난이 질병처럼 번져 있어, 아무리 떵떵거리며 사는 집이라도 한 끼 정도는 죽으로 때워야 했다. 어찌보면 산다는 것 자체가 식량을 구하는 일이 전부라 할 정도로 생활은 척박했고 단순하기도 하던 세월이었다. 오곡이 들판에 그득한 대가을판인데도 허리끈은 여전히 풀어질 줄 몰랐으니, 거지도 풍년거지가 더 섧다는 말이 새삼스러울, 그런 때이기도 했다. 새밭에서 화전민으로 지내다 쫓겨내려온, 이 씨네 작은 아들 동교란 녀석과 집을 튀었다. 녀석은 동생 상국과 동갑내기였으나 이사 온 지 얼마되지 않아 외톨이로 돌았고, 한국 역시 칠칠찮아서 그랬던지 제 또래와는 어울리지 못하고 동생뻘되는 아이들과 엄배덤배 묻어 지내던 처지였다. 개밥에 도톨이 꼴로 겉돌던 그들이었던지라 자연 둘은 친하게 되었고, 그날도 다래덩굴이나 뒤지자고 집을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손금보다 훤하던 산길이 그날따라 어수선했다. 무작정 큰산 허리만 붙잡고 따라든 탓도 있겠으나 새참으로 훔쳐 먹은 술찌개미가 화근이었다. 실실 졸리는 하품을 입에 물고 얼마간 따라갔을까. 졸졸 흐르는 냇물이 하얀 끄나풀처럼 바위틈 사이에 걸려 있고, 치렁치렁한 다래덩굴이 대청마루처럼 시원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란히 누웠다. 까무룩이 잠이 들었었나보다. 삭정이처럼 누워 있는데 뱃가죽이 서늘했다. 팔베개를 하고 있던 손을 풀어 배를 쓸어덮으려는데 무언가 물크덩하고 만져졌다. 이상하다 싶어 눈을 번쩍뜨던 동교란 녀석이, 대경실색하여 으으악! 하는 비명을 지르면서 산 밑으로 내리 구르는 게 아닌가. 19. 개바닥까지 굴러떨어진 녀석이 펄쩍펄쩍 뛰면서 울대를 더듬는다. 그리곤 휴우, 하는 기인 한숨을 토했다. 후둘후둘 떨면서 올라오는 녀석의 이마에선 식은 땀이 비 오듯했다. 미련 곰퉁이 한국은, 그때까지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으니. 근처에까지 다가간 녀석은 어찌나 놀랐던지 그저 멀찍이 서 있을 뿐 더 이상은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녀석이 긴 작대기를 꺽어들더니 한국을 쿡쿡 쑤셨다. "야아... 항국아. 하앙국아... 이...일어나야. 얼릉!" 작대기에 얼만큼을 시달린 한국이 눈을 떴다. "야안. 왜에?" 녀석이 비칠거리며 또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왜 그래냐니깐. 니 어디 아프나?" 한국이 이상하다는 듯, 재쳐 물었으나 녀석은 말없이 방금 누워있던 자리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드응신." "가...가자. 얼릉. 얼릉 일어나야." 그러고 보니 해가 떨어졌다. 깊은 산 속의 해는 숨을 곳도 많던지 잠깐 존 것 같은데 벌써 없어졌다. 그렇다고 그냥 가자니 머리 위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다래가 너무나 아까웠다. "요거 한 덤불만 따먹구 가자. 참말루 오지다. 일루와 한 움쿰만 꺽자는데두." 그러나 녀석은 굿판에 대잡이처럼 후닥닥 뛰었다. 한국이 못내 아쉬운 듯 자꾸만 뒤돌아보며 녀석의 뒤를 따라갔다. 녀석의 신발 뒷굽이 한국에게 밟혔다. "배앰...뱀이, 이따만..." "뭐어? 뱀!" 녀석이 바위를 깔고 앉았다. 한숨을 다시 후욱, 하고 내쉬더니 가위눌린 놈처럼 더듬거렸다. "뭔가 물컹하길래 봤더니 이따만 뱀이...바루 여기, 맞어. 바루 요 턱 밑에서 샛바닥을 낼름거림서...증말여... 허연 기 이따만 혔었다니깐. 아휴... 가자 얼릉." 그리고 나서 길을 찾는데 아무리 찾아도 집으로 가는 길이 설었다. 한 녀석이 이쪽이다 하면 다른 녀석이 저쪽이다라고 우겼다. 한참을 가다보면 아닌 것 같았고, 두 갈래 길에선 싸우기도 지쳐 가위바위보로 갈랐다. 그랬으니 길은 갈수록 틀려만 갔다. 더구나 산은 겹산이어서 한번 홀리면 어른도 빠져나오기 힘든 산길이었다. 허둥대다보니 밤은 쉽게 다가왔고,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산그늘이 삽시에 칠흑으로 변했다. 칠흑 같은 어둠. 암벽과 숲과 가시덤불과, 그리고 평지처럼 널려있는 단애와 함정들... 산짐승이 울었다. 20. 그들 역시 배고픔과 무섬증을 참지 못해 울었다. 걷다보니 커다란 바위가 나왔다. 둘이 쪼그려 앉아있을 만한 공간이 보였다. 자고 있던 산토끼를 쫓아내고 들어앉았다. 처음엔 울었지만 나중엔 졸렸다. 잠을 깨고 나면 으스스한 한기와 공포가 밤별처럼 하얗게 쏟아졌다. 반짝이는 별이 무서울 때가 있다니... 지나온 길이었으니 돌아갈 길 또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길은 언제나 두서너 개의 난맥이었고, 눈으로 보기엔 그 길이 그 길 같았다. 하나의 길만을 고집하여 끝까지 따라갔었더라면 그곳이 어디건 다다랐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들에겐 고집할 만한 그 어떤 확신이나 믿음도 없었고 계시도 없었다. 허둥대다보니 어둠은 깊었고, 길도 끊겨졌다. 이튿날 아침 동네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들은 다음날도 산짐승처럼 그렇게 울부짖으며 산속을 헤매고 다녔을 것이다. 한국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구치소 안이, 그때의 그 동굴과 너무나 흡사했다. 춥고 배가 고팠고, 무엇보다 심한 정적과 그 정적 속에 배어있는 공포를 참을 수가 없었다. 한국이 불려나간 건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나간 뒤였다. 수갑이 다시 채워졌다. 서늘한 한기가, 그러나 구치소 안보다는 차라리 편했다. "뭐요! 증거가 이렇게도 확실한데, 뭐가 어째요! 단순과실? 이 냥반아, 지금 누구한테 눈가리고 아웅하자는 거요!" 사복경찰의 호송을 받으며 한국이 어떤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어수선하기 그만이었다. "아, 글쎄 그게 고의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작위적으로 일어난 일도 아니라니까요. 좀 전에도 설명드렸다싶히 우연찮게 그곳에 갔던 복지원 직원이 그만 실수로..." "실수? 허어...야. 이거 허파가 뒤집혀서. 그래 천리를 마다하고 아들네 집에 놀러온 노인네를 마구잡이로 끌고가선 노역에 혹사시켰는데도 실수란 말이! 당신들 그놈 원장하고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소. 좋아! 내, 샅샅들이 파헤쳐 어느 놈이 유치장에 가나 봅시다." 두툼한 오버차림의 40대 정도 되는 사내가 책상을 쾅쾅 울리며 삿대질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 기세가 워낙 험악했으므로 그자 앞에 서 있는 경찰관이 내내 다독이는 시늉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한국으로선 그 기억을 더듬을 만한 여유가 있지 못했다. 단지 경찰관 앞에서도 저렇게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21. "고발장이 정식으로 접수되었으니까 저희로서도 최선을 다하여 사실확인에 주력하겠습니다. 범법사실이 드러날 경우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형사처벌로 다스릴 각오입니다. 그러니 저희들만 믿고 가 계십시오. 부조리 척결 차원에서 저희들도 내사를 계획하고 있던 중입니다." 경찰관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길길이 뛰기만 했다. "것 보시오! 내가 그런 감언에 넘어갈 성싶습니까. 역전파출소에다 내 아버지가 이러이러해서 신고를 한다니까 뭐랬는지나 아시오. 다 죽어가는 노인을 어디에 쓰려고 납치를 하느냐고, 외려 느물느물 비웃으며 호통입디다. 그때야 내 뭐가 뭔지 몰라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지만, 흐흥...! 내오늘은 기어이 규명하고야 말거요! 어느 놈이 유치장에 가나 두고 보자는데두!" 사내와 경찰이 얼마를 더 그렇게 대치했다. 그동안 내내 조사실 안은 난리법석이었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사내가 제풀에 지친 듯, 경찰의 안내를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어이, 누구야! 저놈이야. 골치 아픈 자식! 황 형사! 빨리 조서 꾸며 검찰로 넘겨버려." 별도의 테이블에 멀찍이 떨어져 앉아있던 자가 멀뚱거리고 서 있는 한국을 보자 울컥 화부터 냈다. 그리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거기 대양이죠? 건 아실 것 없고, 방 실장 있으면 좀 바꿔줘요. 그래요. 서요!" "그런 인사치렌 다음에 하기로 하고, 대체 어떻게 된 거요? 복지원에서 탈원했다는 노인 말이오. 글쎄, 손을 쓴다는 말이 언제적 얘기냔 말이오. 제발 우리도 좀 삽시다. 이래 가지구서야 어디 하룬들 편하겠소. 그자 아주 보통내기가 아닙디다. 우리도 두 손 들었소. 어찌나 독한 놈인지 소쩍새 모가지에 피 내먹을 놈입디다. 그래요. 방금 나갔소." "아무튼 일 커지기 전에 합의를 봐요. 자딸게 놀지 말고 좀 쓰라고 해요. 두 눈 딱 감고 뭉턱 집어주면 깨끗하게 해결될 걸 가지고. 그래요, 믿어봅시다. 뭐요? 크흣...! 사람하군. 그럽시다. 주위 시선도 있고 하니 일 끝나는 대루 한잔 합시다. 크흐흐...! 예이끼 여보슈! 농담 그만하고... 애가 진국이긴 합디다. 그럽시다 그럼." 그자가 입맛을 쩝하고 다시더니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그리곤 출장이라며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전한국에 대한 피의자 신문이 시작되었다. 그를 맡고 있는 담당형사는 뚱뚱한 편으로 말이 없었다. 그래서 무뚝뚝하게 보이기도 했다. 황 형사이라고 불리운 자였다. "성명!" "네에...?" "이름 말야." "전, 한국인데유." "성은? 이름이 한국이면 성씨도 있을 거 아냐!" 22. "전..., 한국이라니까유." "주민등록 내봐." "으, ㅇ는데유." 이렇게 시작된 신문조서가 순탄할 리 없었다. 첫장을 넘기는데만 해도 20여 분 이상이 소요되었다. 짜증을 낼 법도 한 담당형사였건만 처음이나 끝이나 똑같았다. 그가 용지를 갈아끼우며 한국을 건너다봤다. 한국이 얼른 고개를 숙였고, 그자의 표정이 안쓰러이 일그러졌다. 한국이 고개를 숙인 다음이었으며,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해도 얼핏 스쳐간 표정이어서 눈에 띄지는 않았을 것이다. 용지를 다 갈아끼웠건만 그자는 그냥 팔짱을 끼었다. 타이핑을 할 자세가 아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그가 웅얼거렸다. 지극히 무뚝뚝하고 사무적이었다. "자넨 무슨 죄를 져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고 있겠지. 아니 모를지도 모르겠네. 구속영장대로라면 형법 제288조의 약취유인에 관한 죄, 그리고 동법 제276조 사람을 체포, 감금한 죄이네. 보아하니 자네도 이런 곳엔 처음인 것 같은데, 피차 인간적으로 대하자고. 자 담배 한대 피울라나?" 한국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사실대로만 대답해주면 되네. 다만 형사소송법 제200조2항의 규정에 따라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네. 이건... 좋아, 자네에게 불리하다고 인정되는 진술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지. 그렇다고 무턱대고 거부만 한다고 능사는 아니네. 진술을 하지 않는 것이 진술을 하는 것보다 더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은 있는 것이고, 그 불리한 결과가 어디에서 초래될 것인지는 우리도 모르네. 그러니까 사실 그대로 말해주면 자네에게도 유리하고 우리도 편한 것이지. 알겠나? 내 말 뜻이 어디에 있는지." 담당형사가 기지개를 켰다. 그리곤 하품을 길게 물더니 손가락을 꺽어갔다. 한국이 멍했다. 죄목을 읽어줘도 그게 무슨 죄인지 알 수 없으니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지가 뭔 잘못을... 전 아무 잘못두 한 기 ㅇ는데유. 우째자고 에무한 사람을 뭣땜시 이ㄹ게 개맨키 홀치킨데유." "뭐야! 죄가 없어?" "그려유. 진 도둑질헌 일두 ㅇ구 그렇다구 무고헌 사람 해꼬지한 적두 ㅇ구먼유. 참말여유. 그짓말인지 아닌지는 갸 상국이, 그려유 시상사람 아무한테나 물어봐유. 지인...흐윽...!" 울멍거리던 한국이 눈물을 뿌렸다. 23. 살아 생전에 며느리 얼굴이나 보고 죽는 게 소원이라며 오늘이나 내일이나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가 보였다. 말 한마디 없이 종적이 묘연한 자신을 욕지거리로 탓하고 있을 병상의 상국이 보였다. 그러나 연락할 방도란 없는 것이다. 연락이 된다 해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이 붙잡혀온 사실을 아버지가 안다면 한국이 저보다 더 섧게 목 놓아 울 것이다. 상국에게 연락이 간다면 앉은자리에서 까무러치고 말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혼자 있는게 마음 편할 일이다. 한여름밤 도깨비불을 좇아가다 아주 낯선 곳에 다다랐을 때처럼 그저 막막했고 두려웠다. 우시장에 끌려간 젖빨이 송아지의 심정이 되어 울먹이자니 눈물이 나왔고, 한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자 그만 복받친 설움이 울컥 솟구친 것이다. 울어야겠다고 운 것이 아닌데 울다보니 조금은 편한 것도 같았다. 섧디섧게 우는 한국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담당형사가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자자, 그만! 그만 거둬. 물먹은 놈이 소금 들이킨다고 찔리는 데가 있긴 있는가보구만. 다 큰 사람이 낫살이나 먹어 가지고. 쯔읏...! 그만 거두라니까!" 한국이 눈물을 딸꾹질로 훑어내며 숙인 고개를 더욱 숙였다. "자네 전과 있나?" 한국이 눈자위를 들어가지고 그 형사를 쳐다봤다. "전과 있냐니까. 빨간줄, 호적에 별 단 적 있냐고?" 한국이 코를 팅 풀며 고개를 저었다. "훈장이나 포장 받은 일은?" 한국이 전처럼 또 그랬고, 형사가 답답하다는 듯 담배를 꺼내 물었다. "상 받은 일 있냐고. 흔해빠진 개근상 따위는 말고." 한국이 고개를 다시 저었다. 형사가 라이터를 그으며 휑하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젊은 직원이 따라 일어선다. 아주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선배님, 요상하십니다. 설마 조번처럼 또 저한테 떠넘길 생각일랑 아예 마십시오." "볼일이다." "예에? 해필 요 시간에, 또요?" "그렇다니까. 월급쟁이 20년에 아파트도 내 집이라고 장만해 놓고 보니 젠장... 화장실이냐고 변을 볼 수가 있어야지." "집들이한 지가 언제 됐다고 벌써 말썽입니까?" 24. "화장실이 말썽이 아니라 내가 말썽이지. 변기냐고 있는 게 높기만 죽실나게 높아선... 나 겉은 재래종은 좌변식이고 와변식이고 다 필요 없고, 그저 쪼그려 앉아야 편한 건데." 젊은 형사가 그제서야 뭔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피의자 신문은 길었다. 덕분에 자장면으로 포식을 하긴 했지만, 그 긴 자장면발만큼이나 조서는 길었다. 이젠 끝났구나 싶었을 때는, 질문하는 담당형사나 거기에 떠듬떠듬 대답하는 한국이나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한국이 졸리운 듯 눈을 비볐다. 형사가 부성부성한 얼굴로 하품을 물며 주섬주섬 서류를 챙겼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나?" "정말이지 전... 전 죄가 ㅇ는데유. 이잔 집이루 보내주는 거지유. 야아?" "죄를 졌음 그만한 벌을 받아야지. 초범이고 하니 정상이야 참작 되겠지만 그건 판사가 알아서 할 일이고, 참 어디로 연락해주면 되겠나?" "그럼 못 나간다 이건가유!" "알았어. 연락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자, 나가자고." 형사가 한국을 일으켜 세웠다. 한국이 막무가내로 뻗대었고, 형사가 완력을 썼다. 철컹하고 구치소 문이 열리며 한국이 팽개치듯 수감되었다. 그때 밖이 어수선했다. 환한 보안등 아래 누군가 끌려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한국이 눈을 끔벅거리며 쇠창살에 붙었다. 수갑이 채워진 채 끌려들어오고 있는 자는 대양복지원 관리실에 있던 송 주사와 따개눈이었다. 무슨 상이라도 받으러 오는 걸로 착각했던지 그들은 아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거드름까지 피웠다. 누가 보더라도 잘못을 저질러 붙잡혀오는 죄수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북망산천에 가서도 고향까마귀라면 반갑더라고 그것도 같은 직장 동료라고 만나고 보니 반가운 한국이었다. 한국이 벌떡 일어나며 아는 체를 하려다 그만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이 차고 있는 수갑 때문이었다. 손목을 흔들 때마다 보안등 불빛이 거울처럼 일렁거렸고, 그럴 때마다 수갑에 부대낀 빛조각이 예리한 비수처럼 한국을 눈을 찔러왔던 것이다. 수갑이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니 차마 먼저 아는 체를 할 수가 없었다. 한국이 슬몃 그늘로 피했다. 호송경찰 둘이 저희들끼리 무어라 수군거리더니 그들을 방을 달리하여 수감했다. 이튿날 아침, 피의자신문조서를 훑어가던 과장이 담당형사를 불렀다. 25. "자네 이거, 이것두 조서라구 꾸몄나!" "무슨..., 잘못된 곳이라도 있습니까. 전 그저 피의자가 진술한 대로 기록했는데요." 과장이 아주 못마땅하다는 눈치였고, 담당형사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수사지침이라는 게 있지 않나. 이 사건은 처음부터 단순과실로 매듭짓기로. 그런데 이 조서를 볼 것 같으면 단순과실이 아니라 대양복지원 측의 사전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진, 전한국 이놈은 그저 하수인에 불과하지 않나. 아무리 얼간이 등신이래도 그렇지, 그래 황 형사 자네 같으면 이 조서를 곧이곧대로 믿겠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약취유인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복지원에서 시키는 대로 노인을 차에 태웠을 뿐이다. 태우고 와서 보니 죄가 되더라. 아니, 이 조서대로라면 아직도 그게 죄가 되는지도 모른다 이 말인데, 자네가 검사라면 이런 조서를 믿을 것 같은가 이 말이네." "만나보시면 알겠지만 사실입니다. 그자는 그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시끄럽네! 조서란 무엇보다 증거자료에 근거한 신빙성이 있어야 하고 누가 보더라도 그러리라는 개연성이 있어야 된다는 건, 실무자인 자네가 더 잘 알 거 아닌가. 그런데 이게 뭔가! 당장 새로 받도록 하게. 방금 전에 연락 받기론 피해자 측과는 합의를 봤다니 달리 문제될 건 없을 테니 안심하고. 에또... 주범 전한국을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은 단순가담에 불과하니 조서만 꾸미고 방면토록 하라는 서장님 지시가 계셨네. 신원보증은 복지원에서 책임지기로 했으니." 형사가 과장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자네 나한테 무슨 불만사항이라도 있나? 물론 나 역시 공평치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네. 그렇다고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어차피 이번 사건은 누군가의 희생이 따라야 하네. 그놈들 셋을 모조리 다 구속시킬 수도 있겠지만 상부의 뜻이... 자자, 이런 일 한두 번 당해봤나. 전한국이란 놈에게 모든 걸 덮어씌우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단순과실로 처리하자는 것이니. 어쨌건 이래 갖곤 안되니 다시 작성하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결국 전한국은 두 번에 걸쳐 피의자신문조서를 받게 되었고, 그 두 번째 조서를 받으면서야 겨우 자신이 무슨 죄를 범하게 되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구치소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이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따돌림당하고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이 눈을 감았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난생 처음 맞이하는 낯선 도시에서의 겨울은 다른 어느 때보다 춥고 길게 생각되었다. 10. 동천(冬川) 박제된 신들의 절규 1. 바람이 분다. 차고 매운 바람이 북서풍이다. 늑대의 울음소리 같은 바람이 일어설 때마다 야합이라도 하듯, 희다 못해 눈부시기까지 한 눈발이 유혼처럼 떠돈다. 멀리서 보면 비단폭처럼 고운 눈보라가, 그러나 을씨년스럽고 황량할 뿐이다. 바람을 등지고 서 있던 김석배가 손으로 얼굴을 부빈다.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고개를 숙인 채 서성이기를 벌써 몇 시간째인지 모른다. 다시 고개를 들어 버릇처럼 허공을 바라다본다. 눈보라 끝에 떠 있는 반구의 안테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하고 질긴 거미줄의 전파망이 너울거린다. 바람이 또 불고, 김석배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숙인다. 잠바깃을 여민다. 어망처럼 촘촘하고 튼실한 거미줄이 자신의 온 몸을 덮쳐오는 것만 같다. 저놈의 거미줄...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석배 자신을 향해서 날아내리는 것 같고, 도저히 저 그물에서 피해 갈 수 없으리란 불안감이 앞선다. 다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노려본다. 안테나가 떠 있고, 회색의 건물이 짐승처럼 버티고 있다. 들어가야지. 그래, 내겐 아무런 죄도 없다. 누구를 살해한 적도 없고, 도저히 그런 끔찍한 생각을 가져본 적도 없다. 마음은 눈발처럼 결백하며 누가 뭐라고 해도 생활은 떳떳했다. 성실하게 일한 것이 죄라면, 개미들은 더 이상의 봄나들이를 포기해야 할 것이며 밤나무골의 어린 다람쥐는 자신의 굴 속에서 겨울을 묘지로 묻어야 할 것이다. 좀더 잘 살아보자고 하는 욕망은 있었으나 타인의 전대를 담보로 하진 않았으며, 내일을 끌어다 쓴 적도 없다. 그저 그날 하루에 충실했을 뿐이며 벽에 걸린 가격표대로 살아왔을 뿐이다. 그런데도 호출이라니. 죄될 짓이란 이렇게도 없는 것인데 무작정 나와서 진술하라니. 김석배가 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흐르는 눈보라 속을, 그러나 아주 천천히 걸었다. 경찰서 정문이 뿌옇게 어룽져 왔다. 힘없이 뚜억뚜억 걸어가던 그가 멈춰 섰다. 한참을 멈칫거리더니 처음 서 있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이곳에 온 몇 시간 동안을 그는 줄곧 경찰서 정문 앞과 길 건너를 그렇게 서성이고 있었다. "사장님, 사장님을 찾는 전환데요." "전화...? 어디서?" 연실은 아닌가보다. 그녀였다면 종업원들이 먼저 알아서 '사모님'이란 호칭으로 아부를 떨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엊그제 밤에 만났던 회원 중에 누군가겠지. 뻔질나게 찾아오던 상국이란 놈은 저 지경으로 병원에 갇혀 있으니 그놈이 아닐 건 뻔한 터, 하고보면 전화 올 데라곤 '28회' 회원 중에 하나일 것이다. 참으로, 짓궂은 놈들... 2. 처음 모일 땐 이발사들의 모임이라 해서 '284모임'이라고 했던 것이 회원 숫자가 늘고부터 '모임'이 '회'로 되었고, 4자란 기피하는 글자이기도 하겠고 회원수도 28명이니 부르기도 좋고 의미도 심장한 '이팔'로 바꾸자고 하여 단 한명의 반대도 없이 '28회'로 개명되었다. 회비는 회원들이 염출했다. 두 달에 한 번씩 있는 정기회는 회원이 돌아가면서 회주를 맡도록 되어 있었는데 소요경비는 회비로 충당하고, 회주는 단지 자리만 만들어놓기로 되어 있었다. 엊그제가 바로 그날이었고, 김석배가 회주 차례였다. 더구나 피할 길이란 없는 것이, 주연실과 약혼식하고는 처음이어서 회원들 모두가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명색이야 회원의 친목도모라고 하지만, 그야 어느 회 어느 모임에서나 다 있는 허울이니 굳이 내세울 일도 아닌지라 김석배의 약혼사실만이 회의장 전면에 에드벌룬으로 띄어져 있었다. 회주가 주빈인 셈이었다. 유일하게 남아있던 청일점이 깜부기 진다하여 대구 김석배에게로만 술잔이 돌았다. 회원 한 사람씩만 따라주어도 스물하고도 일곱 잔이 남았다. 도저히 감당 못 하겠노라고 한 손으로 내저으면 거푸 다섯잔이 몰렸고, 두 손으로 사래를 치면 벼락불에 콩 튀듯 열 잔이 쏟아졌다. 그러잖아도 허약한 주량인데 잔술이 말술로 닥치고보니 그저 앞이 아뜩해지는 김석배였다. 건배라 해도 '노털카'라고 우격다짐인 마당에 축배라는데 물릴 장사 있겠나. 술판에서 놀아나다 칠성판을 지고 가는 한이 있어도, 이 김석배 뭔가 보여주겠노라고, 그러잖아도 한잔 술에 잔뜩 부어오른 간덩이를 어루고 훌치는 막된 갱기였으니. 천장에선 별똥이 말똥거리고 마른 방바닥을 게헤엄으로 허우적거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런 판에 심술 고얀 놈이 있어, 술안주엔 버들콩이 최고라며 창부까지 들어앉혔겠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주무르다 터져봐야 물바가지밖에 더 뒤집어쓰겠냐며 천지방으로 휘젓다보니 어쩐지 썰렁한 한기더라. 괴이하다 싶어 혼미한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어허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귀신이 곡을 해도 눈물을 흘리고, 도깨비가 요망을 떨어도 대추나무는 서 있다는데, 이건 흔적도 없이 감감했으니. 그 많던 좌중은 땅으로 솟았나 하늘로 꺼졌나, 술판은 간 데 없고 얄궂은 침대방에 김석배 저 혼자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지 않은가. 눈을 씻고 봐도 그렇고 허벅지를 꼬집어봐도 그렇다. 더욱이 요상한 일은 걸래 같은 옷가지를 부둥켜 안은 채 찔찔 짜는 계집이 곁에 있지 않은가. 눈여겨 보니 어디선가 많이 본 듯도 한 얼굴. 그러나 종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튀고 말았으니. 흐으, 드러운 꿈... 그려 난쟁이 이로의 말대로 거 뭣이냐. 옳거니! 일장 여름몽... 그려 인생은 더도 말고 덜도 없이 일장여름몽이여. 백 번 들어도 지당하신 말씀이구먼. 고 말이. 생으로 죽을 목숨이 아닌디 일찌감치 가부리다니... 애까운 목숨이여. 술이 덜 깬 상태였던지라 그냥 잤고, 푹 퍼진 햇살이 눈보라로 뒤흔들어서야 겨우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다. 3. 기억은 그것뿐으로, 집에 돌아와서도 하루 종일을 잠으로 뒤척였다. 자면서도 어젯밤의 꿈인 듯 곁에서 훌쩍거리던, 여자에 대한 기억이 느끼하게 남았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는, 그리고 그 감정이 별로 좋지 못했다는, 그래서 구역질이 날 정도로 혐오스러웠다는 느낌만이 막연하게 들 뿐이었다. 술판에서 벌어진 일이라 자리 깔고 목침 벨 일도 아니었다. 어제 하루가 지났고, 아침이 되었다. 출근하고보니 전화란다. 종업원이 바꿔주기로는 제법 친근한 척해서 저지난 밤의 그 못된 심술보이거니 했던 것이다. 싸가지 없는 놈들, 어느 놈인지 걷어들리기만 하면 뺨아리부터 후려팰 판이라고 벼르며 무심결에 받고 보니, 경찰서라 했다. 조사할 게 있으니 불편하지만 잠깐 나왔다 가라는 거였다. 몸이 불편해서 그러니 가지 않으면 안 되냐고 그랬더니, 이 양반이 이거 뭘 잘 했다고 까부냐며 당장 출두하라고 호통이었다. 그러마 하고 전화를 끊고보니 참으로 맹랑했다. 이건 한두 번도 아니고 벌써 몇 번째인가. 내가 결백하다는 건 저희들이 먼저 알 일. 그런데도 툭하면 용의자로 지목하여 출두하라니. 혐의가 있다면 칼국수 먹으로 자주 드나들었다는 사실뿐이잖은가. 그것도 죄가 된다면 할 말이야 없겠지만, 생사람 잡는 것도 유분수지 걸핏하면 참고인 진술이라니. 하지만 아무리 결백하다해도 경찰서 근처에만 가도 다리가 떨리고, 조사실이란 곳은 들어가기도 전에 오금이 저렸다. 김석배가 걷던 발길을 멈추며 얼굴을 훔쳤다. 무엇을 결심했던지 결연한 빛을 띠곤 경찰서 정문을 향해 걸었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찰서는, 그래서 그런지 썰렁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김석배가 들어가자 안내실에 있던 초경이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그냥 볼 일이라고 대답하자, 그 역시 턱짓으로 가리키는데 민원실이었다. 초경이 가리키는 민원실을 비껴올라가니 수사과였다. 도둑고양이 담을 넘듯 출입문을 살며시 열자 사무실 안은 때 아닌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수갑이 채워진 채 죽은 듯이 앉아 있는 사람에, 내가 무슨 잘못을 졌다고 이 난리냐며 삿대질로 항의하는 사람에, 이혼했으면 고만이지 뭔 지랄로 예까지 찾아왔느냐며 드잡이질로 엉겨붙어있는 여자들도 보였고, 더욱이 놀라운 광경은 먹물옷을 입은 승려가 항변하는 모습이었다. 머리가 유리구슬처럼 반질거리는 그 승려는, 아주 참기 힘든 억울한 일을 당했다며 펄펄 뛰고 있었는데, 어눌히 내뱉는 그의 말은 대충 이러했다. 4. "누구는 대도무문이라고하나 도는 문이니 대도는 대문이라. 지옥과 극락, 사바와 도리, 아귀축생 성문연각으로 나뉘는 문이 확연하고, 색계와 무색계의 구분이 엄연하니 육도윤회가 범보다 무서운 것을..., 법이 이러함에도 옥석을 가리지 아니하고 한 쪽만을 편듦은 소아에 집착한 편협한 소이라. 어찌 현 정권은 매사에 불자들만 옭아매어 핍박하려드는가. 제 종교가 중하면 남의 종교도 귀한 줄 알아야지. 변했음이야... 본래의 예수님이 어디 그러했던고... 이런 말을 하는 석가도 변했음이고. 쯔읏... 나무관세음보사알..." 불탄절 날, 절이 불에 탔다고 했다. 개신교의 광신자가 저지른 방화임이 분명한데도 증거불충분이라며 차일피일 미루기를, 계절이 두 번 바뀌고 해가 바뀌려는 지금까지도 소 죽은 귀신이라 했다. 어느 교회가 불에 탔으면 벌써 난리법석을 떨었을 거라며, 이게 다 차별에 근거한 종교정책의 단면이라면서 장삼자락을 펄럭였다. 하여튼 이런저런 사람들로 하여 사무실은 어지간히 북적거리고 어수선했다. 문을 연 김석배는 자연스레 그들 틈에 끼어들 수 있었다.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았고 이상해 하지도 않았다. 주뼛거리던 그가 가장 점잖게 생긴 명패 앞으로 다가갔다. 옆자리에선 얼굴이 흠하게 일그러진 따개눈이 조서를 받고 있었는데 거기까지 신경쓸 계제가 아니었다. "그럼 댁이 김석배 씨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만..." "좋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기관원인 듯한 자가 자리를 안내했다. 김석배가 앉았고, 책상 위에 놓인 판유리가 차갑게 어른거렸다. 무연히 고개를 숙인 김석배의 얼굴이 책상 위에서 판박이 되었다. 창백하고 핼쓱한 얼굴이 죄없이 수척했다. "피해자로부터 소장이 접수되었습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시면 됩니다. 자 그럼 시작할까요?" "무슨...소장이라면...?" 김석배가 의외라는 듯, 흠칫 놀란다. 이제껏 자신은 경찰에서의 호출명령이, 지난 번에 있었던, 칼국수를 전문으로 하던 분식점 주인 여자의 피살건에 관한 참고인 진술이려니 했었는데, 와서 보니 그게 아닌 성싶었다. "소장이라면, 고소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김석배가 몸을 부르르 떨며 사복 경찰리를 쳐다본다. 홀타를 뒤적이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경찰이 입맛을 쩝 다셨다. "어제그저께,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서 11월 23일 17시 50분 경 흑산옥에 가신 적 있습니까?" "도대체 무슨 일로 이러시는지... 제가 요 근래에 사무실 이전을 하는 바람에 대접이 소홀했던 건 사실입니다만..." 5. "이 양반이 이거. 지금 당신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본의가 아니었습니다만, 어쨌건 죄송하게 됐습니다. 앞으론 각별히 모시겠습니다. 그러니 요번만은 좀..." "이 사람이거 뭔 소리야! 글쎄 엊그제 이팔횐지 삼팔 따라진지 하는 모임에 참석한 적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면 그렇다 아니면 아니다, 둘 중에 하나만 대답해요! 참석한 적 있습니까!" "네에. 제가 회주여서 모임을 주선했습니다. 그런데 그게...무슨 불온한..." "아아, 됐습니다! 참석한 사실이 있다 이 말씀이지요. 좋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경희란 여자를 만난 것도 사실입니까?" "...!?" 김석배가 고개를 번쩍 처들었다. 경찰리가 치고 있던 타이프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술집 아가씨 말입니다. 이경희라고 하는." "어렴풋하긴 합니다만, 웬 아가씨가 곁에 있긴 있었습니다만. 그게 무슨..." "죄가 되냐?" 김석배가 경찰리를 노려봤다. 술집에서 술시중 드는 아가씨를 곁에 앉힌 게 무슨 엄청난 죄가 된다고 이렇게 닥달하느냐는 식의 눈초리였다. 하지만 밖에서 몇 시간을 얼려 지냈던 탓인지 입술이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 "뻔뻔스런 작자하군. 그리고 나선 어딜 갔었어?" 경찰리의 얼굴이 흉악할 정도로 일그러지면서 꽥 반말로 나왔다. '어디로 갔었느냐'는 호통에 무단히 가슴이 졸아드는 김석배였다. 아무래도 단순한 시비사건이 아닌 듯했다. 개인의 사사로운 치정이나 파헤치자고 생계에 바쁜 시민을 오라 가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죄를 지은 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앞서자 막연히 불안해지는 김석배였다. 그렇다고 암암리에 사건의 전말을 되짚어 봤지만 이렇다할 뚜렷한 잘못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김석배가 경찰리를 다시 쳐다봤다. 불안하고 초조한 눈빛이었다. "우리도 어지간만하면 그냥 덮어둘려고 했었어, 알아! 나두 남자고 술꾼이래서 역성들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술집에 있는 여자들에게 성폭행이란 게 가당키나 하겠어. 근데 이건 해도해도 너무했더라고. 아무리 술집여자라지지만 나래도 그 지경으로 당했으면 가만 있지 않겠더라고. 자, 우리 남자들끼리니 시원하게 탁 터놓고 얘기해보자. 그 여자 옷은 왜 찢었어?" 김석배가 전기 먹은 뱀장어처럼 흠칫했다. 다그치듯 쏘아붙이는 경찰리의 반말 때문이 아니었다. 6. 성폭행이라니! 자신의 귀를 의심했지만 경찰리는 분명 성폭행이라고 말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신문지상의 사회면에 단골메뉴로 오르내리는 성폭력범에 끼어들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을 소리였다. 하지만 심문하는 경찰리의 말은 진지했다. "아무리 술집여자래도 그렇지. 강제로 옷을 벗기는 것도 그런데 거기다 싸대기까지 올려붙이는 심사는 또 뭐야? 전치 2주야 2주. 손만 한번 툭 건드려도 찰과상 정도는 나오겠지만, 이 여잔 지금 고막이 흔들흔들한데 알아! 전치 2주면 구속이 원칙이야 이 사람아!" "제가...제가 그랬단 말씀입니까!" "뭐야! 그럼 안 그랬다 이 말이야?" "전, 도저히 그런 기억이... 정말입니다. 전혀 그런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얼씨구. 다른 건 다 네네, 하더니 결정적으로 불리한 데선 난 모르시겠다? 그럼 의사가 이걸 여벌로 떼어준 줄 알아! 찢어진 브라자 끈까지 내보이는 걸 됐다고 했어. 잘못했으면 솔직히 잘못했다고 시인하고, 잘못을 빌어야지. 근데 자네 여자 혐오증이라도 있나? 발가벗겨 놓고는 고래고래 욕지거리만 치더라면서?" 옆에서 조서를 받고 있던 따개눈이 키득키득 웃었다. 김석배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경찰리를 쳐다봤다. "제에...제가요? 전..." "아아, 뭔 말하려는지 다 알아. 술이 워낙 취해서 전혀 기억에 없다 이 말 할려고 그러지. 자네 평소에도 여자만 보면 그렇게 못살게 구나? 거 병치고는 아주 더러운 병이더구만. 그 정도면 중증이야 중증. 내 그 얘길 들으면서도 한편으론 우습기도 하고, 그렇다고 웃자니 찔찔 짜고 있는 여자 보기 민망하고. 하여튼 일이 이쯤 됐으니 유야무야 넘어갈 것 같진 않아. 진단서까지 끊은 걸 보면." 그녀가 구술한 고발장 그대로라면서 하는 경찰리의 말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내용이었다. 술판이 어지간히 파할 쯤 되서 김석배와 그녀는 대림장인가 하는 여관으로 이끌려갔는데, 물론 그 자리에 모여있던 회원들의 짓궂은 장난이었다. 그 여자는 동행하기만 하면 돈은 얼마던지 주겠다는 꼬임에, 어차피 화류계로 들어선 목적이 돈이었으므로 별 망설임없이 따라나섰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다 가고 둘만이 남게 되자, 술에 절어서 몸조차 가눌 수 없이 해롱거리던 김석배가 손찌검부터해대기 시작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옷을 찢더니 욕지거릴 퍼부었다. 이러지 말고 불이나 끄고 싸우던지 말던지 하자고 타이르자,그는 오히려 귀뺨을 후려치며 소리치는 말이, 니년도 날 강제로 어째볼려고 그러지. 세상의 지집년들이 우째 하나같이 색골이냐며 길길이 뛰더란다. 7. 하도 어이가 없어 멍하니 앉아있자 이번엔, 니년이나 그년이나 어디가 어떻게 틀린지 확인해보자며 별 해괴한 짓거릴 다 요구하더란 것이다. 술이 취했다고는 하지만 말하는 투가 워낙 암팡지고 수작이 거칠어 도저히 참아낼 재간이 없더란다. 술집에 있다고 업수이여겨 이러지 하는 모멸감이 들자 더욱 원통하고 분하더라는 거였다. 그 길로 뛰쳐나왔고, 저도 인간이라면 다음날 사과라도 하겠지 하며 오전내내 기다려봤지만 잘못했다는 사과는 커녕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제 분에 못이겨 고발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 듣고난 김석배가, 자신의 일임에도 너무나 어이가 없던지 쓰게 웃었다. 경찰리 역시 피식 따라 웃었다. "그래 그년이 누구야?" "네에? 그년이라면..." "니년하고 그년하고 어디가 어떻게 틀린지 확인하자고 덤볐다며? 그래 그년이 누구냐고!" 김석배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 그랬었구나. 김석배가 그제서야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주 먼 과거의, 음습하고도 칙칙한 그 기억이 새삼스러이 떠오르다니.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혼자만의 더럽고도 추악한 과거가 아니던가. 하필이면 죄없는 술집여자를 의모로 착각하다니. 김석배가 입을 꾹 다물곤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기억 나지 않는다는 제스처였다. 경찰리가 실없이 또 웃었다. 가재는 게 편이고 초록은 동색이라고, 그래도 김석배의 편인 듯했다. "우리도 이런 사건은 반갑지 않아. 맥빠지기 십상이라고. 일껏 찾아와선 당장 잡아죽일 듯 가해자를 형사처벌해달라고 기를 쓰다간, 조서도 꾸미고 가해자 신원도 확보해 놓으면 이런 여자들 뭐라는지 알아. 그제선 관두라는 거야. 합의 다 보고 원만하게 처리ㄷ으니 없던 걸로 하자는데 어쩌겠나. 닭 쫓던 개 용마루 쳐다보는 식으로 만사휴지가 되고 마는거야. 그 시간에 도둑놈 한 놈이래도 더 잡았으면 고생했다는 말이나 듣지. 이번 사건도 그래서 일부러 조서를 안 꾸미는 거야. 왠지 아나. 뻔하거든. 이런 여자들 고소장 들고 왔다갔다할 땐 다 그만한 생각이 있어 그러는 거라구. 알겠지 뭔 말인지. 얼마를 요구할지는 모르지만, 비싼 금테 한번 잘못 건드렸다 생각하고 조기에 합의를 보라고. 방금 나간 중놈 염불 끌 듯기 끌어봐야 득될 거 하나 없어. 갸 들이 어떤 얘들인데 선선히 물러나리라고 생각했다간 건 오산이야 오산. 체면이고 인정이고 막장까지 간 얘들이 갸들이야. 괜시리 섣불리 나대다가 덤으로 과징금까지 붙이지 말고 딱 잘라 얼마냐고 결판을 내." 8. 그러면서 경찰리는 히죽 웃더니, 진지한 투로 타이르듯 말을 계속했다. "이런 여자들 통행료 요구를 하면 또 얼마를 요구하겠나. 의외로 인정에 약할 수도 있고. 여기, 주소하고 인적사항 있으니 순탄원만하게 처리하라고. 아까도 말했지만 진단서에 2주이상이면 원래 구속수사를 원칙으로 해야겠지만, 신원도 확실하고 사안도 그렇고 해서 불구속처리하는 것이니 빠른 시일내에 합의를 보도록해. 좀 전에 이용협회장한테도 선처를 바란다는 부탁이 있긴 했지만 우리도 더 이상은 힘들고."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나오려는데 흑판이 눈에 들어왔다. '보호자 명단'이었다. 생각없이 훑어내리던 김석배의 눈길이 한곳에 우뚝 멈췄다. 아주 낯익은 이름이 있지 아니한가. 전한국...! 눈을 부비고 봐도 틀림없는 '전한국'이었다. 방금전 자신을 신문했던 경찰리에게 물으니, 자신이 알고 있는 상국의 형, 전한국이 분명했다. 너무나 놀라운 사실에 김석배가 몸둘 바를 몰라했다. 죄명이 무어냐고 묻자, 그 경찰리는 자신이 담당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는데 아마도 노인을 약취유인한 죄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와 잘 아는 사이냐고 물었다. 서성거리던 그가 뛰듯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구치소를 찾았다. 구치소는 본건물 뒤편에 따로 떨어져 있었다. 바람은 그칠 줄 몰랐고 눈보라가 앙칼지게 쌩쌩거렸다. 구치소에 있던 간수가 김석배를 보자 깍듯이 경례를 붙여왔다. 5부 능선쯤 벗겨져 올라간 대머리 탓일 터였다. 면회신청을 하자 한국이 바로 나왔다. 부성부성한 얼굴에 눈이 퉁퉁 부었다. 머리는 쑥대궁이었고 추레한 몰골이 보기에도 딱했다. 그래도 김석배를 보자 반가운 표정이었다. "며칠 됐냐? 이렇게 끌려온 지가 며칠이나 됐냐고? 너희집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냐? 도대체 뭔 죄를 어떻게 졌길래 콩밥까지 다 먹고 난리냐? 차근차근 알아듣기 쉽게 자초지종을 말해봐라." 김석배가 숨 돌릴 참도 없이 물었다. 한국이 김석배의 얼굴만 힘없이 쳐다봤다. "노인을 약취유인하고 감금폭행했다는 말이, 그래 그 말이 사실이냐? 노인이면 어떤 노인이었냐?" "몰러야 난." "뭐야! 니 죄명이 그렇다는데 니가 모르면, 그럼 너두 나처럼 술에 취했었다 이 말이냐." 9. "그저 시키는대루 노인 ㅁ 명을 봉고차에 태우긴 했지만, 폭행이 어쩌고 하는 거... 증말여야 하늘이 두 쪽 나도 난 그런 일은 안 혔응께." "그럼 니가 여기 이렇게 가두켜 있다는 걸 니덜 식구 아무도 모른다 이 말이냐?" 한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하긴 했지만 길게 얘기할 정황이 아니었다. 이걸로 따뜻한 국밥이나 사 먹으라며 영치금 3만 원을 들이밀고는 다음에 보자는 말로 끝냈다. 눈길을 걷는 김석배의 발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자신의 일도 급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한국의 구속 사실을 상국에게 알리는 일이 급선무였다. 미끄러운 길이 자꾸만 뒤쳐졌다. "뭐야! 한국이...한국이 경찰서에 붙잡혀 갔다고! 누가 그러데 니가 봤냐!" 상국이 놀라리라는 건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험악했다. 펄쩍펄쩍 뛰면서 입술이 파랗게 오돌거렸다. 김석배 역시 경황없긴 마찬가지였다.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깊게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노인을 약취유괴했다면... 그게 뭔 말이냐? 시방 누구를 어떻게 했다구!" "길가에 서 있는 노인네를 강제로 어디로 끌구 간 모냥이드라. 지 말루두 봉고차에 태우긴 태웠데." "얌마! 거 말 겉지두 않은 소리 작작해라. 어뜬 율 빠진 놈이 암만 제정신이 아니래두 그렇지 그래, 애들이나 부녀자들 같으면 또 모를까. 에라이 수운...말 같지두 않은 소리. 건 임마 완전히 모함이여! 생사람 잡자고 옭아씌운 억지라고." "한국이 갸 원래가 제정신이 아녔잖냐. 설마 지가 그랬으니 그랬다고 혔겠지." "근데 이 자식이! 요오...! 누구 홧병 나서 죽는 꼴 보자고 하는겨 시방. 그래 시켰음 누가 시켰다냐. 장의사? 아님 장기(臟器)밀매단? 돌배 넌 임마 우째 말두 안 되는 소리만 나불거리냐. 설사 그렇다 해도 한국이 지가 뭔 배짱으루 그런 엄청난 짓을 할 거 같냐. 갸가 들 떨어졌다는 건 삼척동자가 다 아는 사실이다." "몰러 임마, 나두. 지가 있었다는 직장이 그런 덴가보지. 어쨌건 내 눈으루 똑똑히 확인까지 했으니 한국이 갸가 경찰서에 붙잡혀 있는 건 두말함 잔소리다. 손이나 써. 잘났던 못났던 명색이 형인데 징역살이 시킬 거냐. 빼내는 것두 경찰서에 있을 때 손을 써야 쉽지 일단 검찰루 넘어가면 어렵다더라." "근데 돌배 닌 걸 어떻게 알았냐? 경찰서에 누가 있는 것두 아닐테고." 김석배가 찔끔했다. 10. "사람 일이란 게. 참말로 묘한 거여. 경찰서 민원실에...거 뭐냐. 맞어. 긍께 넌 우리 세계를 잘 모르겠지만 정기적으로 본의 아니게 찾아가봐야 할 때가 있거던. 더릅고 치사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겨. 사업이란 게 다 그렇거던. 근데 누가 면회신청을 한다면서 이름을 쭉 대는데, 아마 공범이 몇명 더 있나보더라. 전한국, 그러잖겠냐. 설마 했지. 웬걸 혹시나 해서 가보길 천만 다행이다. 사람 일이란 게 이래저래 얼키고 설킨겨. 딱하드라 딱해.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참혹혔당께. 문민시대에 물고문이야 당했을까마는 눈팅이가 시퍼런기... 모르겠다 나두. 니가 알아서 혀라." 김석배의 말이 눈발처럼 분분했지만 상국으로서야 믿지 않을 도리 없었다. 난감했다. 이 일을 어쩐다? 생각해보면 이제껏 붙잡아둔 자신에게도 잘못이 많았다. 교통사고 당했을 때 바로 집으로 보냈어야 하는 건데 병구완이랍시고 잡아둔 게 잘못이었다. 몸이래도 성하다면 어떻게 해서든 손을 써보기라도 하겠는데 이건 옴치고 뛰지도 못하는 병원신세 아닌가. 도움을 청할 사람이라곤 석배 하나뿐이었다. "석배야.니가 내 대신 좀 나대줘야 쓰겠다. 보다시피 난 병원신세 아니냐. 우선... 집이루 연락하는 게 급할 거 같다. 그리고 넌 사업한게 발이 좀 넓을 거 아니냐. 줄 닿을 만한 델 백방으루 알아봐주라. 이제 와서 이런 얘기 해봐야 그렇지만, 따지고보면 너한테도 책임이 완전히 없다고도 할 수 없고... 하두 답답해서 그런다. 책임은 무슨 책임. 지놈하나 잘났으면 장가 걱정은 뭣하러 하겠고, 도깨비장난 같은 이런 도시엔 올 일도 없었겠지. 휴우...! 씨부럴 눔의 팔자, 비만 오면 됐지 뭔 지랄루 벼락까지 덮친다냐. 산 넘어 산이 아니라 산 넘어 호랭이굴이다. 우선 울 아부지 한테나 연락해주라. 그러잖아도 풍끼 있는 노인네 놀래게 하지 말구." 펄펄 뛰던 좀전의 태도와는 달리 조용했다. 듣고 있는 김석배 역시 시무룩하긴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살아온 정리로 보나 상국의 처지로 보아 도와주어야 한다는 건 당연했다. 그렇지만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당장에 자신의 일만해도 감당하기 버거운 노릇이었다. 폭행치상이라니. 담당 형사를 잘 만나서 그렇지 까닥 잘못했으면 성폭행으로 걸려들 뻔하지 않았는가. 두고두고 저주스러운 양모였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단지 불끈거리는 욕망을 이기지 못해 저지르고 만, 그 모자상간의 끔찍스런 밤이 화인처럼 찍혀오고, 김석배가 치를 떨었다. 세상에 닮을 사람이 없어 그 더럽고 구역질 나는 양모를 닮는단 말인가. 어찌됐건 고소를 당한 입장이니 그 여자부터 만나봐야 할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지저분한 일을 상국에게 말하기도 그랬다. 누구와 터놓고 상의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상국의 부탁을 들어주자니 자신의 입장이 꼬였고, 거절하자니 그건 친구로서의 도리가 아니었다. 11. 그저 알았노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병실문이 뻘쭘히 열렸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처녀 같기도 하고 유부녀 같기도 한, 애매한 나이에 표정까지 모호한 여자가 들어왔다. 다른 병상의 손님이려니 여긴 김석배가 등을 돌렸다. 문쪽을 가로막는 꼴이 되자 상국이 손을 휘저었다.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오버깃을 풀면서 여자가 다가왔다. 서른은 넘었겠고, 마흔으로 치자니 좀 억울할 것 같은 나이였다. 수수한 얼굴이 밉상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겐 데데하게 보일지도 모르나 약간만이라도 화장을 하면 금방 피어날 듯한 이목구비였다. 여인이 가볍게 목례를 건네왔다. 상국이 끄응 소리가 나도록 허리를 굽혔다. "형님 되시는 분은... 여직 소식이... 바깥 바람이 심한데요." 그녀가 김석배를 보며 주춤거렸다. 상국이 얼른 김석배를 가리켰다. "제 친굽니다. 고향두 같구 나이두 같구. 이 친구 없으면 전 시쳅니다. 참, 석배 너 인사 들려라. 교통사고 당했을 때 같은 차에 탓던 분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때 죽었을 목숨인데 이분 형님이 절 구해주셨습니다. 하두 고마워서 인사나 드릴려고 찾아오는데두 번번이 안 계시는군요." "아예...그렇습니까. 당분간 좀... 힘드실 것 같군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여인이 상국과 석배를 번갈아 쳐다봤다. 상국이 석배를 향해 고개를 끄떡여보였다. 말해버리라는 눈치였다. 석배가 머뭇거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은... 구속됐습니다. 법 없어도 살 사람인데 다른 놈의 꼬임에 빠져 그만... 사람 죽인 것두 아닌데 뭐 오래야 가겠습니까." 그녀가 눈을 둥그렇게 치뜨며 상국을 바라다봤다. 김석배의 말이 사실이냐는 투였다. "저 친구 말 그대롭니다. 저두 이제 막 안 사실입니다만, 경찰서 구치소에 잡혀있다구. 손을 쓰긴 써야 하겠는데, 보시다시피 제꼴이 이 지경이니 그저 답답할밖에요. 한국이 갸 이젠 오도가도 못하게 됐으니 면회하긴 쉬울 겁니다." 상국이 자기 대신 면회나 좀 갔다와달라는 말 같았다. 그녀가 고맙다는 인사를 뒤로하곤 밖으로 나갔다. 김석배도 바쁜일이 있다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야! 너어, 우리집이루 바루 연락해야 한다. 알었냐!" 김석배의 뒤에다 대고 목소리를 한껏 일구는 상국이었으나 어쩐지 허황하게 들렸다. 12. 김석배가 전상국을 만나고 있을 그 시간. 대양물산의 방유석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뭐요! 그게 사실입니까! 사실 확인을 하셨느냐 이 말입니다." "방 실장도 사람을 그렇게 못 믿어서야. 우리 봉고차 운전사가 한 말이니 어디라고 거짓을 하겠소."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복지원의 변상열이었는데 방유석이 잔뜩 흥분해 있었다. "알았습니다. 어쨌건 감사합니다. 그 일만 잘 해결되면 회장님께서도 아마 그냥 있진 않으실 겁니다. 직원들 튀지 않게 잘 다독이시고, 보안에 특별히 신경쓰셔야 할 겁니다." 방유석이 아주 달뜬 표정으로 히죽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다시 어디론가 다이얼을 돌렸다. "출장이라니요. 아, 그러시겠죠. 어디 한가하실 때가 있겠습니까. 그럼 조사계장 계시면 연결이 될까요? 아이구, 이거 고맙습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방유석이 얼마간 조는 시늉으로 앉아 있더니 몸을 가지껏 뒤로 제꼈다. "아이고 이거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잖아도 바쁘실텐데 그런 일로 신경을 쓰게 해드려서. 덕분에 잘 있습니다. 그럼요 여부 있겠습니까." 거만스럽게 앉아있는 자세와는 달리, 목소리는 해초처럼 나긋나긋했다. "한 가지 확인을 좀 했으면 해서 그럽니다만. 폭행치상죄로 고발된 김석배라는 자가 있나 해서요. 아, 예. 사실이었군요. 으흠...! 구속할 정도까지는 안 되고, 그럼 피해자측과는? 아, 예. 그렇겠죠. 친고죄는 아니라 해도 피해자 쪽에서 소취하를 한다면. 왠걸요. 그냥 아는 사이라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알아보는 중입니다. 하여튼 이래저래 고맙습니다. 하이고 이거 그거 갖고야 되겠습니까. 저의 회장님도 알고 계시니 별 문제는 없을 겁니다. 예예. 그럼." 전화를 끊자마자 방유석이 차를 몰았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연신 싱글벙글했다. 우체국이 자리한 5거리를 거쳐 중소기업은행을 지나자 죄회전 골목이 나왔다. 그 골목을 쭉 따라 오르던 방유석이 차를 세웠다. 멀리 대림장이란 여관이 보이는 소방도로의 맞은편이었는데, 홍등가인 듯 술집과 음식점이 즐비했다. 차에서 내려 주위를 한바퀴 더듬던 방유석이 먹이를 찾은 독수리처럼 오버깃을 추스르더니 곧장 치달았다. 그가 들어간 곳은, '흑산옥'이라는 옥호가 나붙은, 별로 크지 않은 술집이었다. 13. 다급하게 들어간 그가 주인부터 찾았다. 햇발이 중천에 서성이고 있건만 내실은 그저 괴괴하기만 했다. 발을 구르며 퉁퉁거리자 그제사 삐그덕거리며 미닫이문이 열렸다. 물 속에서 한 사흘 정도는 담겨 있다 건져올려진 찐빵 같은 얼굴이 하품을 물었다. "아직은, 영업시작할 시간이..." "아닙니다. 술 먹자고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을 좀 찾을까 해서 왔습니다만. 여기서 일하고 있다는 이경희 씨라고.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녀가 또 하품을 물었다. 졸음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야릇한 눈으로 방유석을 쳐다보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있긴 있습니다만, 만나기가..." "다른 뜻이 아니고 긴히 상의 드릴 게 있어서 그럽니다. 잠깐 얼굴만이라도 볼 수 없겠습니까. 나쁜 일은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그래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바람이 훽 불자 일순 온 천지가 하얗게 변했다. "몸이 불편해서, 요 며칠은 출근을 안 하고 있는데요." "그럼 집 주소라도 알 수 없을까요? 여성인권을 준비하는 인권단체에서 나왔습니다. 여성의 권익은 여성 스스로가 지켜야 하거든요. 법적인 문제는 물론 모든 여성들의 고충을 대변하는 사회 봉사단체입니다. 어떻게든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방유석이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붙어붙였다. 여성인권단체란 말에 그녀가 조금은 친절해졌다. 수첩을 뒤적거리더니 주소와 전화번호를 일러주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조금 전에도 어느 분이 찾아오셨던데... 혹시 일행이 아니신가요?" 하면서 의아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냐고 되묻자, 그녀는 아니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별 말 없었다. 그리곤 문을 닫았다. 누가 그녀를 찾아왔다면, 보나마나 김석배 그놈일 것이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이 기회마저 놓쳐버린다면 주연실과의 인연은 영원히 끝나는 셈이었다. 더구나 생각지도 않게 굴러들어온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주연실이 문제가 아니라 대양그룹 전체를 수중에 넣을 수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3단으로 기어를 변속한 방유석이 눈길을 바람처럼 지나치고 있었다. 간선도로를 따라 그녀가 살고 있다는 아파트까지 오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층수를 헤아려, 그녀가 살고 있다는 문앞까지 다다른 방유석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14. 한번, 두번... 초인종을 누르는 그의 손이 빨라졌다. 딩동거리는 벨소리만큼 침묵은 길었다.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아래층에서부터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초인종에서 손을 뗀 그가 겸연쩍게 옆으로 섰다. "당신 거기서 뭐하슈?" 방유석과 엇비슷한 또래의 남자였는데 말하는 투가 사뭇 도전적이었다. 방유석이 도둑질하다 들킨 아이처럼 아무 대꾸도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 사내는 좇다만 도둑을 이제야 잡았다는 듯 의기양양했다. "지난 번에도 그 난리를 쥑이더니, 그래 여지껏 쇼부 못 보셨소. 우리 마누라가 이 통로 반장이래서가 아니라, 시끄러운 건 둘째로 치고라도 이거야 어디 풍속이 문란해서..." 방유석이 변명할 사이도 없이, 그 사내는 시위라도 하듯 발을 탕탕 구르며 다음 층계로 올라가고 있었다. 층수와 호수를 다시 확인한 방유석이 입맛을 쩝 다시며 발길을 되돌렸다. 경비실까지 온 그가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나서야 차에 올랐다. "미스장. 요번엔 미스장이 좀 날 도와줘야겠어." 되돌아온 방유석이 같은 비서실에 근무하는 장지연을 불렀다. "이경희라고 하는 여자, 미스장은 잘 모르겠지만 주소하고 전화번호가 여기 있으니 찾기는 쉬울 거야." "그 여자를 왜요?" 장지연이 새촘했다. "김석배란 놈이 있는데 이번에 구속된 전한국과는 무관한 사이가 아냐. 자세한 것까진 알 필요 없고, 어쨌건 그 여자를 불러내. 불러내서는 김석배와는 합의를 보지 말라고 부추켜. 대양그룹 얘긴 꺼내지도 말고, 그냥 여성단체에서만 나왔다고 해. 김석배가 제시하는 합의조건, 그 합의금이 얼마가 되든 그보다는 많이 줄테니 무조건 합의서에 도장만 찍지 말라고 해. 그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알겠지. 무슨 말인지. 명심할 사항은 어떠한 경우라도 미스장의 신분을 노출시켜선 안 된다는 사실이야. 자, 주소하고 전화번호." 내친 김에 직접 만나볼까도 생각했지만 이것 저것 따져보아 장지연이 더 무난할 것 같았다. 난데없이 낯선 남자가 나선다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자신이 해야할 일이 또 하나 있었다. 일의 추이가 어떻게 돌아갈지는 방유석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도리밖엔 없었다. 정문을 나서는 장지연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방유석이 애매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왔다갔다했다. 15. 노인이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대청 그득히 쌓여있던 햇살이 푸근하게 밀려들었다. 햇살을 쓸어담으며 노인이 고개를 힘없이 들어올렸다. 답답하고 뒤숭숭한 속이 오늘따라 더욱 심란했다. 볕발을 물끄러미 쪼아보던 노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눈물 같은 습기가 눈가에 칙칙했다. 군데군데 눈이 녹아 질척질척한 마당 가장자리로 한 떼의 참새가 포르르 날아내렸다. 재재거리는 새떼 울음소리를 물기어린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인이 허리를 숙였다. 허리를 숙이며 몸을 일으킨 노인의 몸이 허청했다. 대청 끝마루에 걸터앉은 노인이 앞산을 멀겋게 건네다 본다. 솔가지가 일렁이고, 하얀 눈가루가 푸르르 떨어져 내렸다. 노인의 숨소리가 그렁그렁 잦아들었다. 크흘... 한숨을 풀어내자 솔가지에 얹혀있던 눈가루가 또 한번 푸르르 흩어져내렸다. 못난눔... 워디 백혀서 뭘 파묵고 있길래 이적지 글줄 한자 없다누. 도망은... 뭔 죄를 졌다구 도망을 가. 지들만 맘에 들먼 고만인 게지. 크흐흘... 그려 잘 혔니라. 암, 잘 허고 말고. 느그들 둘이 튀었다는 거, 거야 골백번 지당한 일이다만. 혀두 그렇지 이눔아. 멀쩡한 집 놔두구 이런 엄동설한에 한 입도 아니고 며늘애기까지 딸렸다문서. 미련한 눔... 집이 핀핀찬으먼 소식이라도 있어야 할게 아니것냐. 노인이 하염없이 바라보는 앞산엔 시리도록 하얀 볕발이 찬란했다. 거뭇거뭇 튀어오른 마당 한복판에다 날개를 접은 새떼들이 요란했다. 노인이 쌈지에서 담배갑을 꺼냈다. 심란한 속을 담배불로 후지지려는 심산일 게다. 궐련을 입에 물고는 허리를 접이 되도록 구부린다. 파란 불통이 타닥타닥 튀었다. 라이터불을 켜든 노인의 손이 문풍지처럼 따르르 떨렸다. 푸르스름한 담배연기가 허공을 흘끗 스친다. 한 줄기 담배연기가 해초처럼 흐물거리며 노인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오지랖으로 눈자위를 쓸어내릴 때마다 노인의 눈에선 자꾸만 눈물이 번지고, 그럴 때마다 노인은 담배연기를 좇는 시늉으로 대구 눈자위를 문지른다. 떨리는 손 끝에서 담뱃재가 피시 떨어진다. 담배불로 끄슬린 속이 매케하다. 바람이 희뜩 불자 담뱃재가 눈가루처럼 푸시시 흩어진다. 허어...박복한 눔이여. 참맬로 박복한 눔이구먼. 우쩐 시상에 배필 하나 못 구해 생으루 객지밥을 먹는다여. 크흘... 다 이 애비 잘못 만난 죄것제. 이 늙은 게 박덕혀서 그른기니, 어쩔 것이냐. 물려줄 재산이 많것냐 길러낸 학식이 높것냐. 허구헌 날 쟁기질로 뼛골만 빠졌제 냉긴 거라군 한숨뿐인기여. 하루살이 날파리도 후생이 돈독하고 토깽이 같은 미물도 살집을 유산으로 냉기는데 내사 빗보따리만 물려주게 생겼으니... 노인이 담배불을 빨아댕겼다. 손톱 끝에서 빨간 불덩이가 익었다. 필터 타는 냄새가 자욱했다. 16. "크흘... 클..." 담배진으로 노랗게 익은 손톱을 부볐다. 불똥이 봉당으로 굴러떨어진다. 그때 그림자 하나가 울 너머로 어른거린다. 그림자는 소리도 없이 다가왔다. 새들이 기겁을 하며 날아오른다. 어수선했지만 경황중에도 군율(群律)을 지켜 질서가 정연하다. 새들이 뒷산 가시덤불로 숨어든 다음에야 그제사 노인이 새떼처럼 놀란다. 어깨춤을 바뜩 추켜세우고는 삽짝께로 눈을 박는다. 기침소리가 들리고, 그림자가 사령(使令)처럼 당도한다. 노인의 목이 가지껏 늘어졌다. "뉘신가?" "접니다요. 으르신." "으허, 자네가 어쩐 일로 우리집엘 다. 밸일이로세. 크흘..." "핀진데유. 배달꾼이 와설랑 이걸 건네주는디 암만해두 급전 겉애서유." "멋이여! 급전?" "야. 그런디유." "보세! 핀지라 혔겄다? 근데 뭔느므 주머니가 그리도 깊은가!" "여그 있구만유. 으르신." 옆집 박씨가 재빠르게 봉당을 타고 오르며 편지봉투를 건넸다. 편지를 받아드는 노인의 손이 전보다 심하게 떨렸다. 파봉을 하려던 노인이 발신인 주소에 손을 대며 눈을 멀리 했다. 박씨를 쳐다보는 노인의 목소리가 급히 떨렸다. "자네 눈으룬 이게 뭔자처럼 보이나. 당췌 눈이 침침혀서... 핀지 올 데라군 우리 갸, 상귁이 그늠빼끼 ㅇ는디. 맞것제? 상귁이 그늠이?" 박씨가 보지도 않고 입맛을 쩝 다셨다. "아닌데유. 상국이 동상한테 온기 아니라 이건, 그..." "뭐여, 아니라구! 아니면? 우째 자넨 보지두 않구 그ㄹ게 담박에 알아내는가? 자네 시방 남의 사사편지라고 막보는건 아니것제?" 그제사 박씨가 고개를 노인 쪽으로 삐딱하게 꼬면서 눈여겨 보는 척한다. 하지만, 그 눈여겨 본다는 게 척할 뿐이어서 대충 격식만 차릴 뿐이다. 그러더니, 버릇처럼 또 입맛을 쩝 다셨다. "지들 집에서 확인혔구만유. 지 역시 상국이 동상인가 혔는데 주소두 엉뚱하구 이름자두 영판 모르는 사람이구... 배달꾼은 그냥 전달만 확고하게 해달라구 하데유만 암만혀두 예사편지가 아닌 것 같어 이ㄹ게 뗘 왔구먼유." "크흘. 그눔이 아니라면 올 데가...청첩이나 부고 겉으면 인편으로 부칠 기고. 그래 뫼라고 써있는가?" 박씨가 읽어주는 주소와 발신인은 아무래도 엉뚱했다. 노인이 눈을 꿈쩍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17. "뫼라고? 경찰서장? 자네 이자 경찰서장이라고 혔나?" "맞구먼유. 으르신. 여그 겉봉투엔 분명 경찰서장 김일중이라고 써있구먼유." "난 또... 오발되얏구만. 잘못 배달ㄷ어. 도루 갖다주게. 경찰서장이라니... 이른 핀지는 중헌 것일틴디, 크흘... 배달부 그 사람 큰일 낼 사람이구먼. 나랏돈 타 먹는 사람이 이ㄹ게 허술해서야. 내피까정 뜯어봤음 우짤뻔혔는가... 크흘." "보낸 사람이 경찰서장인지 뉜지는 몰라도 으르신 앞으로 온 핀지가 확실허구만유. 여기 이렇게 전병학 귀하, 하고 써 있는데유. 주소두 이 동네가 맞구유." 바람이 불었고, 앞산 소나무 가지에 얹혀있던 눈가루가 또 한번 푸르르 날렸다. 경찰서장이란 말에 노인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하얗게 굳어졌다. "허어 모를 일. 어서 뜯어보게 뫼라구 써 있나. 밀린 농자금 탓인감. 거야 어련히 알어서 갚을 기라고." 겉봉을 뜯은 박씨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이내 난감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곁에 있던 노인이 답답하다는 듯, 박씨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런 그들 둘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산처럼 덮쳤다. 뒷산 가시덤불에 숨어 있던 새들이 후르륵 앞산으로 날았다. 마땅히 앉을 곳이 없던지 놈들은 몇 번인가 날개짓을 퍼덕이더니 이내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십여 리 떨어진 남한강 어구에 줄이 닿은 시내와, 그 시내를 따라내리는, 두 해 전에 포장된 도로가 있는 쪽이었다. 박씨의 눈길이 새떼를 좇았고, 노인이 그 뒤를 따랐다. "으르신네, 이건...핀지가 아닌데유. 꼭 우리 원경이 입학통지서 겉은기. 무신 통지서는 통지선가 본데...지 역시 까막눈이라...국문으루 되 있으믄 또 우ㄸ게든 해보겠는데, 마늘밭에 쇠비듬처럼 딛다 한문으루만 백혀있으니." 노인의 발걸음이 갈수록 무디어졌다. 유리알처럼 반질거리는 빙판길이었다. 지게작대기로 지팡이를 삼긴 했으나 길보다 불안한 마음이었다. 바람을 끌어안은 가슴이 서늘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작은놈이 또 일을 저지른 것이라 생각했다. 언제나 둘째, 상국이 그 녀석이 문제였다. 툭하면 싸움질이었다. 차라리 어디가서 얻어터지기나 하고 들어오면 마음이라도 편하겠는데, 이건 다퉜다하면 다른 애들을 두들겨 팼다. 씨광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푹 떨구고 들어오는 날은 물어볼 것도 없이 다른 애들과 한바탕 싸운 다음이었고, 누구와 어떻게 싸웠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싸리울이 들썩했다. 그러면 그 다음 식순은 정해진대로였다. 18. 코피가 줄줄 흐르거나 이마빼기가 깨진 아이가 엉엉 울면서 맨 먼저 등장한다. 영락없이 저보다 크거나 비슷한 아이였다. 다음으로는, 그 애의 보호자 되는 사람이 나타나는데,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식식거리는 인상이 그렇게 험악할 수가 없다. 대개가 얻어터진 애의 어머니였으며 간혹 아버지나 누나되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등장인물이 다 등장하고 나면 대사가 시작되는데, 이 역시 각본대로였다. 우리 야가 이 모양으로 만신창이가 됐는데 어쩔 것이냐. 내 새끼 귀한 줄 알면 남의 자식도 귀한 줄 알아야 할 것 아니냐. 어금니가 흔들흔들하니 치료비를 물어내라. 남의집 외아들 얼굴을 이꼴로 만들어놨으니 장래를 책임져라. 아무리 자식새끼 교육이 엉망이래도 그렇지, 그래 허구헌 날 쌈질만 가리칠 셈이냐. 일차 피해자측의 포악을 다 듣고난 다음, 전병학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역시 상투적이고 의례적인 사과에 불과했으니, 그저 죄송스럽게 됐다는 말이었고, 차후엔 이런 불상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내 저눔을 따끔하게 혼내주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그것을 증명이라도 해 보이듯 회초리를 꺾어들었고, 눈치빠른 상국이란 놈은 매채가 종아리에 닿기도 전에 집이 떠나갈 듯 울어제키며 엄부렁을 쓰곤 했던 것이니. 차라리 그 때는 어린 자식놈을 키우는 쌉쌀한 맛이라도 있었다. 철이 들면 좀 낫겠지 했는데 세 살 적 버릇 선소리꾼이 알아본다고, 나이가 들수록 나아지기는 커녕 점점 심악해지기만 했다.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제 형과 싸우는라 온 집안이 시끄러웠고, 좀 커서 학교에 다닐 만하자 집안이 조용한가 했더니 대신 동네가 시끄러웠다. 이제는 다 컸지 해서 멀리 타관으로 내보내고 나니 이건 한술 더 떠 세상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어릴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저도 남에게 얻어터질 때가 있다는 것이었고, 사고의 종류가 싸움뿐만이 아니라 여자문제, 술문제, 금전문제, 건강문제 등등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해졌다는 거였다. 그러한 자식 놈이었으니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었고, 아무 소식도 없을 때가 오히려 불안스러운 노인이었다. 그러잖아도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다. 혼자 산다는 건, 더구나 장성한 아들을 둘씩이나 고스란히 놔둔 늙은이가, 달팽이처럼 덩그러니 집만 지키며 혼자 산다는 건,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고역이었다. 늙어서 혼자가 된다는 것만큼 비참한 일도 없었다. 해가 다르게 줄어드는 농가 호수였다. 그나마 이따금씩 찾아오던 이웃들도 한국이 마저 떠나고 나자 발길이 뜸해졌다. 자연, 말 붙일 상대가 없었다. 혼잣말이 늘어갔고 한숨이 길어졌다. 한국을 생각하면 세월이 지루했고, 상국을 생각하면 세상이 불안했다. 19. 지나간 날을 생각하면 꿈인 듯 허망했고, 그 허망했던 날들이 꿈인 듯 생각되어 꿈조차 잃어버렸다. 하루하루의 낙이란 그저 대청마루에 나앉아 무언가를 바라보는 일이었다. 듬성듬성 허물어진 빈집을 바라보았다. 이산 저산 널려있는 먼저 간 친구들의 묘둥지를 바라보았다. 쓸쓸했다. 당장이라도 성큼성큼 다가올 것 같은 그리운 이들의 모습. 귀에 쟁쟁한 말소리. 그러나 떠나간 사람들에게선 아무 말도 없었다. 봇짐을 등지고 떠나갔건 상두꾼을 앞세우고 떠나났건, 한번 떠나간 사람들에게선 이렇다할 말 한마디 없었다. 말이 없긴, 등잔같이 살아있는 두 아들 놈 역시 마찬가지였다. 큰 녀석 한국이란 놈이야 짝 찾아 나섰으니 때가 되면 들어오겠지만 둘째 상국이 놈은 어쩐 일로 전화마저 끊겼다. 신호는 가는데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불통이었다. 어쩐지 요즘들어 지나치게 조용하다싶어 은근히 걱정되던 참이었다. 막되먹은 성깔이 또 어디가서 사고라도 친 건 아닌가. 반등신이 다 됐다는 허리통이 도진 건 아닌가. 그러한 터수에 경찰서장이라는 자로부터 무슨 통지서란 걸 받아들고보니 불뚝 겁부터 드는 노인이었다. 크흘... 따지고 보면 그눔도 불쌍헌 놈이여. 큰놈이야 보약이라도 원 없이 멕였다지만... 그놈이야 먹을 걸 제대로 줘봤나 입을 걸 맘대로 입혀봤나. 천덕꾸러기 천덕꾸러기, 그만한 천덕꾸러기도 없을기고... 물쿠뎅이 같은 즈 성 밑에서 악성만 키운기여 그놈이...다 지 애비 잘 못 만난 탓이제.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노인이 길바닥에 나동그러졌다. 다리가 떨린다. 눈이 부셨다. 그때 까무잡잡한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들었다. 서울번호판을 단 고급차였다. 차가 주춤하고 멋었다. 놀랜 노인이 지개작대기를 꼬나 잡는다. 그러나 승용차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탈탈거리고 뒤따라오던 경운기가 노인의 앞에서 멎는다. "난 뉘시라구유. 항국이 으르신 아니세유. 근데 워딜 가실려구 이런 눈구뎅이에 서 기신데유." 필우였다. 어디 농협에라도 갔다 오나보다. 노인이 눈을 지그시 떴으나 멀리 뜬구름만이 싯푸르게 출렁거린다. "저 필우구만유. 즘말 사는." 그제사 노인이 숨을 고른다. "응, 그려. 필우구먼." "야. 근데 어딜 가시게유?" "그려. 길이 어지간해야 말이지." "타세유. 지가 모실게유." "몰러. 핀지가 왔는데 알아묵을 수가 있어야 말이시. 깅찰스장이란댜. 워쩌것나 가근방에선 그래도 이장 필적이 기중 낫지 않것는가. 문리도 있고. 조신조신 찬찬히 다니시게. 길이 아니라 유리알이여." 20. "자자, 이ㄹ게 서 기시지 말구 얼릉 타세유. 안전빵으루 모실팅께유." 필우 청년이 노인을 부추켜 경운기에 태웠다. 빗겨치는 바람이 맵긴 했지만 견딜 만했다. 아랫목으로 내려 앉은 노인이 이장 갑윤의 입술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공놀이하다 교실 유리창을 깬 학생이 선생님 앞에 불려온 심정이었다. "그래 뫼라고 적혀 있는감? 필시 상국이 그눔이 또 사고를 친 게지? 어디 깨진 데는 ㅇ고? 크흘... 그눔 질래 그르케 나대다간 밍대루 못살지. 이 사람 이장...! 뭔 뜸을 그르케 오래 들이나. 이잔 그눔 얘기라면 저승사자가 찾아왔대두 눈하나 꿈쩍 안 할 거구먼. 어서 사연이나 들어봄세." 이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입맛을 쩝 다셨다. 말하기가 아주 난감하다는 표정이었다. "어허...! 그래두. 요즘 것들이야 대핵교나 가야 소학을 배운다 하데만서두 자네야 소학교 다님서 대학을 뗀 학문 아닌가. 청산유수 출출문장이 우째 하루아침에 벙어리가 되었는감. 크흘..." 이장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어... 으르신." "그랴. 뫼라누? 누굴 또 팼다는감." "저어, 그게 아니라..." "허어...! 그래두." "한국이... 왜, 큰 자제분 말입니다." "뭐여, 행국이? 자네 시방 행국이라고 혔는가?" 노인이 깜짝 놀라며 무릎을 끌어당겼다. 이장이 입맛을 쓰게 다셨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경찰서에, 이 편지 내용대로라면 경찰서에 갇혀 있다는 겁니다." "...!" "자세한 내용은 알아봐야겠습니다만, 큰 자제분이 경찰서에 구속되어 있다고...허엇 내원... 이렇게 답답할 때가. 무슨 소린지 도통 알아묵을 수도 없고." 이장이 편지지를 흔들어대며 안절부절 못했다. 허옇게 얼어붙어있던 노인의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한동안 멍하게 앉아있던 노인이 이장 쪽으로 엉금엉금 기었다. 그리곤 이장이 흔들어대고 있는 편지께로 손이 갔다. 편지를 집어드는 노인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그럼 이기... 이기..." "누가 아니래요. 으르신네. 구속통지서라니유. 이건 뭐가 잘못되도 한창 잘못됐구먼유.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내, 다른 사람이면 다 이해를 한다지만, 한국이 그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다니! 이거야 어디 믿을 일이 따로 있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주먹을 치며 원통해 하던 이장이 무춤했다. 무엇에 놀랐던지 쥐고 있던 주먹을 스르르 풀었다. 그리곤 노인이 쥐고있던 구속통지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다짜고짜 나꿔채는 게 아닌가. 21. "으르신네. 큰 자제분이 배필을 구했다 하셨죠? 맞선을 봤는데 그 집에서 반대를 하는 바람에 둘이 도망쳤다고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은데." "크흘...! 그랬지. 그런데 건 왜 묻나?" "맞어유. 맞어." "맞다니! 뫼가?" "여기 구속통지서에 죄명이... 약취유인에 관한 죄, 구금폭행에 관한 죄, 이렇게 적혀 있거든요." "허면?" "제 짧은 소견입니다만, 이건 그집 부모가 고소한, 그러니까 거 뭣이냐. 하안 나원,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콱 맥히다니... 맞습니다. 분명 이건 그집 부모가 고발한 게 분명하구먼유." "이 사람아. 그렇게 뜬금없이 허둥대지 말고 차근차근 말혀봐. 행국이 그늠이 잽혀있다 안혔는가." "요령껏 설명드리자면 이건 지 생각입니다만서두 한국이 그 사람이... 뭐냐, 긍께 그집 부모들 몰래 색시를 빼돌렸다 이 말 아닙니까.?" "옳지!" "그게 바루 약취유인이다 이 말입니다. 본인이야 자진해서 한국일 따라갔겠지만, 그집 부모들 입장에서 본다면 약취당했노라고 우길 수도 있거든요." "크흘! 밸 억지춘향이..." "거기다 거 뭣이냐. 집에 간다는 걸 못 가게짱박아 놨을지도 모를 일이고, 또 아무리 부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이래도 욱 하다보면 주먹질이 나갈 수도 있거든요." "아무야. 그놈도 사람인게." "얘긴 즉, 그게 바로 감금이고 폭행이다 이 말입니다. 이건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육법전서에 딱 나오는 말이니 아마 틀림없을 기구만유." "가당찮은...! 그기 우째 법인고? 지들 좋아 살겠다고 나간 것두 죄가 된다믄 시상천지에 죄짓지 않고 살아갈 장사 어디 있겠나." 노인의 수염이 부르르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이장 갑윤은 마을의 수장답게 침착했다. 눈을 지그시 감으며 무슨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어깨를 무겁게 일렁였다. 그러더니 손뼉을 딱 치면서, "아, 으르신네! 별 걱정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저 역시 경황 중에 앞뒤 가리지 못했습니다만, 가만히 생각해본게 크게 죄될 것 같진 않을 것 같습니다." 했다. 노인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이장의 얼굴만 살핀다. 이장이 위엄까지 부리며 점잖게 다음 말을 이었다. "수캐가 뭐 자랑한다고 제 자랑 같습니다만, 제가 예전에 육법전서를 좀 읽었거든요." "무신 그런 과헌 소릴. 이장의 출중헌 학문이야 가근동에서 따를 자가 누가 있다고. 어서 얘기해 봄세. 행국이 그놈 살려낼 여망은 있겠는감? 그래 육법전서엔?" 이장이 흡족하게 웃었다. 22. "이런 걸 친고죄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피해자측의 고소가 있어야만 처벌할 수 있다 이 말이거든요. 에...여기서 피해자측이라하면 유괴를 당했거나 폭행을 당한 장본인을 우선으로 하고, 그 직접적인 피해자가 법적 미성년자, 쉽게 말해서 민법상 의사능력이 없는 자일 경우에 한해서 그 보호자에게 고소권이 있거든요." "...?" "그런데 제가 보기엔 한국이 그 사람의 경우에는 범죄구성이 안 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한국이 설마 애들을 유괴했을 리도 없고, 스무살은 넘었을 텐데 그집 부모가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니거든요." "허면, 우리 행국이 애무하게 잡혀있다 이 말인가? 대명천지에 무고헌 양민을 잡아가두다니! 그놈들이 돈 빨아묵을 흑심으로 고연 수작을 부렸다 이 말이시." "그렇기야 할까마는... 글쎄요. 곡절없는 사연이 있을까마는 아무래도 께림칙하구먼요. 야리꾸리한 죄명도 그렇고... 사람 죽인 중죄인도 아닌데 다짜고짜 유치장에부터 집어넣는다는 것도 순리에 맞지 않는 것 같고... 어쨌건 으르신네가 경찰서장이란 사람을 한번 만나보신 담에라야 대책이 슬 것 같습니다." 이튿날 아침 노인은 행장을 꾸렸다.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를 다 뒤지고 장농 속에 감춰두었던 목합까지 모조리 훑었지만 아무래도 그것 갖곤 태부족일 것 같았다. 돈이라면 당장 죽을 목숨도 살려내는 세상이었다. 이장의 말대로라면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었다. 얼마간의 돈만 쓴다면 쉽게 풀려나리라 믿었다. 무단한 고초를 겪고 있을 자식놈도 자식놈이었지만 뒤에서 노심초사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며늘애기 될 처자가 걱정이었다. 한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누구하고 송사일로 울근거려본 적이 없는 노인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길마저 빙판길이었다. 서툴고 어색한 송사에 길마저 어둡고 미끄러웠다. 아무래도 이번 길은 혼자 나서기엔 버거웠다. 이장 갑윤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러잖아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선선히 응했다. 농한기에 바쁠게 뭐 있겠냐고 했지만, 일 때문이 아닐 것이다. 물길 머무는 대로 산자락 돌아드는 대로 정을 묻고 인심을 거둬 오손도손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울너머에 호박넝쿨이 손짓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마소가 찾아들고, 한여름 닭울음소리에 동천에 이는 태양이 제아무리 호들갑을 떨어도 허리춤께 담배연기 한가로이 피어오르는 곳이었다. 눈발 분분하고 낙엽 어수선하여, 일응 혼란스럽게도 보이나 계(季)와 절(節)의 오고감은 호리의 차이도 없이 순리와 질서에 따랐다. 23. 자물쇠가 없어도 곳간엔 손이 들지 않았고, 물 흐르듯 사람들의 행실엔 부대낌이 없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온 동네의 경사로 떠들썩했으며 부음을 접한 이웃들은 친상인 양 섦게 울었다. 이장이 곧바로 내려왔고 봉투를 내밀었다. "뭣인감?" "임시변통했구먼유. 울마 되진 않지만 우선 급한 대루 쓰시구 천천히 갚으세요." "각중에 어디서 이런 돈이..." 노인이 칙칙한 눈을 부비며 미안스러워했다. "동네 돈인게 이자 걱정은 마시구 쓰세요. 모질람 또 무슨 수가 생기겠죠." "크흘...고맙구먼. 이장 자네 은공은 내 죽었다 깨나두 다 못 갚을기여. 늙은이가 도와주기는 커녕 일일이 폐만 끼치고..." "아니유, 아녀.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신데요. 이기 어디 사삿일인가요. 니내없이 다 잘되자고 하는 일이데. 얼릉 일어나시지유. 차 뜰 시간두 됐구. 근데 이건 뭐래유." "쌀되박이나 실었구먼. 크흘...상귁이 그눔 요샌 당췌 기별두 ㅇ는게. 밥솥에 불이자 지피는지..." "으르신네도. 설마하니 핏줄 벌건 젊은것들이 굶기야 할려구요. 자자, 제가 들테니 어서 일어나시기나 하세요. 이차 놓치고 나면 점심참에나 있을까 말까 한데요." 노인이 일어섰고, 이장이 쌀자루를 울러멨다. 먼저 상국의 집부터 찾기로 했다. 상국이 이사 올을 때 한번 찾아가보긴 했지만 초행길이나 마찬가지였다. 전화라도 받으면 길을 묻기라도 하겠는데 여전히 전화는 먹통이었다. 한 겨울의 해는 점심 먹고 트림 한번 하고 나면 해거름이었다. 이장을 앞세운 노인이 상국의 집을 찾았을 때는 뜨뜻 미지근한 태양이 뉘엿뉘엿 식어가는 중이었다. 이장이 쌀자루를 힘겹게 부리며 이마를 훌쳤다. 어깨 언저리에서 김이 무럭무럭 올랐다. 잠바의 지퍼를 내리더니 펄쩍펄쩍 뛰었다. 이내 서늘한 한기가 목덜미를 훌쳤다. 휴후, 하고 숨을 고른 이장이 노인을 쳐다본다. 들어설 땐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한숨을 돌리고나니 그제서야 손끝이 허전했다. 무거운 짐을 내려논 탓만은 아닌 듯했다. 조용했다. 사람이 살았음직한 흔적이 아무데도 없다. 폐가인 듯, 그저 을씨년스럽기만했다. 숨통을 조여오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이장이 두어 번 기침을 쳤다. 부엌문이 삐그덕했다. 음산한 귀기가 풍경처럼 일렁거렸다. 이장이 손을 부비며 노인을 쳐다본다. "상국이 으르신. 빈집인가 본데요." 노인이 가래를 그렁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수심이 가득한 표정이다. 아무런 대꾸도 없이 봉당 위로 오른다. 마루를 건넌 노인의 눈길이 문고리에 멎는다. 주먹만한 자물쇠가 눈에 걸렸다. 24. "아가! 안에 아무도 ㅇ냐? 내니라. 애비가 왔니라." 노인이 쿨렁쿨렁 기침을 뱉었다. 그러나 안에선 기척이 없다. "크흘... 고이연 놈들. 집을 비워놓고 어델 그ㄹ게 쏘다니누. 도둑이 들어 홰를 쳐두 모르것다. 엔 눔덜 살림살이가 이다지 허술해서야." 노인이 마루에 걸터앉으며 혀를 끌끌 찼다. 그 모습이 어딘지 왜소하고 초라해 보였다. 이장이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무겁게 끌어올리며 노인의 곁에 앉았다. 기차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인 듯 잔숨결소리조차 생생했다. 상국이 유리창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오가는 행인들의 모습이 훤하게 비쳐들었다. 시내버스가 도착했는지 병원정문엔 들어오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러나 아내 은숙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행렬이 끊기자 상국이 눈을 내리깔았다.보일러에서 내뿜는 수증기를 노려보며 그가 이를 뿌드득 갈아부쳤다. 개에눔의 자식! 뗘 먹을 게 따로 있지 그 돈이 어떤 돈인데 털도 안 뽑고 그냥 꿀꺽하려 들어. 내 눈깔에 흙이 들어가지 전엔 어림없을 기다. 차라리 애들 불알에 밥풀을 뗘 먹는게 낫지 그래, 이 전상국이 노가다품을 훌치려들어! 수운 날강도 같은 자식! 주제하군. 꼴에 꼴갑을 떨구 자빠졌네. 뭐어? 주님을 대리해 교회를 운영하는 종교운동가라고! 에라이 썅, 날벼락을 맞아도 따따불로 맞을 새끼! 퉤에...! 상국이 버릇처럼 가래침을 퉤 뱉고보니 실내였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발로 침을 쓰윽 문지르자 지켜보고 있던 팔병신이 눈을 휘둥그래 떳다. "오잇! 거게 뭔 짓이여. 가래침 칵 한번 잘못 뱉으먼 벌금이 자그만치 7만 원이라고 안합디여. 길바닥에서 걸려두 7만 원인디 여긴 신성한 병원 내실인디. 키잇... 걸 의사선상한테 꽈박어? 말어?" 상국이 벌레 씹은 얼굴로 반백을 꼬나본다. 낄낄거리며 웃고있던 팔병신이 고만 자라목이 되고 만다. 성한 손을 회회 내저으며 그게 아니라는 시늉이다. 상국의 눈길이 창밖으로 향한다. 병원정문을 주시하던 상국이 기겁을 하며 놀란다. 눈동자를 가지껏 키우며 모가지를 있는대로 빼문다. 얼굴색이 대번에 흑빛이다. 깁스붕대를 덜렁거리며 부리나케 병상으로 돌아와선 죽는 시늉으로 끙끙거린다. 어찌보면 실성한 놈도 같고, 또 어찌보면 정말로 아파서 저러는 것도 같고.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반백의 팔병신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배짱은 아닌가보다. 병상에 누운 상국이 출입문을 뚫어지게 주시한다. 문이 열리고 상국이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뱉어야 할 침이라서 그런지 따갑기 그만이다. 기어이 일은 터진 것이다. 25. 노인이었다. 이제 도망갈 길이란 없는 것이고, 어쩌면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게 다행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돌배 그 자슥, 하는 일마다 형광등이더니 어쩔 셈으로 요번엔 벼락불이더냐. 오라, 그러고본게 그놈이 너 한번 엿좀 먹어봐라하는 식으로 있는말 없는말 몽지리 긁어모아설랑 뜨신물에 두부콩 불그듯기 냅다 불궈선,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겠다? 그러잖고야 신속대응군도 출동하자면 아무리 빨라야 1주일씩이나 걸린다는데, 한발이나 실히 빠진 눈구뎅이 속을, 느루실서 예까지 한나절참에 당도한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 아닌가. 그래, 이래 죽으라 저래 죽으나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냐고, 나오지도 않는 신음소리를 염병에 고뿔 앓듯 낑낑거리자니, 바야흐로 개전을 알리는 포문이 열렸겠다. "으르신 조오긴데요." 목표물의 위치를 탐지한 측지병의 말. "크흘...! 쥑일놈... 그래, 어딘감." 안개지대. 재차 사거리 확인을 청하는 주포수의 말. "조오기 누워있는. 잠이 들었는가 본데요." 허겁지겁 노인이 다가갔다. 앞서 도착한 이장의 표정이 안쓰러이 일그러진다. "이 사람 상국이! 어쩌다 이 모양으로 누워있는가. 쯧쯧...! 말이 아니구먼. 엉망이여." "끄으응... 아이구!" "이 사람아! 눈이나 떠보게. 으른이 계시네. 자네 춘부장께서 오셨어." 상국이 못 들은 척하며 일부러 신음소리를 크게 냈다. 이장이 다시 흔들어 깨웠고, 그제사 눈을 뜨며 놀라는 시늉이었다. "아, 아부지 아니세유. 어떻게 아시구..." 상국이 초주검이 된 얼굴을 해 가지곤 입을 딱딱 벌리며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노인이 손을 저었다. "그냥 있거라. 박씬가 하는 사람한테 다 들었다. 그 사람마저 ㅇ었음 이까지 찾아오도 못혔을 뻔혔고. 크흘... 지질이도 못난 놈덜! 그래 행국이 그놈은 은제부텀 저 지경이 되얏냐?" "운전수 그 자슥이 빗길에 과속하는 바람에...재수가 ㅇ어 그렇쥬. 그래두 고 자리에서 죽은 사람에 비하면 약과구만유 이만하길... 아이구야! 아이구...!" "얘기 들었니라. 현장에서 직사헌 사람도 속출혔다고. 쯔쯔... 우째믄 그렇게 하나같이 핀핀찮으냐. 한눔은 유치장에 갇혀있고 한눔은 병원에 누워있고. 이기 어디 사람새끼로 할 짓이드냐. 크흘... 니 성 행국이, 행국이 말이다. 대관절 무슨 죄를 졌길래 저 지경이 되얏는지 자상한 내용이나 들어보자. 얼릉 이눔아 말혀봐!" 순간 상국의 눈꼬리가 위로 치켜올라갔다. 26. 찡그리고 있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별 신음소리도 없이 상체를 벌떡 일으켜세웠다. 그리곤 노인의 면전에다 대고 소리를 꽥 질러대는게 아닌가. "난 그런일 하라고 시킨 적도 없고, 근처엔 얼씬거리지도 않았응께 궁금하면 직접 그 자식한테 가서 물어봐요! 내 그 자식이라면 꼴딱생이도 보기 싫응께 개목걸이 해 갖고 끌구가든지, 니약가에 싣구 밀구가든지, 입맛 땡기는 대루 알아서 하란밖에요. 그 인간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내가 이렇게 된 원인이 누구한테 있는지 알기나 하세요! 컥, 퉤에...!" 멀찍이 앉아서 그네를 지켜보고 있던 팔병신이 눈을 찔끔 감았다. 노인이 푸르르 노여워했다. 한껏 올라간 언성으로 상국을 꾸지람했다. "아니! 이눔이 얻다대구 지 애비 앞에서 눈깔 똥그랗게 치뜨고... 그래 이눔아! 그래도 니가 잘혔다고 방팔매기냐! 너만해도 그렇지 이눔아 그래,이 애비가 아무리 늙고 병들어 허깨비 같다군 하나 백날이 넘두룩 이꼴루 당혔으면서 전화 한통 못 넣냐. 땅이 꺼지면 무신 소식이라도 있것지, 오늘이나 내일이나 기별이 있을기라고 그래도 내 딴엔 모가지를 황새맨치로 빼물고 이날 엽때껏 기다렸다. 통지하기가 싫음 받기라도 혀야 쓸것 아니것냐. 그 잘난 니 처는 어디다 팔아묵고 맨날 빈집으로 세워둬! 그럴 냥이먼 전화통을 지워뿌리던지. 심악한 말 같다만 그래 갖구야 어디 살림 꼬라지가 되것냐. 자고로 여자란 행실이 진득혀야 하니라. 안에서 새는 쪽박 나가선들 아니 새것냐. 크흘... 허고, 행국이 그놈 역시 마찬가지다. 니눔이야 쌈박질이 드세서 그렇지 마른 갱변에 갔다놔도 풀은 뜯어묵고 살 것 아니냐. 허지만 그놈은 달러. 오죽이나 핀핀찬었으면 니눔 그늘에 ㅁ겼것냐. 이제야 말이다만, 내 그놈 내보내고 하룻밤인들 두 발 피고 자본 적 ㅇ다. 숙흥야처 숙흥야처, 말 그대로 날이 밝았거니 깨어나보면 그래도 창살은 암흑칠야. 이제나 저제나 뒤척이다 눈을 떠보면 천정에선 쥐들만 득실거리고... 그런 중에도 설마하니 지 동생이 등잔겉이 지키고 있는데 무신 변이야 있을라고 억지태평이었디니라. 헌데 구속통지서라니... 억장이 무너지고 애간장이 녹아 할 말도 못하고 있는 애비 앞에 이눔아! 아무리 철부지기로 눈깔을 치뜨고 댐비는 행우가... 이장! 가세. 지 하나빼끼 모르는 이런 눔을 두고 긴말해봐야 시간 낭비여." 상국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다. 짧은 침묵이 길게 이어지고, 이장이 나선다. "고만 하시지유. 으르신네. 상국이 이 사람도 오죽 속이 상했으면 막말까지 나왔을라구요. 허고 자네도 그려, 암만 병중이라곤 해도 그렇지 좀 지나치질 않나.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게." 상국이 기어드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27. "잘못했구먼유 아부지. 지가 요샌 눈에 백태가 끼었는지 흐릿해설랑..." "되얏다. 이적지 병원에 묵혀 있었다니 오죽허것냐. 입원비도 솔찮이 들텐데 대책은 세워놨냐?" "교통사고라 근 걱정ㅇ구먼요. 한국인...저두 세세하겐 모르지만, 석배 갸 말룬 길바닥에 있는 노인네를 납치해서는...모르겠어유 저두." "아니! 그럼 한국이 색시감 땜에 그런 것이 아니고?" 노인보다 이장이 먼저 놀랐다. 상국이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허어...! 그렇담 이거 낭패 아닌가. 우린 또 한국이, 색시를 데리고 야밤도주했다는 말에 그집 부모들이 들고 일어선줄 알았지. 어째 육법전서에도 없는 경우가 있는가 의아하긴 했지만서도. 허, 이거야. 자네야 굴신도 못하고 이렇게 누워있으니 그렇다치고, 그래 자네 이자 석배라고 했나? 양모를 제 친어미가 아니라구 죽실나게 두들겨패군 집을 뛰쳐나간, 그 왜 웃실 살다 돌아간 갑자 수자 되시던 으른의 자제를 말함이 아닌가?" "기가 맞구먼유. 집이루 연락두 갸한테 ㅁ겼는데... 항국이 잽혀있다구." "아닐세. 우린 경찰서장이 보낸 구속통지서를 보고 알었네. 경위야 어찌됐건 일이 난감하게 됐으이. 허... 큰일은 큰일이로세. 큰일이야." 그제사 노인이 무슨 말인지 눈치를 챈 듯싶었다. 노인이 칙칙한 눈을 부비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이 말이구먼유. 지는 색시될 사람네 부모가 고발한 줄 알았는데, 이 사람 상국이 말룬 행길에 있는 노인을..., 자네 뭐라고 했나? 납치라고 했었나?" "석배의 말룬 약취라고 하던데 그말이 그말이람서요. 어떤 회사 있을 때 저지른 일인가 본데, 글세...저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노인을... 부녀자들이라면 술집에다 팔아먹을라고나 한다지만..." 상국이 말끝을 흐렸다. 노인이 상국의 곁으로 바투 다가 앉았다. 이쯤 됐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기왕 온날 바엔 다 털어놓는 게 속 편할 일이었다. 상국이 거간의 사정을 애기책 읽듯 구술했다. 날조된 맞선이란 것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교통사고와 한국의 구속에 이르기까지, 차분한 어조로 담담하게 읽어내려 갔다. 노인의 한숨소리가 갈수록 길어졌고, 이장의 얼굴 또한 굳어져만 갔다. 말을 다 끝낸 상국이,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의 입장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묵중한 침묵만이 그들 셋의 주변을 애워싸고 있을 뿐, 아무도 말이 없었다. 28. 변기통 옆에 앉아 있던 한국이 부동자세를 취했다. 말라깽이 늙은이가 이쪽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어둠침침한 마루바닥을 스적거리며 기어오는 품이 꼭 너구리를 닮았다. 가까이 다가온 놈이 낄낄거리며 흉물을 떨었다. "난 암만해두 믿지를 못 하겠다. 내,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이 말이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냐? 여관에서 하룻밤을 잤다면서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한국이 구치되던 날부터 이제껏 반복되는 질문이었고 대답이었다. 구치소에서의 신고식이란 별게 아니었다. 자신의 이력을 간단히 소개했다. 그리고 나서 구치소에 수감되게 된 경위를 무용담 형식으로 들려주는 거였다. 한국이 얘기를 다 마치고 나자 말라깽이 중늙은이가 거짓말 말라는 식으로 따졌다. 지금 물은 말과 똑 같았다. 주연실과 합숙을 했다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라는 투였다. 그자보다 나이가 조금 적어 보이는 뚱뚱보 역시 믿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조용한 사람은 그중 제일 젊은치였는데, 그자는 들어올 때나 지금이나 한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꼿꼿이 앉아 책에만 눈을 박고 있었다. 구치소 안의 일 따위는 아예 관심도 없다는 태도였다. 한국이 신고식을 마친 이후로 말라깽이와 뚱보는 좀 심심하다 싶으면 꼭 같은 질문이었다. 저들이야 심심풀이삼아 해대는, 죽실하게도 지루한 시간이나 때우자는 심산으로 묻는 말이겠지만, 한국으로선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한국이 눈말 멀뚱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니 이번엔 뚱뚱보가 히죽 웃으며 끼어들었다. "거 노형도 어지간하슈. 여자가 여관방에까지 따라들어올 땐 다 생각이 있었을 거고, 굴러들어온 떡을 걷어찰 등신이 어느 세상에 있겠소. 얌마! 거 말 같지 않은 소리 그만하고, 니눔이 아무리 잔대가리 굴려봐야 부처님 손바닥이다. 괜히 닭장 속에서 개똥 싸지 말고 솔직히 말해봐라. 몇 번 했냐?" 뚱보가 말라깽이 곁으로 왔다. 협공할 셈인가보다. 한국이 왕방울 같은 눈을 꿈벅거리며 뒤로 주춤 물러난다. 하지만 더는 물러설 곳도 없다. 옆은 뺑기통이었고 벽이 얼음장처럼 차가왔다.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조용히들 합시다. 개눈엔 똥만 보인다고, 세상이 다 그런 건 아니오. 자유! 자유란 말이오! 스스로 말미암아 거칠 것이 없으니, 오! 한곳을 머무름에도 썩지 아니하고 이곳 저곳을 바삐 휘돌아쳐도 지극한 화평을 이루나니, 대자유를 사상하시오!" 책을 보고 있던 젊은이였다. 그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부르짖 듯 소리쳤다. "옘병할 자식...! 또 그놈의 미친 개소리." "씨부럴 눔. 송판 깔구 앉어서 문자 쓰고 자빠졌네. 뭐? 자유...? 푸리섹스라구 해라." 29. 말라깽이와 뚱보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하건만 젊은치는 여전히 책에다 눈을 박고 있었다. "오, 구원하소서. 다 이 죄인의 잘못이오니 저들을 시험하지 마시고 오직 악에서 구하옵소서. 머물러 썩게 하시되 한알의 밀알이 되게 하시고 채찍질하여 고행으로 삼으시되 진리를 고뇌하게 하소서. 암흑을 광명으로 역사하심과 같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저들의 눈을 뜨이게 하소서. 아멘." 그가 성호를 그었다. 뚱뚱보가 성난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때 쇠창살이 따닥거리며 흔들렸다. "전한국! 면회다." 구치소 안에 갇혀 있던, 젊은치를 제외한, 모든 눈들이 밖으로 향했다. 당번경이 철문을 따며 냅다 고함을 질렀다. "당신들 두 양반. 계속 주시하고 있는데 정 그렇게 나오면 독방이야. 독방이 어떤 곳인지는 나보다 근무기간이 오래되시는 분들이라 더 잘 아실테고. 저번에 내가 쌍소리 좀 했다고 나한테 뭐랬는지 기억하실걸. 문민시대에 언어폭행이 왠 말이냐고. 보긴 누굴 봐! 당신말이야 당신. 유부녀 간통! 고매하신 문민시대의 죄수님이라 요번은 봐 드리는데, 그렇게 꼬장부렸다간 각오하라고. 당신 두 양반 모실 독방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당번경의 눈이 이번엔 전한국을 향했다. "빨리 서둘러! 귀한 손님인 것 같더라." 뚱보 일당을 대하던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험상궂던 얼굴 대신 미소를 띠었고, 반말이긴 했지만 어딘지 부드러웠다. 잘못 된 것이 있더라도 면회신청자에게는 잘 말해달라는 투 같았다. 그제사 한국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면회라니. 귀한 손님이라니. 누구란 말인가. 감이 서질 않는다. 그럼 또 그 여자란 말인가. 어제였다. 면회라고 하길래 김석배인 줄 알고 나가보았더니 생판 처음 대하는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을 신옥비라 했다.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면서 울먹였다. 그제서야 어렴풋이 떠오르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비가 왔고 차가 굴렀었다. 피투성이가 된 상국이 난쟁이를 살려야 한다고 부르짖던 소리가 쟁쟁했다. 한국이 그때의 광경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참혹했다. 아수라장으로 뒤엉킨 시체들이 지금도 헛구역질로 올라왔다. 민우라고 했었지. 그래 민운가 하는 애는 어찌 되었느냐고 물어볼까 하다간 입을 다물어버렸다. 두개골이 으깨어진 채 죽어 있던 어린애의 모습이 화인처럼 찍혀왔다. 몸은 어떠냐고 묻자, 그녀는 되려 무슨 일로 이렇게 갇혀 있냐고 이쪽을 걱정했다. 30. 한국이, 이젠 거의 외우다시피한 사건의 대강을 말하자, 다 듣고난 그녀는 안쓰러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수로운 일이 아니니 걱정 말라고 했다. 옥살이 하기가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으라며 보호자 같은 말을 했다.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다녀간 후 계속 사식이 들어왔다. 한국을 대하는 담당경찰의 태도가 전에 없이 깍듯해졌다. 그랬었는데 그녀가 또 찾아왔단 말인가. 예의상 한 번이면 되었지 자꾸 찾아온다는 건 부담이었다. 한국이 걸었고 당번경이 뒤에서 지켰다. 면회장으로 들어서려던 한국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뒤따르던 경찰이 등을 밀었지만 한국은 돌덩이처럼 꿈쩍도 안했다. "아부지유...!" 한국이 노인을 불렀지만 입 안에서 뿐이었다. 한국이 노인 쪽으로 걸었다. 축 쳐진 몰골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 같았다. 고개를 푹 떨구며 노인 앞에 섰다. "자네가...자네가 내 아들 행국인감. 어디 얼굴이나 보세. 크흘..." 노인이 이중막으로 된 유리창을 뜯으며 실성한 듯 부르짖는다. 한국이 고개를 들었다. 굵은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부지유...! 용서하세유. 지가 잘못해설랑..." 노인의 눈에서도 눈물이 맺혔다. 한동안 말없이 한국을 지켜보고 있던 노인이 힘겹게 입을 연다. "이눔아, 요즘 시상이 어뜬 시상인데 죄를 저질르고도 무사할 것 같았드냐. 아무리 세상물정에 눈이 어둡다기로 그래, 남이 시킨다고 생각ㅇ이 덥석 일을 저지르다니... 내 겉은 노인네를 강제루 납치혔다는데 그기 참말이드냐? 이유는 뭣이고? 대체 어뜬 놈들이드냐. 숙맥 겉은 니눔을 축축거려 함정으로 걸고 넘어진 놈들이...!" 한국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복지원에 실장님이... 집두 절두 ㅇ는 노인네들을 데리고 오면 편안히 모신다구... 돈까지 주구설랑... 흐흐흑...! 전 그저 아무 것도 몰랐구먼유. 흐윽!" 한국이 훌찌럭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기가 막히다는 듯, 노인이 허허 웃었다. "허허...그려, 이 애비 불찰이니라. 과욕이시...애초 상귁이 그눔한테 일을 ㅁ긴기 잘못이고. 크흘...! 그래라. 세상일이 어디 지 맘대로 만만한 기 있겠드냐. 액땜혔다고 치는 게지... 이만큼 살아 있으니 되얏다." 노인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를 혼잣소리를 중얼거렸다. 겉으로 웃기는 했지만, 그 목소리는 하염없이 허허로운 것이어서 차라리 비애마저 느끼게 했다. 노인이 눈가에 칙칙한 물기를 걷어내며 한국을 타일렀다. 31. "욱하는 객기 부리지 말고, 진득이 참고 있거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녕은 있다고 혔거늘 설만들 징역살이 오래야 가겄냐. 여그 이장하고 백방으로 궁리를 하고 있응께 너무 속 태우지 말고. 허고, 뭐니 뭐니 해도 몸보전이 젤이니라. 알것냐? 뭔 말인지. 맴 단단히 먹으란 말이니라. 이렁저렁 잡생각일랑 말고." 한국이 어린아이처럼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크고 딱했던지 곁에서 기록을 맡고 있던 당번경이 한국의 어깨를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그만 가시죠. 으르신." "그려... 그럼세. 있어봐야 억장만 무너지고. 종생에 이르러 이 무신 흠한 꼴인감." 이장을 앞세운 노인이 구치소 문을 나서며 뒤를 돌아본다. 바람이 휘익 불고, 눈보라가 얼굴을 가렸다. 땅이 한없이 꺼지는 것을 느끼며 노인이 어렵게 어렵게 이장의 뒤를 따랐다. 아무리 걸어도 구치소 건물은 작아지지 않았다. 작아지기는 커녕 어깨가 너무도 무겁고 다리가 끌려, 마치 구치소 건물을 짊어지고 가는, 그런 기분이었다. 노인이 어렵게 눈을 들었다. 두타산이 아득히 일렁거렸다. 바람기둥이 뿌옇게 몰려오고 있었다. 태백산맥에서부터 시작된 그 바람기둥은 막 까치재를 넘고 있었다. 거대한 분노였다. 버림 받은 인간과, 신들이 울부짖는 절규이기도 했다. 온 세상을 한꺼번에 쓸어덮을 듯이 휘몰아치는 거대한 바람기둥을 바라보면서 노인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11. 덫 1. 김석배가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경찰서 담당형사의 말도 있고 해서 당일로 그녀를 만났었다. 그녀 쪽에서도 경위야 어찌되었건 미안하다며 고소를 취하하기로 합의를 보자고 했다. 오늘이 바로 합의서에 도장 찍고 합의금을 건네주기로 한 날이었다. 모든 시름이 해결된다는 안도감에 김석배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목화꽃같이 푹 퍼진 햇발이 더 없이 푸근했다. 일부러 한적한 곳을 택해서 그런지 사람들은 없었다. 구석진 자리에 앉은 김석배가 속호주머니를 뒤적였다. 합의서와 도장과, 그리고 수표가 만져졌다. 그녀가 들어왔다. 김석배가 일어서며 아는 체를 했다. 어딘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당당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어딘지 왜소하고 초라해 보였다. 생각 때문이겠지. 이제는 모든 게 해결된다는 안이함 때문이겠지. 김석배가 히죽 웃으며 꾸벅 수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고개를 슬몃 틀며 머뭇거렸다. 김석배가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200만 원이 든 수표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말씀드린 대로 200입니다. 다른 말씀 마시고 받아두십시오. 저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워낙 술이 취해 저지른 일이니 고깝게 생각마시고 재차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받을 생각을 안 했다. 김석배가 의아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다. "왜 그러십니까. 이제 와서... 설마 다른 말씀 하실려는 건 아니겠죠." "그게... 말씀드리기 좀 곤란한 일이..." "뭐요?" 김석배가 펄쩍 뛰며 눈을 뚱그렇게 치떳다. "솔직히 말해서 이백이면 그리 적은 돈도 아니잖습니까. 아가씨나 저나 다 같은 영세민끼리 다른 일도 아니고 술 먹고 실수한 걸 가지고."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합의보기 힘든 일이 중간에 생겨서..." "무슨 말이오! 합의보기 힘든 일이라니! 나원 이거야...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제 와서 이러면, 그래 날 꼭 유치장에 가둬야 속이 시원하시겠소!" 김석배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식식거리는 품이 당장이라도 주먹질이 나갈 기세였다. 그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는 듯 곤혹스러워했다. "그런 게 아니라... 갑자기 일이 생겨서..." "나야 이거 환장하겠네. 글쎄 그 일이란 게 도대체가 뭐냐 이 말입니다. 돈이 적다면 톡 까놓고 말씀하시란 말밖에요. 자자, 그러지 마시고 우선 이 돈부터 받으시고 합의각서에 도장이나 찍읍시다." 김석배가 수표봉투를 이경희에게 강제로 쥐키며 합의서를 꺼냈다. 2. 바로 그때였다. 문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서너 명의 젊은이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모두가 작업복에 잠바 차림으로 불량기가 농후했다. 그 중에 한 명이 껌을 지근지근 씹으며 김석배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며 외면했다. "어이, 형씨! 합의 안 보겠다는 사람한테 구태여 합의서에 도장 찍으라는 심사는 뭐유? 얻어 터진 것만 해도 억울한데 거기다 이젠 공갈까지 치시겠다 이 말인가. 술집에서 웃음 좀 팔고 있다고 그렇게 막 보셔도 된다 이 말씀인데 어디 좋으실 대로 해보시지. 퉤에...!" 사내가 껌을 바닥에 뱉었다. 김석배가 어이없다는 듯 사내를 쳐다봤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사내가 흐흐 웃었는데 이빨 사이로 금니 하나가 누렇게 비쳤다. 사내가 자랑스럽게 뒷덜미를 쓰다듬었다. 목젖까지 그어진 칼자국이 섬뜩하게 떨어졌다. 김석배가 마른침을 삼키며 더듬었다. "당신이..., 댁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우린 이미 합의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소. 이건 강압도 아니고 공갈은 더욱 아닙니다. 더구나 댁과 이 일과는 무관하니 비켜주시죠." "어쭈, 짜식이야 이거 눈깔에 백태가 끼었나. 야! 느덜 일루 와서 이 어른 손 좀 봐드려야쓰겠다. 북어 대가릴 꽈 드셨는지 아가리부터 다물게 해드려라." 사내가 느물느물 웃으며 손짓을 했다. 팔짱을 끼고 있던 나머지 두 명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왔다. 두 놈이 김석배의 주변을 애워쌌다. 김석배가 놀라며 일어서려했지만 그의 어깨는 이미 놈들의 손에 짖눌려 있었다. "쨔샤! 이 어른이 뉘냐고 물으셨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이거 눈 앞에 뵈는 게 없나. 얘들아!" 사내가 턱짓을 주억거리자 한 놈이 히죽 웃으며 김석배의 옆구리를 내질렀다. 피할 사이도 없이 얻어맞은 김석배가 허리를 감싸 안았다. 사내가 어깨를 툭툭 치며 장난기 어린 농을 걸어왔다. 마치 어른이 애들을 다루는 식이었다. "눈깔 똑바로 뜨고 모셔라 잉. 내가 바로 이분 보호자 되시는 분인게. 알겄냐!" 김석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금니를 욱신 깨물고는 당장이라도 대들 기세였다. "우리 말루 합시다 말루. 치사하게 떼거리로 댐비지 말고, 순리대루 합시다." 사내가 가소롭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엇쭈야. 맞장 한번 까보구 싶다 이거냐. 크흐흣! 알겠다 알겠어. 숙녀분 앞에서 가우다시 좀 하시겠다 이 말씀인데? 거 좋지! 그러잖아도 손이 근질근질하던 판인데. 어이!" 3. 사내가 손가락을 우두두 꺾으며 테이블에 앉아있던 여자를 내려다봤다. 그녀가 흠칫 놀라며 일어섰다.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사내가 다시 한번 턱짓을 보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곤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닌가. 출구 쪽으로 사라지는 여자를 확인하며 사내가 김석배 앞으로 다가왔다. 김석배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다급해진 그가 카운터 쪽을 쳐다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저들끼리 사전에 어떤 묵계가 있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김석배 앞으로 사내가 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어이, 형씨! 그렇게 앉아 있지 말고 워밍업이라도 좀 해두시지. 언눔 눈치볼 것도 없고, 호젓하게 단둘이만 남았응께. 심판은 야들 둘이 봐줄 테니 멋지게 한판 붙어보자고 잉!" 곁에 있던 놈이 정강이를 걷어찼다. 다른 한 놈이 어깨죽지를 잡아챘다. 그러나 김석배는 이렇다 할 끽 소리 한 마디 못하고 저들이 하는 대로 당하고만 있었다. 초라니에 놀란 허깨비처럼, 또는 풍랑을 만난 똑딱선처럼 허우적거리던 김석배가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더듬거렸다. "아, 알겠습니다. 그분하고 합의 보겠다는 거, 없던 일로, 즈... 증말입니다. 맹세코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제가 몰라뵙고 죽을 죄를 졌습니다. 요번 한번만 봐주시면... 제발..." 사내가 방금 나간 이경희의 자리에 앉으며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쨔아식. 진작 그랬어이지. 전과를 뉘우친다니 요쯤으로 해둔다만, 명심혀라. 앞으루 한 번만 더 갸 앞에 얼쩡거렸다간 니눔 맥동가질 아주 콱 분질러놔부릴팅께. 알겄냐. 합의가 어쩌고 개나발 불었다간 고날로 사잣밥이다 잉! 죄를 졌음 마, 벌을 받아야지 쨔샤! 가봐." 김석배가 올가미에서 풀려난, 말복참에 개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막 출구를 빠져나가려는데 사내가 그를 불러세우더니,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만 오늘 있었던 일 말이다. 아가리 잘못 놀렸다간 무고죄고 지랄이고를 떠나서, 크윽! 퉤에...!" 하더니 휴대하고 있던 도검을 벽쪽으로 날렸다. 희끗한 도검이 벽에 꽂히면서 부르르 진저리를 쳐댔다. 김석배가 어깨를 숙이는가 했는데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두 놈이 허리가 끊어져라 웃어젖혔다. 사내가 카운터 쪽으로 갔다. 전화기 앞에선 사내가 웃고 있는 그들을 향해 턱짓을 했다. 작은 키가 출구 쪽으로 뛰었다. 밖을 둘러보고 난 작은 키가 사내에게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내가 담배필터를 질겅질겅 씹으며 수화기에다 대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접니다. 단칼." "결과는! 결과만 말해봐." 전화선 저쪽의 사내가 다급하게 외쳤다. 4. "장사 한두 번 하슈. 그나저나 김 샜수. 제기랄!" "뭐야! 어찌됐길래?" "올챙이 한 마리 잡는데 꼭 나까지 나서야 했냔 말이우. 풍끼가 과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너무했수다." "잔소리 집어치우고. 그 자식은?" "보냈수. 그냥. 손 볼래야 볼 데가 있어야 말이지." "뭐야! 보내! 그럼 말루만 쳐발랐다 이 말이냐!" "그렇게 됐다는데두요." "에라이, 비영신 겉은 자식! 내가 임마 뭐라구 했냐. 갈빗댈 하나 분질러 놓든지 허리통을 꺾어놓기 전에 풀어주지 말라구 안 했어! 근데 제발루 걸어나가게 놔뒀다 이 말이냐! 세 놈씩이나 따라붙어서 겨우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야! 복 받겠다. 복 받겠어. 커억! 벼엉신덜.... 현장 없애고 별명 있을 때까지 대기해!" 저쪽에서 수화기 매치는 소리가 덜컥했다. 사내 역시 들고 있던 수화기를 집어던지듯 팽개쳤다. "개애샛기! 엿 먹어라 새꺄. 와리는 지눔이 다 띵고 쳐먹으면서. 에이, 쓰발...!" 그들이 나가자 벽장 문이 열리면서 주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놓여진 기물이 이상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가슴을 쓰다듬으며 휴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 유리창이 와장창 요동쳤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사태였다. 야실야실하게 놓여져 있던 하늘 한 귀퉁이가 맥없이 나동그라지면서 거대한 눈사태를 만들고 있었다. 첨병은 바람이었다. 웅웅 노호하면서 불어닥치는 바람은, 한 묶음으로 와서는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졌다. 갈래갈래 휘갈겨진 바람 끝은, 마치 은사시나무의 나뭇단처럼 날이 서고 모가 져서, 살갗에 닿을 때마다 살점이 저미고 핏줄이 토막 쳐지는 것 같았다. 그 토막 쳐지고 으깨어진 몸뚱이 위로 천만 근의 눈덩이가 포효하는 사자의 무리처럼 짖쳐들었다. 눈물이 나도록 반짝이는 눈가루는, 백색의 마분(痲粉)인 듯, 찢기고 헤진 살점을 타고 들어가 온 몸을 뻣뻣하게 얼어 붙였다. 한바탕의 바람이 훑고 지나가자 고사목처럼 흔들거리던 김석배가 푸르르 몸을 떨었다. 바람과 눈보라로 혼돈에 빠져있는 대지처럼 온통 혼란스럽기만 했다. 고입시험 치르던 날 아침처럼 그저 어리뿌옇기만 했다. 바람이 옷깃을 스치자 지레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5. 200만 원이라면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파격적인 제안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합의하기를 거부하다니. 갑자기 들이닥친 괴한들은 누구이며, 어쩌자고 폭력부터 앞세우려 했을까. 그들의 말로는 그녀의 보호자라 했으나 그녀는 겁에 질려 있는 듯했고 되레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들의 정체는 무엇이고 숨겨진 저의는 무어란 말인가. 김석배가 뒷덜미를 더듬거렸다. 은사시 같은 바람줄기를 타고 사내의 칼 맞은 흠집이 퍼뜩 떠오른 것이다. 으시시한 한기를 느끼며 김석배가 뒤를 돌아다봤다. 그리곤 쫓기듯 잰걸음을 쳤다. 방유석이 아주 못마땅하고 불쾌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씨광하게 앉아 있던 그가 회장실 쪽을 흘끗 쳐다봤다. 턱을 쓰다듬더니 일어서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도로 앉았다. 무언가 주저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회장실과, 전화통을 번갈아 노려보더니 결심이라도 한 듯 일어섰다. 밖이 내려다 보였다. 그물망이 눈에 나타났다. 유태중 전용의 골프연습장이었다. 회의실을 지나자 '출장중'이란 표찰이 내걸린 회장실 문이 다가섰다. 방유석이 문을 두드린다. 아무런 대꾸도 없다. 그러나 '출장중'이란 표찰과는 달리 회장 유태중이 안에 있음을 안다. 실제로 출장 중이라 해도 장지연은 있을 것이다. "접니다 회장님. 방 실장입니다." 말소리를 직접 듣는 사람은 비서실 장지연이겠지만 그렇게 통명하는 것이 관례였다.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문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려댔다. 그바람에 표찰이 떨어졌고,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안에 계시겠지?" 장지연이 고개를 저었다. 옷이 흐트러져 있었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숙이며 장지연이 무참해 했다. 그러나 그런 것에 개의할 방유석이 아니었다. "긴한 일이야. 나라구 전해." 문이 도로 닫혔고, 방유석이 신경질적으로 패찰을 걷어찼다. "들어오시랍니다." 장지연이 문을 다시 열었을 땐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래 급한 보고란 무엇인가?" 유태중이 근엄하게 물었다. 방유석이 속으로 쓰게 웃으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다름이 아니오라 저어..." 방유석이 주연실 쪽을 흘끔거렸다. 유태중이 주연실에게 나가보라는 손짓을 보내며 방유석을 바라보았다. 썩 좋지 않은 기분인 듯 콧구멍을 후볐다. "말해보게. 무슨 일인지." 6. "극락교회의 일이...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닌 듯싶습니다." "뭐야! 극락교회? 신축건물은 내년 봄에 가서 마무리 짓기로 하지 않았나? 인부임을 제외한 대금결재는 그때 가서 하기로 하고." "그게 아니라 김 목사의 말에 따르면 장일섭 목사를 비롯한 일부 교회 목사들의 동태가 심상찮다는... 인수할 때부터 잡음이 있긴 했습니다만 요즘 들어 부쩍 더한 것 같다고..." 유태중이 펄쩍 뛰었다. 장일섭이라면 그전부터 담임목사로 있던 사람이었다. 김주연에게 실권이 넘어가긴 했지만 교회내부 서열은 여전히 1위를 고수하고 있었다. 성격이 과묵하여 동료 목사들과의 사이가 원만하기도 할뿐더러 충직한 하나님의 종으로서 신도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유태중이 좋아할 리 없었다. 그가 극락교회를 인수한 데는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어서였다. 설명하자면 종교사업을 빙자한 비리재산의 은닉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신도들의 호주머니를 긁어내어 축재의 수단으로 삼자는 속셈이었다. 교목이나 교리들의 인건비만 들이면 세금도 없었다. 말 그대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장사라 믿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음흉한 흉계가 있었으니, 바로 교주의 자리에 올라서는 것이었다. 간단했다. 성경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대신 자신의 이름인 '유태중'을 갈아 끼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서서히 도모하면 될 것이라 믿었었다. 김주연이란 유능한 전도목을 얻고보니 의외로 수월하게 생각되었다. 그런데 웬걸 가당치도 않은 장일섭이 버티고 있질 않은가. 계약으로 고용된 교직자들이야 어떻게든 길들여보겠는데 일반신도들은 그게 아니었다. 장일섭의 말이라면 껍벅했고 신도회 자체가 그의 손 안에서 놀아났다. 몇 번인가 퇴직시키려고도 했었지만 그때마다 신도회의 반대에 부딪쳐 번번히 무산되고 말았었다. 교회의 주인은 유태중 자신이면서도 정작 그에 고용된 일게 목사 하나도 어쩌지 못하는 입장이었다. 자연 극락교회의 장일섭 목사 얘기만 나오면 편두통에 바람니 앓듯 얼굴부터 찡그리게 되는 유태중이었다. "뭐야!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그만큼 하자는 대로 해줬으면 됐지, 또 뭘? 양심선언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내 진작에 이것들을 잘랐어야 하는 건데. 방 실장! 그래 김주연이 뭐라고 하던가! 그 사람도 그 사람이지만 자네도 마찬가지야. 무슨 대책이 있어야 할 거 아닌가. 언제까지고 이렇게 질질 끌려다니만 할거냔 말일세." 유태중이 분을 이기지 못하여 나오는 대로 소리를 질러댔다. 7. "교리 임야 건에 복지원 사건에 겨우겨우 틀어막아놓으니 이번엔 또 교회가 말썽이라니, 이래 가지고서야 어디 누굴 믿고 일을 하겠나. 그래 김 목사 그 사람 뭐라고 하던가? 급한 일이라니 들어보기나 하자고." 방유석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자신 역시 기분 나쁘긴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뿐, 끓어오르는 속이야 유태중 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제 발로 걸어들어온 김석배 그놈을 고스란히 놓아보내다니. 병신 같은 자식들... 주먹 자랑하는 놈 쳐놓고 열까지 셀 줄 아는 놈 없다더니, 하나같이 돌대가리들이니... "그 작자들이 교회라도 때려부실 음모라도 작당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집단 탈교라도 해서 교횔 쪼가리 내겠다는 건가! 구체적인 어떤 말이 있었을 것 아닌가." "차라리 그런 일이라면 처리하기가 쉽겠습니다만. 해고시킬 명분도 생길 것이고... 그게 아니라 반대로 교회를 살리자는 운동을..." "교회를 살려...? 교회를 살린다면 좋은 일 아닌가? 그러잖아도 허덕거리는 재정인데 그네들 뜻이 그렇다면 박수를 치고 환영할 일이고. 난 또 급한 일이라기에 가슴이 철렁했지." 유태중의 얼굴이 밝아질수록 방유석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저두 처음엔 그런 취지인 줄 알았습니다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그와는 정반대인 것 같습니다. 김 목사가 전하는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현재의 교회 운영이 불합리하고 엉망이니 현재의 교회 체제를 몰아내고 그 전의 교회로 다시 돌아가야 한답니다. 결국 교회를 살리자는 말로 교묘히 위장을 하고는 실제로는 교회를 망하게 하자는, 아주 불손하고 불온한 작태들인 것 같습니다." 유태중이 입을 쩍 벌린 채 안절부절못했다.이어 양미간을 찡그리더니 꽥 언성을 높였다. "그렇다면 겉으로 물을 주는 척하며 교회를 말려죽이겠다? 어쩐지 월급 올려주는 것도 마다하고 반납하더라니. 교활한 놈들...! 짤라버려! 장일섭은 물론 거기에 가담했음직한 낌새가 보이는 놈들은 무조건 사표부터 받아!" "지금은 그렇게 강경노선으로만 치닫는다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복지원 사건도 매듭짓지 못한 터에... 먹은 게 죄라고 경찰 쪽에서야 어쩔 수 없으니까 우리를 봐주는 척하고 있긴 합니다만, 약효가 언제까지고 지속되리란 보장도 없는 노릇이고...제 생각으론." 방유석이 유태중의 곁으로 바투 다가섰다. 그리곤 무슨 말인가 유태중의 귀에다 대고 소곤거렸다. 유태중이 방유석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주 흡족하게 웃었다. 8. "좋아, 좋아요. 내 이래서 방 실장 아니면 허재비라니까. 모든 걸 방 실장 자네에게 맡길 터이니 은밀하게 추진하라고. 놈들에게 눈치 채이면 오히려 역공당할 수도 있으니까 너무 성급하게 대들지 말고."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둘의 얘기가 끝났으므로 방유석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떴다. 여늬 사무실 구조와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회장실과 개인비서실은 붙어 있었다. 때문에 비서실을 통과하지 아니하고는 회장실로의 출입이 어려웠다. 비서실로 들어서려던 방유석이 주춤했다. 처음 대하는 낯선 여자가 꼭 저처럼 그렇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장지연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금 전에 노크를 한 사람은 장지연이 아니라 이 여자였단 말인가.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무도 없길래... 안에 회장님 계신가 하구요. 오늘 시간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전상국의 아내 박은숙이었다. 그러나 방유석으로서는 그녀가 누군지 알 리 없었다. 고개만 그냥 까닥해 보이곤 못볼 것을 보았다는 표정으로 휑하니 나왔다. 나오면서 방유석이 속으로 혀를 찼다. 보나마나 또 유태중의 낚시에 걸려든 것이리라. 몸은 몸대로 망치고 필경엔 떨거지가 될 신세. 애ㄲ게 당한 여자가 어디 한둘이랴만 방유석은 그런 그녀들을 볼 때마다 차라리 분노가 앞섰다. 노총각으로 남아있는 열패감이랄까 투기심 같은 게 발동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한순간의 쾌락을 즐기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이 짐승처럼 느껴졌고, 역겨운 구토증이 일었다. 장지연에 대한 생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겨울에도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는 그녀였다. 불끈불끈 솟구치는 정욕이 아주 없을 수야 있을까마는 그때마다 유태중과의 낯 뜨거운 정사장면이 떠올라 지레 눈을 돌리고 마는 방유석이었다. 은숙이 들어서자 유태중이 반색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박은숙 씨." 은숙이 상기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도 어린 소녀처럼 뛰는 가슴을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부르는 '박은숙'이란 호칭 때문이리라. 어떤 신선한 충격과 함께, 자신의 나이가 한 절반쯤은 줄어 다시 처녀가 된 기분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바깥 날씨가 퍽 추울텐데 본의 아니게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거. 두 번 걸음을 시켜드려서." "아뇨. 제가 되려 미안한걸요. 미리 연락을 드리고 왔었으면 회장님을 이렇게 번거롭게 해 드리지도 않았을텐데요." 은숙이 소파의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며 미안스러워했다. 9.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영광입니다. 그나저나 부군께서 병원에 계신다니 무슨 말로 위로를 드려야 할지... 약소하지만 받아주십시오. 성의로 생각하시고." 유태중이 정색을 하며 봉투를 내밀었다. "아니! 이렇게나 많이..." 봉투를 확인하던 은숙이 입을 딱 벌렸다. 남편 상국이 받아오라고 일러주던 액수보다 훨씬 많은 돈이었다. 유태중이 호기롭게 너털웃음을 쳤다. "허허! 제가 부덕하다보니 인사가 늦었습니다. 극락교회에서 일하셨다면 한집안 식구인데 이제야 알게 되다니요. 다 이 사람 불찰입니다. 어렵게 생각 마시고 그저 가까운 동기가 입원비로 거드는 것이려니 여기십시오." "그래도 그렇지요. 이렇게 많은 돈을..." "허허... 그냥 넣어 두십시라니까요. 저의 성의쯤으로 아시고. 가만 있자. 이렇게 시간만 낭비할 게 아니라 어디 가서 저녁식사나 어떠십니까. 박은숙 씨 같은 미인하고라면 기꺼이 한 턱 낼 용의가 있습니다만." 유태중이 흡족하게 웃으며 선뜻 일어섰다. 은숙이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그녀는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유태중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정갈하게 꾸며진 경양식집으로 운치가 있어 보였다. 유태중이 들어서자 모든 종업원들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 뒤를 따르는 은숙이 덩달아 도도해졌다. "기회 있으면 자주 오십시오. 제가 운영하는 곳은 아닙니다만 한번쯤 손을 대보고 싶은 곳입니다.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무엇보다 프라이버시가 보장되거든요. 자, 들어가시죠." 유태중이 들어간 곳은 별실로 다른 곳과는 사뭇 장식이 달랐다. 벽지부터 고급스러워 보였고, 내걸린 그림이 모두 진품인 듯했다. 히터나 난로도 보이지 않는데 실내는 봄날처럼 따뜻했다. 긴 하품을 나른하게 물으며 유태중이 아주 다정스럽게 은숙의 곁으로 다가 앉았다. "그럼 전상국 씨와는 결혼한 지가... 따님이 여섯 살이라고 했던가요?" "한 십년 정도...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셨죠? 말씀드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허허, 거야 간단하죠. 지구 끝에 있는 사람 얼굴도 거울 들여다보듯 훤한, 이 밝은 세상에 그 정도가 뭐 대수겠습니까. 어제 왔다가신 후에 아무래도 그냥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병원에다 부탁을 넣어뒀습니다. 우리 교회 일로 힘쓰던 분인데 불의로 교통사고를 당해서 입원한 지 오래니 잘 좀 돌봐달라구요. 알고보니 현대병원 원장이란 사람 저하군 고등학교 동문으로 익히 알 만한 사이지 뭐겠습니까. 이 얘기 저 얘기 오가다 보니 은숙 씨 주변이 자연스레 알아지게 되더군요. 헛허... 다른 뜻은 없었으니 너무 오해는 마십시오. 제가 이거 알아두 꾹 참고 있어야 하는 건데 입이 워낙 히퍼서요." 10. "아, 아녜요. 듣고보니 제가 외려 고마워해야 할 일인 걸요.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제가 너무 많은 신세를 지는 것 같군요. 상국 씨가 퇴원하면 정식으루 인사 올리겠습니다." "아하, 이런 낭패할 때가... 글쎄 같은 식구끼리다 생각하시라니까요. 격을 차려봐야 서로 벽만 높아지고, 그래서야 어디 사람 사는 맛이 나겠습니까. 아까두 말씀드렸습니다만 가까운 동기간끼리거니 여기시고 흉허물 탁 털어놓으십시오. 제가 이렇게 헐렁하잖습니까. 속 없단 소릴 듣긴 합니다만."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얘기는 저녁식사가 들어온 다음에도 계속되었으니, "어떻습니까? 이렇게 밥이나 축낼 게 아니라 맥주 한잔 하시는게. 못 드신다면 제가 거들어 드리죠." 하면서 유태중이 입가심으로 맥주 서너 병을 시키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뽀골거리는 맥주거품을 입에 문 은숙이 가볍게 얼굴을 찡그렸다. 병원에 있는 남편 상국도 상국이었지만 그보다 고성만이 먼저 떠올랐다. 어느 날이던가. 한여름 뙤약볕, 가로수 그늘이었을 것이다. 시내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젊은 사내가 다가왔다. 꼬질꼬질한 땟국물에 퍼드리한 머리숱이 남편을 빼 박았다. 끈적끈적한 송진냄새까지도 어찌나 쏙 닮았던지. 다른 게 있다면 구수하게 쏟아지는 구변이었는데 남편의 거친 입담과는 천양지차였다. 겉모습과는 달리 유학하고 박식해 보였다. 행선지로부터 시작한 말트임이 서너 번의 말대꾸에 자신도 모르게 호호 웃어지는 말주변이었다. 인상이 좋았고 말이 쉬웠다. 무엇보다 그가 자주 눈에 띄었다. 길동무로 얼굴알음을 했고, 친한 이웃으로 사귀었다. 친구가 되었고 내연의 관계까지 이르렀다. 그제서야 그는 남편과 같은 곳에서 일하는 목공이라 했다. 농락당했다는 기분이 전연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녀 또한 싫은 마음이 있었다면 그런 깊은 관계로까진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들어선 남편마저 병원에 입원하고 보니 만나기도 쉬웠고 오늘도 약속되어 있었다. 지금쯤 그는 우체국 뒤편 담벼락에서 떨고 있을 것이다. 은숙이 반 남짓 담긴 맥주잔을 알약 털어넣듯 훌쩍 마셨다. 기도를 타고 내리던 주기가 심장 저 밑바닥에가서 맴을 돌았다. 금세 발개진 얼굴을 숙이며 그녀가 잔을 건냈다. 11. 신이 난 듯 유태중이 얼른 받아 마시곤 또 잔을 그녀에게 돌렸다. 은숙이 맥주 잔을 들여다보며 허벅지를 문질렀다. 고봉으로 솟구친 거품이 정액처럼 끓었다. 유태중이 그 잔에 빈병으로 남은 맥주를 마저 따랐다. 짜르르 넘치는 맥주잔을 은숙이 두 손으로 감쌌다. 기다리다 그냥 가겠지. 추위 때문이 아니라 좁은 소갈머리론 배겨내질 못할걸. 어쩜 가다가 미심쩍어 돌아와보기도 하겠지. 나를 생각해서라기보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나 역시도 그러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안 돼. 유감스럽게도 당신보다는 이 남자에게서 얻을 게 많거든. 아니, 단순하게 생각해. 신세진 만큼의 도리라고. 당신이 내게 준 것과 내가 당신에게 준 것은, 에누리 없이 한 푼이면 한 푼 고대로였지만 이 남자는 달라. 이 남자에겐 당신에게서 얻을 수 없는 편안함이 있거든. 뭔지 알아? 돈이야. 당신도 알걸. 빈 지갑으로 어슬렁거릴 때와, 간주라도 타서 호주머니가 두둑할 때하고는 그 편안함이 어떻게나 다른지. 호주머니가 두둑하면 먹지 않아도 든든하다는 거 고성만 당신이 더 잘 알걸. 그리고 이젠 겁이나. 채울수록 기갈만 들리는 당신의 메마른 욕정이... 당신의 그 저돌적이고 거친 숨결이 싫어서가 아니라 당신과 남편과의 사이 때문이지. 당신은, 노가다판에서 만난 친구인데 신경쓸 일이 아니라며 남편과는 거래를 끊겠다고 하지만, 당신이야 가능할지 몰라도 나는 안 돼. 남편이거든. 이혼? 경제적으로 속수무책인 날품팔이 당신 곁으로 가기 위해서 이혼을 하라고? 수천 수만 년 동안을 내려오면서, 다른 어떤 사회제도보다도 완고한, 그래서 거추장스러운 것은 물론 잔인하다고까지 여겨지는 일부일처제의 가족제도가 그 어떤 개선의 여지도 없이 건재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극악한 살인자에게도 정당방위라는 것이 있어 정상이 참작되는 마당에, 유독 혼인빙자 간음만이 일고의 사정도 없이 유죄로 인정되고, 혼외정사가 여전히 죄악으로 비난받는 이유를 알아? 혼인과, 그 혼인으로부터 과실된 가족제도야말로 한 개인이 그 사회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호장치이며 미래에 대한 담보물이기 때문이야. 굶어죽는 개인은 있지만 굶어죽는 가족은 없어. 빈궁할 뿐이지. 왜 그런지 알아? 개인은 신에 의탁해야 하지만 가정은 사회에 의지하거든. 그래서 사람들은 버림받은 신의 세계로 귀속하기보다는 타락한 사회로 안주하려고 하는 거야. 곤궁하기는 하겠지만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거든. 이 사회가 존재하는 한. 12. 그런데도 이혼을 하라고? 생존에 대한 최소한의 대책도 없이 고성만 당신 같은 빈 털털이를 믿고? 당신에게 나의 생활을 책임질 만한 능력이 있다면 또 모를까. 그건 안 될 말이야. 빈 털털이이긴 남편 역시 다를 게 없으나 그에겐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갖고 있거든. 좀 칙칙하고 낡아서 좀이 슬긴 했지만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부부애라는 것이 있거든. 당신과 나는 그냥 즐기면 되는 거야. 남편이 해 줄 수 없는 일을... 은숙이 두 볼을 어루만졌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유태중이 따라주는 대로 받아 마시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얼얼해졌다. 고성만을 만나면서 배운 술이었다. 많이는 못 마셔도 남들만큼은 마실 자신이 있었다. 그랬던 것인데 취기가 생각보다 일찍 올랐다. 그렇건만 마음은 편했다. 가슴은 마치 풍선처럼 달아올라 일상의 허드렛일쯤은 기억에도 없었다. 이래서 술꾼들이 분위기를 찾나보다. 그들이 밖으로 나오자 운전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자, 타시죠." 은숙이 술기운에도 불구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특히 여자에게 발달된 보호본능이기도 하겠지만 나름대로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함이리라. 당신의 호의에 감사하여 맥주 한잔을 얻어 마셨기로소니 당신이 하자는 대로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 줄 아느냐, 하는.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에게 갖는 막연한 질투와 거부감도 조금은 작용했을 것이고. 그러나 상대는 유태중이었다. 그가 허물어뜨린 처녀성만도 일국을 헤아리고,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당신만을 사랑하겠노라고 약속한 여자들의 머리채를 묶을 양이면 아마 반도와 대륙을 잇고도 남을 것인데, 한갓 박은숙이 정도야 고무줄놀이 하면서 오재미 돌리는 격 아니겠는가. "우선 타시죠. 날이 추운데. 저의 경영철학은 뛰면서 생각하자입니다. 이거냐 저거냐 따질 게 아니라 시작부터하고 보는 겁니다. 시행착오라고 합니다만 산 경험이지요." 유태중이 말하는 사이, 운전수가 문을 열며 그녀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녀가 유태중을 쳐다보았다. 그 역시 공손한 표정으로 타라는 시늉을 했다. 그녀가 우쭐해졌다. 귀부인이라도 된 양 으시대면서 박은숙이 차에 올랐다. 밤바람에 흔들리는 불꽃 속으로 검은 승용차가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13. 눈이 녹을만하니 또 눈이었다. 폭설이었다. 어지간히도 퍼부었다. 어찌된 셈인지 올 겨울 들어선 눈만 내렸다하면 댓발씩 빠지는 폭설이었다. 대설 주의보까지 내린 도시는, 예년에 보기 힘든 눈사태로 곳곳이 막혀 교통이 어려웠다. 청소부와 수로원들이 눈을 치우고는 있었지만 평소처럼 뚫리자면 아무래도 해를 넘겨야 할 것 같았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망할 놈의 세상... 아주 푹 파묻혀버려라. 잘된 놈만 잘되고 순한 사람만 골탕 먹는 더럽고 추저분한 세상 흔적두 없이 싹 지워버려라. 법이, 그래 무슨 세상의 법이... 주동자는 쏙 빠지고 암 것두 모르는 한국 씨만 잡아 가두다니. 그 여자두 그렇지. 따라다니며 꼬리 흔들 땐 언제고 이제 와선 나 몰라라해? 나쁜 여자. 한국 씨가 그렇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올라면 지붕 꼭대기까지 내내 퍼붓잖구. 그녀가 건널목에 당도했다. 신호기가 고장났는지 노랑불만 껌벅거렸다. 교통순경의 수신호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던 그녀가 망연히 섰다. 교통이 호각을 불며 가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그녀는 미동도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보였다. 그 아이 곁으로 집채만한 직행버스가 지나갔다. 아이가 가려졌고, 그제사 그녀가 뛰었다. 호각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차에 부딪힐 듯 아슬아슬하게 피해간 그녀가 맥없이 섰다. 손에 잡힐 듯하던 아이의 모습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가 실성한 듯 행로를 따라 뛰었다. 얼만큼을 뛰던 그녀가 허탈하게 섰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가게 앞이었다. 들마루가 보였다. 그녀가 썰렁하게 앉았다. 들마루 위에 앉아있는 그녀는 한스러운 눈으로 달리는 차량을 쳐다보았다. 한 여인이 까치다방으로 뚫린 계단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조금 전의 그 여인이었다. 초췌한 얼굴에 핏기라곤 없었다. 그러나 흐릿하던 눈동자가 계단을 오를수록 밝아지고 있었다. 다방문을 들어설쯤 해선 살기마저 느끼게 할 정도로 또렷했다. "피곤하신 것 같은데... 우선 몸이라도 녹이시고 천천히 말씀하시죠." "사정이 어렵게 됐습니다. 한가하게 인사나눌 처지도 못되구요. 알고 계시겠지만 전한국 씨라고... 그 분 일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만." 14. 그녀가 대면하고 있는 사람은 다방 주인으로 있는 주연실이었다. 피곤한 얼굴색과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그녀는 자신을 소개하기를 신옥비라고만 했다. 주연실 역시 어떤 직감 같은 게 있었던지 그녀의 입에서 '전한국'이란 이름이 나왔음에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전한국 씨라면? 감옥에 갇혀 있는..." "알고 계시는군요. 그렇담 누구땜에 죄를 짓게 됐는지도 아시겠군요." "며칠 전 석배씨한테서 들었어요.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절 보시죠? 이해할 수 없군요. 아무리 봐도 전혀 처음 보는 분이신데, 대뜸 찾아와선 죄인 심문하듯 하니. 무례하다는 생각 안드세요?" 주연실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꼬나봤다. 그러나 그녀는 주연실의 표정 정도엔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례하다고요? 설령 저의 언행에 그런 점이 있었다고 해도 한국 씨가 죄없이 고생하는 거에 비할 수 있을 것 같애요? 그러고보니 제가 너무 흥분했군요. 이렇게 대중없이 나댈 게 아닌데... 한가지 부탁이 있어 찾아왔습니다만, 그분을 위해서..." 주연실이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녀의 결연한 표정으로보아 어떤 말을 한데도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약간은 노기띤 얼굴로 앉아있는 주연실에게 그녀가 다음 말을 이었다. "그분을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아가씨에게도 전연 책임이 없다곤 말할 수 없겠죠. 물론 아버님의 일이긴 합니다만. 유태중 씨라고." 그녀의 입에서 자신의 아버지 유태중이 들먹여지자 주연실이 기어이 노발했다. "보자보자하니까 지나치군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아버지란 사람을 들먹거리다니, 당장 나가주시죠! 저 역시도 한국 씨가 그렇게 된 거 누구보다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거기에 저의 아버지를 결부시킨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인지 들을 필요도 없고, 또... 댁과 한국 씨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저로선 누굴 돕는다는 건, 특히나 남자들을 돕는다는 건 상상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마주 앉아있던 주연실이 발딱 일어섰다. 신옥비가 난감한 표정으로 주연실의 소매를 잡았다.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생각이 짧아서 그랬습니다. 노여워 마시고 제 얘기 한마디만 들어주세요. 잘못이 있다면 용서해주시구요. 제발 부탁입니다." 신옥비의 태도가 너무나 완곡했으므로 주연실이 도로 앉았다. 15. "그분은 저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지난번 교통사고 때 그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전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겁니다. 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땐 되레 그분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더군요. 남편이란 사람은 술을 좋아 했었지요. 죽던 날까지 술잔을 밥상머리에 올려놔야 했었으니까요. 핏줄이라고 달랑 있던 자식애마저 도랑창에 끌어묻고 보니 앞이 캄캄한 게... 죽지 못한 게 한스럽더군요. 혼자 남아 있다는 게 왠지 죄스럽다는 생각도 들었고... 하지만 산다는 게 어디 한결 같을 수야 있던가요. 하루하루 지내다보니 잊혀지고, 이게 다 팔자소관이거니 하는 체념도 생기고... 유행가 가사 말마따나 세월이 약일 때도 있더군요." "한국 씨완 그럼..." "그래요. 아이까지 끌어 묻고나니 당시엔 아무 것두 보이지 않더군요. 정신을 수습하고보니 맨 먼저 그 분이 떠오르더군요. 그래도 생명을 구해준 은인인데 하는 생각으로 병원엘 찾아갔더니 그분 형님 되시는 분만 병상에 있지 않겠어요.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나중에 알고 보니 구치소에 갇혀 있다지 않겠어요. 제 나름대로 무슨 도와줄 일이 없을까 찾아봤죠. 연실 씨 아버님이 경영하는 복지원에서 일하다 그런 죄를 저지르게 ㄷ다는 말에..." "뭐라구요! 그럼 한국 씨가 대양복지원에서...? 어디서 들으셨죠? 그게 사실인가요!" 주연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무도 갑작스런 말에 말문이 막히는 듯, 그녀는 더듬거리며 신옥비 쪽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신옥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알고 왔습니다. 연실 씨하고 아버님 되시는 유태중 씨란 분하고는 발걸음도 않고 사신다는 거. 하지만 어쩌겠어요. 남남보다는 그래도 연실 씨에게 부탁드리는 게 빠를 것 같아 찾아왔는데, 제가 너무 경솔하게 대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어떡해서든 그분을 풀어줘야겠다는 생각만이 앞서서 그만..." 신옥비가 돌아가고 난 후, 주연실은 아버지 유태중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었다. 신옥비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아니 그가 저지른 저간의 행태로 보아 의심의 여지도 없이 사실이겠지만, 유태중이란 인간은 또 한번의 만행을 저지른 셈이 아닌가. 자신의 사업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백주 노상에서 버젓이 노인을 유기하다니. 그래 놓고도 사건이 사정기관에 고발되자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라며 하수인들에게 덮어씌우다니. 하수인들이 자백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전한국만 주범으로 몰려 감옥에 남게 되었을 테고. 그나저나 신옥비의 간청에 무턱대고 대답은 했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난감했다. 유태중에게 도와달라고 해? 대답이야 흔쾌하겠지. 하지만 뒤에 따라붙을 단서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16. 오냐, 연실이 니가 부탁하는 일이라면 이 애비가 힘써보마. 하지만 내 누누이 말한 바 있다만, 턱도 없이 나대는 니 결혼 말이다. 애비된 도리로 어찌 보고만 있겠냐. 보아하니 '너 없으면 못 산다'할 정도로 애정이 깊은 것 같지도 않더라. 하니, 이발산가 뭔가 하는 작자하구 했다는 약혼이란 거 물려라. 까짓놈의 손해배상 물어달라면 이 애비가 다 물어줄테니. 알겠냐. 니가 싫어서 나간 집이니 다시 들어오란 말은 않겠다만, 가끔씩이나마 놀러라도 들리고.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다. 이젠 좀 쉬었으면 싶은 생각도 들고. 니가 싫다면 사위도 자식이라고 후계를 세워야 할 때도 되었고. 내 어지간만 해도 이런 말은 않겠다. 이발사가 뭐냐. 이 애비 얼굴에 침 뱉자는 것도 아니고. 학력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중졸이 뭐냐 중졸이. 내 지금 당장이라도 전화를 넣을테니, 전한국이라고 했었냐. 하는 말이 귀에 쟁쟁히 잡혔다. 주연실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창가로 갔다. 수심처럼 눈이 쌓이고, 바람은 갈래갈래 머리를 풀었다. 김석배에게서조차 아무런 연락이 없다니. 그때 좀더 차분했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전한국이 경찰서 구치소에 갇혀 있다고 했을 때, 좀더 자세한 내용을 들었어야 하는 건데. 그나저나 김석배 그치는 합의를 본다고 하더니... 잘 되었겠지. 따귀 한 대에 2백만 원이라면 적은 돈도 아니고. 빌어먹을 인사. 아버지의 뜻대로 그 작자와 혼약을 파기해버려? 주연실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될 말이었다. 전한국의 사정이 딱하게 되긴했지만 이제 와서 평생을 두고 갈아왔던 보복의 칼을 새삼스럽게 철회하다니. 이 상태에서 백기를 든다면 좋아할 사람은 유태중이뿐일 것이다.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내 스스로 비굴을 자청하다니. 전한국이 대신 감옥살이를 하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는 못할 일이다. 전한국... 그래 그 자가 누구인가. 따지고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교제를 끊었어도 진작에 끊었어야 할 인물 아닌가. 순박하다는 것. 그리고 어린애 같다는 것. 기분전환으로써의 데이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포장지에 표시된 바코드처럼 단순한 일상의 형식에 지나지 않았었다. 주연실이 하염없이 내리는 눈발을 쳐다보며 움직일 줄 몰랐다. 김석배가 초조하게 앉아서 손을 비볐다. 따뜻한 보리차가 다탁 앞에 놓여졌으나 그는 비상이라도 섞여 있는 냥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방유석...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기억에는 없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런 자가 어쩌자고 만나자고 제의를 해 왔을까. 17. "김석배 씨 있습니까." "제가 김석뱁니다만..." "초면에 실례가 많습니다. 나 방유석이란 사람이오. 요즘 곤경에 처해 있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폭행치상으로 고발되어 있더군요. 약혼자와는 그래서 사이가 벌어진 것도 같고. 합의라는 거, 거뭐 어려울 게 있겠소. 돈 준다는 데 싫다는 여자 있을 리 만무하고. 안 된다면 공탁 걸면 될 거고. 허허..." "실, 실례지만 누구시죠? 용건은... 말씀하시고자 하는 용건이 뭡니까?" "걱정마쇼. 당신편 사람이니까 의심 같은 건 품지 않아도 될 거요. 어쨌건 곤경에 처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으니, 만납시다. 그런 여자들 다루는 데는 도가 텄으니 손해볼 건 없을거요. 굳이나 싫다면 할 수 없는 일이고."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었다. 김석배가 미처 이것 저것 물을 시간도 없이 전화는 끊겨버렸다. 만나자는 시간과 장소를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김석배가 어리둥절했다. 꺼림칙하기 그만이었다. 사내의 말투로보아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아랫도리의 지프가 열린 줄도 모르고 거리를 활보하다 낯선 사람으로부터 주의를 받았을 때처럼, 창피스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한 그런 어정쩡한 기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직감이긴 했지만 자신에게 해될 사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었다. 김석배가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흘끔거렸다. 약속시간이 지났다. 일반적인 예로 보아, 저쪽에서 한 약속을 그 자신이 어겼다면, 무례하고 몰지각하다는 생각이 들어야 당연할텐데도 이번엔 그렇지가 않았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초조한 것은 김석배 자신이었다. 방유석... 방유석... 사내의 이름을, 흐르는 시계바늘에 매달아 보는 김석배였으나 공명처럼 허허롭기만 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나 되뇌이며, 아무런 준비나 대책도 없이 앉아서 기다려야 하다니. 따분하고 처량한 심사로 울적하기까지한 김석배였으나 그렇다고 일어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이구. 이거 김석배 씨 아닙니까. 내가 바로 일전에 전화드린 방유석이란 사람이오. 자, 인사나 나눕시다."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김석배가 흠칫 놀라며 일어섰다. 얼떨결에 내민 김석배의 손을 사내가 힘껏 잡아흔들었다. 거만하고 방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김석배의 어깨까지 툭툭 두드리며 안하무인한 태도였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은 커녕, 이렇게 나온 것만도 영광으로 알라는 식이었다. 지레 기가 죽은 김석배가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자 앉으시죠." 김석배가 엉거주춤 앉았다. 18. 앉으면서 방유석의 얼굴을 훔쳤다. 생각대로 악질은 아닌 듯하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어떻게 김석배 씨를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번 사건과는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 "저로서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그저 답답할 뿐입니다. 피해자 측과는 합의마저 어렵게 되었고, 그러자니..." "경찰은 경찰대로 빨리 합의를 보지 뭘 꾸물거리느냐고 독촉일 테고?" "맞습니다. 어쩜 저보다도 훤히 알고 계십니까. 죽을 지경입니다. 합의금 2백이 적은 것도 아니고, 또 그 여자도 그만하면 합의를 봤으면 하는 눈치던데, 중간에 엉뚱한 놈들이..." "초를 쳤다?" 김석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경계하는 눈초리가 역력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걸 방유석에게 내맡긴 듯, 태연했다. 방유석이 히죽 웃으며 물컵에 손이 갔다. "아실지 모르지만 놈들이 바로 이 지역 일대를 주름잡는 아리랑파요. 워낙 악종들이라 경찰애들두 눈치만 보고 있다하오. 벌건 대낮에도 사람 해치기를 파리 잡듯하고, 이권에 개입된 놈이라면 무조건 찔러놓고 본다 하오. 이경희라고 하는 여자, 그 여자 애인이 중간 보스인 모양입디다. 어렵게 ㄷ소. 내 생각입니다만 돈 몇푼 받고 합의해 줄 것 같지도 않고. 놈들이야 어디 돈 일이백을 돈으로나 알겠소." "그럼.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저번 전화상으룬 돈만 들이면 해결될 것 같이 말씀하더니... 어떻게든 해결만 해 주신다면 사례는 아끼지 않겠습니다." "허허... 나란 사람 사례나 받자고 이런 일에 끼어들 졸장부는 아니오. 곁에서 지켜보자니 원체 답답하고 딱해서 만나자고 한 것이지." "감사합니다. 선생님. 해결방법만 알려주신다면 평생 은인으로 알고 모시겠습니다." 방유석이 아주 흡족하게 웃었다. 무슨 중대한 비밀이라도 가르쳐주려는 듯 주위를 연신 살피던 방유석이 김석배에게 손짓을 했다. 김석배가 허리를 구부정히 숙여선 방유석 쪽에다 귀를 세웠다. "먼저 놈들의 보복을 조심해야 할 거요. 아까도 말했지만 놈들의 수법은 잔인하오. 이에는 이, 귀에는 귀, 이런 식이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김석배 씨와 약혼하기로 되어 있는 주연실이라는 여자, 왠만하면 안 만나는 게 현명할 거요. 저들 애인이 폭행을 당했는데 그냥 있겠소. 놈들에게 있어서 합의는 다른 게 아니오. 똑같은 방법으로 폭행을 가하는 것뿐. 그렇다고 주연실이 위태롭다는 말은 아니오. 그녀는 나름대로 안전할 거요. 당신이 문제지. 내 생각으론 주연실과 파혼을 하는 게 가장 현명할 듯하오. 그럴 만한 이유도 있고. 그 길밖엔 도저히..." 김석배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19. 파혼을 하라니. 아니 될 말이었다. 징역을 사는 한이 있어도 그것만은 어려울 일이었다. 김석배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방유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이번 일은 사전 치밀한 계획하에 실행된 것이오. 내가 모시는 상사라 이런 말 하기가 그렇습니다만, 우리 회장님하고 아리랑파 두목하고는 아주 친한 사이오. 회장님이 있는 한 그 딸년에게야 감히 손을 대겠습니까만 김석배 씨 당신이 문제요. 회장 역시 당신이라면 배추벌레보듯 한다는 거 아실 거고. 목숨을 걸고 좋아한다면 모를까, 언제 놈들에게 당할지 모르오. 그것도 아주 잔인하고 끔찍한 방법으로. 내가 나선 것도 그래서요. 오늘도 우리 회장하고 두목이 만나는 것 같던데... 자세한 얘기까지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무래도 당신 신변에 관한 얘기도 있는 듯합디다. 조심해야 할 거요. 수틀렸다 하면 모가지에 칼부터 들이대고 보는 놈들이라. 오늘 밤에라도 놈들이 들이닥치는 날에는... 모르겠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충고뿐이오. 주연실과 파혼을 하라는. 어쩌겠소. 우선 당장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힘들겠지만 결심이 서는 대로 연락을 주시오. 명심할 것은 늦으면 늦을수록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오. 해결방법은 그 후에나 가능할 것 같소." 그 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김석배가 글자를 훑었다. '대양물산(주) 비서실장 방유석'이란 큼직한 명함이 눈에 들어왔다. 유태중이 어쩌고 아리랑파가 어쩌고 하는 말이 거짓이 아닌 듯했다. 하기로소니 주연실과 파혼을 하라니. 김석배가 창백하게 얼어붙은 얼굴을 숙였다. 차라리 이럴 바엔 만나지 않은 것만 못했다. 이젠 이경희와의 합의가 문제가 아니라 주연실과 파혼을 하느냐 마느냐가 더 큰 문제였다. 방유석의 말로는 이경실과 합의를 하자면 주연실과의 파혼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의 말투로는 자신의 안전이 더욱 위태로워 보였다. "바빠서 그만 가봐야겠소. 명심할 것은 놈들과의 타협에 앞서 주연실과의 파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요. 그러지 않고는 놈들과의 합의란 생호박에 이빨도 들어가지 않을 소리요. 유태중 회장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말이오. 놈들의 성격으로 볼 때 이적지 참아준 것만 해도 신기할 정도요. 나야 어차피 제3자 입장이니까 중재 정도야 맡아줄 용의는 있습니다만 그 이상은 곤란하오. 지금 여기온 것도 비밀에 붙여야 하오. 우리 회장이 아는 날엔 나 역시 이거요, 이거. 결심이 서는 대로 곧바로 연락주시오. 그럼." 방유석이 모가지가 잘리는 듯한 시늉을 해 보이며 황급히 일어섰다. 주위를 다시 한번 휘둘러보더니 꽁지가 빠져라 내빼는 거였다. 20. 방유석이 나간 지 오래 되건만 김석배는 일어설 줄 몰랐다. 방유석의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앉아 있는 그는, 납덩이처럼 굳어진 얼굴로 무슨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듯했다. 우연의 일치였던지 그날 밤, 그는 귀가 도중에 일당의 괴한들로부터 영문 모를 몰매를 당했다. 찬바람이 어지간히도 드셌다. 가로등도 없는 뒷골목. 그러나 한길씩 빠진 눈길은 벌건 대낮이나 다름없이 훤했다. 어디서 나타났던지 놈들은 다짜고짜 시비부터 틀었다. 지레 겁을 먹은 김석배가 말없이 돌아서려하자 놈들이 한꺼번에 덤볐다. 성한 곳 없이 얻어터진 김석배가 엉금엉금 기다시피하여 집에 돌아온 것은 자정도 넘은 시간이었다. 욱신욱신 쑤셔대는 뼈마디를 추스려 이불짝에 펴고보니 잠이 올 리 없었다. 이러다간 제명에 못 죽지 싶은 불안감이 앞섰다. 창 밖의 바람만이 괴괴한 야밤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했다. 방유석의 말이 이명처럼 스쳤다. 어금니를 짓씹으며 과거를 반추하는 김석배였다. 회한으로 서린 한세월이 주마등처럼 일렁이고 주연실과의 일들이 안개꽃인 양 잡혀왔다. 12. 다시 동구에 서다 1. 계절은 밤마다 하늘을 풀어 해토머리에 닿았다. 춘강엔 얼음이 짜작짜작 녹아내리고, 대지는 천식을 앓듯 가쁜 숨을 토한다. 멀리선 어지러운 현무가 댕기처럼 너풀거리고, 눈 감으면 무지개가 거꾸로 푸르솟는다. 검은 새벽, 삭풍이 찌르르 떨어도 새들은 종종거리며 길을 묻노니, 다가올 또 한해의 여름을 준비하고 채근함이리라. 으스스 떨리는 한기를 잔기침으로 털고 일어난 상국이 창문을 열었다. 눈부신 햇살이 면경처럼 흔들려, 함석으로 둘러친 담장과, 그 건너편으로 조붓이 들어선 지붕들이 수분처럼 흩어진다. 은숙인 또 어디로 갔나...? 미선이 년까지도... 하나같이 마뜩찮은 것들이다. 아내 은숙도 그렇고 딸년 미선도 그렇고. 한결같이 겉돌기만 한다. 문둥병에 코 빠진 놈 대하듯 다들 멀리한다. 그래서 그런가. 청주 한 씨 몇대 손이라던 꺽다리 세무서 직원이야 들 때부터 그랬다치고, 어쩐 일인지 뒷집 박 씨마저 뜸하다. 퇴원해선 소줏병이나 차고 들어오던 인사가 요즘들어선 어디가 틀어졌는지 코빼기도 내미는 법 없다. 망할놈의 인사... 하긴 말함. 곁에 끼고 자는 살붙이까지 저모양들인데, 남남이사. 그나저나 한국이 그놈이야말로 풀려난 거여, 그냥 쳐백혀 있는 거여... 상국이 뜨려던 눈을 도로 질끈 감았다. 대바늘처럼 매서운 노성이 고막을 후렸다. "내사 암것두 모르것다. 얀나, 니가 알아서 명철허니 요리혀라." "아부지는유. 이기 뭔데유?" "돈인게라. 이백..." "야아?! 돈요? 무슨..." "소 한 바리 있는 거 냈다. 변호살 대야 안심헐 거라 혀서. 크흘... 몹씰 놈..." "소...소를요! 전신만신 하나뿐인 소를 팔다니유! 안 되유 건. 그기 우떤 손데 한국이 걀 빼낼려구 그걸 팔어유. 차라리 저한테 있는..." "허...! 발써 냈다구 안 혔냐. 내사 까막눈이 되야서 암 것두 모른께 즉은애 니가 알어서 변호살 대거라. 허고 이건 가근방 동민덜이 판관님헌티 올리는 연판장인게 변호사 구하는 대로 뵈이고. 훈장 및 개보담 이기 더 효험이 있을 거라 하더라. 우쨌거나 이장 그 사람 애 많이 썼다. 후제래두 상봉할 일 있거든 인사혀라. 느 성이 나오믄 전다지 갑윤이 그 사람 공인게. 크흘..." 하긴, 변호사도 그랬었다. 2. 걱정마십시오. 저도 판검사 생활을 두루 거쳐봤습니다만, 이번 사건은 사건 자체가 고의성이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범의가 없다는 얘기죠. 유죄추정이 불가능할 땐 무죄라는 결론입니다. 물론 범의는 없었다 해도 과실이 있었기 때문에 완전무죄라고 주장하기는 소론의 여지가 있긴합니다만, 어쨌건 걱정마십시오. 진작에 절 찾아오셨다면 검사 손에까지 넘어가지도 않았을 사건입니다. 초범이겠다 과실이겠다, 개전의 정 또한 뚜렷하겠다 이게 어디 구속수감될 사안이나 됩니까. 자자, 단정적으로 말씀드리긴 뭣합니다만 걱정마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랬는데 여지껏 소식이 없다니. 혹시 변호사란 그 놈도... 신신뭐라는 가수 노랫말마따나 짜가가 판치는 세상이니, 그 놈도 거짓명패나 내걸고 앉아 우리네같이 허름한 촌놈이나 호리는 짜가는 아닌지 몰라. 행여, 설만들 2백만 원씩이나 꿀꺽 할라고. 영수증에 약정서까지 있는데... 이래저래 답답한 상국이었다. 입춘댓길, 그려 입춘댓길이여. 낼 모래믄 입춘인게. 상국이 눈꼬리를 모로 찡그리며 삭정이 같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태중이란 놈. 다 그놈 때문인 거여. 은숙일 시켜 받아오긴 했지만 품값을 뗘먹을 수작을 안 부리나 한국이 걀 감옥살일 시키지 않나. 흐응! 그런 작자가 요담 민선시장선거에 출마한다고? 에라이...! 오사리잡놈 같은... 크억 퉤에...! 상국이, 목구멍에 가시라도 박혔던지 가래침을 퉤에, 하고 뱉었다. 심드렁한 속을 근근이 억누르고 있는데, 봉당 위로 널름 올라서는 자가 있었다. 가시덤불처럼 스산한 분위기가 섬쩍했다. 살대마냥 꽂히는 햇살을 손바닥으로 걷어내며 상국이 그림자를 훑었다. 그자가 통명도 없이 그늘막이 쳐진 마루로 올라섰다. "좀 어뗘, 전 씨. 통원치료 받구 있단 소린 들었어도 길이 원체 미끄러워야 말이지." 동갑이라곤 하지만 한 살 위인 고성만이었다. "뭔 수로 세상 까마구가 조용하다 했더니. 왠 일이냐 고가 니눔이 문병을 다 알고." "허이 사람. 낼 보고 까마귀라고? 허면 문병이 아니고 문상이겠지. 크흐흣!" "에라잇! 니눔이야말루... 앉어라 우선. 문병이던 문상이던 찾아온 손님인게." 상국이 자리를 터 주자 고성만이 방안을 찌웃찌웃 살폈다. "암도 ㅇ으니 안심혀라. 또 있으면 우떠냐. 내우할 지간도 아니고." 상국이 허물없이 아랫목을 비웠다. 그제사 고성만이 열적게 웃으며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3. "귤 좀 사왔구먼. 귀한 거려. 작년 가뭄이 어지간했어야 말이지. 만 원을 빼들었는데두 고작 이거여. 어뗘? 하긴, 집에서 병치레하기가 오죽 답답하겠어. 어거라두 벳겨봐. 알은 작어두 맛 하난 제법 여물었더라고." 고성만이 앉긴 앉았으되 어쩐지 편편치 못한 자세였다. 좀도둑이 소도둑 마굿간 살피듯이 두리번거리는 눈치였다. "앉어라. 편하게. 뭐가 잘못 된 거라두 있냐? 두리번거리는 폼이 형사 눈치다. 하긴 요즘 들어선 나두... 나이 탓인지. 만만한 건 없고, 그저 벅차고 맘 상하는 일 뿐이니. 목수란 직업이 그런 모양이여. 매사 낙우송맨치로 배배 틀어지기나 하고. 지랄... 사는 게 뭔지..." "어째 우리네 목수덜뿐이것어. 시절이 수상하니 그려려니 할밖에. 근데 전 씨 처는 어델 간기여? 병원 있을 때도 드문드문하더니만." 고성만이 상국을 쳐다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갔다.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모르겠고. 같은 방을 쓰니께 부부지, 부부랄 것도 없다.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지...얼굴 잊은 지도 오래고." 상국이 별일 아니라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고성만이 무릎을 당겼다. 그리곤 무슨 말인가 할 듯하다간 그냥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고성만이 벽에 걸린 은숙의 옷가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런 고성만이 정상으로 보일 리 없었다. "아무래두 고가 너... 뭔 말이 있기는 있는가 보구나. 불쑥 찾아와선 은숙이부터 들먹거리는 수작이. 그래 뭔 말이냐?" 상국이 고성만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이번엔 고성만이 태연한 척했다. "말은 무슨... 안 보이니 하는 소리지. 궁금하기도 하고." "아닌 것 같다. 날 보자고 병문안 온게 아닌 것 같어. 은숙이... 우리 식구한테 뭔 일이 있는 거지?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얘기해봐라. 니한테 해둔 부탁도 미리 있었고." 고성만이 그제사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러나 말이 용이하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한참 뜸을 들이더니 겨우 한다는 말이, "너무 늦었어."였다. 그러면서 그는 긴 말하기도 싫다는 듯, 한 장의 사진을 내미는 거였다. "뭐냐 이게." "잘 봐. 누군가." 상국이 자신의 앞으로 던져진 사진을 첩에 끼우듯 똑바로 놓았다. 그리곤 고개를 갸우뚱했다. 호텔로 들어서는 한 쌍의 남녀. 야밤의 흐릿한 불빛에 드러난 뒷모습이어서 처음엔 이것들이 누군가 했다. 그러다 한순간 상국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눈꼬리가 하늘로 쭉 찢어지더니 고성만을 험상궂게 꼬나봤다. 긴지 아닌지 확인하라는 눈치였다. 4. 고성만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여... 나두 첨엔 설마했었어. 이렇게 찾아오기까지도 많이 고심했고..." 주먹 쥔 상국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사진 속의 여자는 틀림없는, 아내 은숙이었다. 벌겋게 달은 쇳조각 같은 불덩이가 명치 끝을 치밀었다. 가슴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콱콱 막혔다. 독 오른 살모사처럼 입을 쩍쩍 벌리던 상국이 사진을 찢어져라 노려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새낀... 이 새낀 누구냐! 어디서 본 듯도 한데 어디서..." 상국의 목소리가 갈수록 떨렸다. 분노와 비애와 의혹이 뒤섞인 목소리로 더듬거리는 상국과는 달리 고성만은 내내 침착했다. "유태중이라구 전 씨두 알걸 아마. 대양회사 사장으루 있는." 상국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딱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 고성만의 입에서 줄줄 이어지고 있었다. "전 씨 말두 있구 해서 첨엔 미행을 했었지. 둬 번 했었나. 그러단 그만 뒀지. 별달리 이상한 점이 없기도 했거니와 여자 뒤를 밟는다는 게 좀 그렇더라고, 쑥스럽기도 하고. 더구나 남모르는 사람도 아닌 막역한 친구 아내라 생각하니 도저히 계속 못 하겠더라고. 그럭저럭 잊고 있었는데 한 달포쯤이나 됐나. 일두 없고 그렇다고 딱히 갈 데도 없고 해서 한잔 걸치고 오는 길인데, 글쎄... 첨엔 아니거니 했지. 술기운에 헛것을 봤다 믿었어. 그냥 지나치려는데, 뒷골이 선들하더라고. 젠장할...! 못 볼 것을 보았지. 이 사진? 아녀, 아녀. 내가 무슨 재주로 이런 사진을 다 찍겠어. 전 씨 정말여. 참말이라니께. 이거야 어디...내 이래서 얘길 안 할려구 했었는데... 좋아. 어차피 말 나온 거, 이실직고하지. 확인을 했지. 술집으로 들어가더라고. 거기서 부탁한 거여, 이 사진은. 요새 왠만한 술집엔 다 있잖나. 속사들 말여. 춤 한번 추고 내려오면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내미는 찍사들. 물어봤지, 몰래 카메라도 되냐고. 씨익 웃으면서, 돈이면 뭘 못하느녜. 사연이 이래. 뭐야? 증인...? 사진도 못믿겠다? 그래 관두자고. 난들 어디 이런 고자질이 좋아 하는 것도 아니고. 알았어. 알았다고. 없던 걸로 하자니까. 전 씨." 많이도 퍼 마셨다. 고성만이 돌아가고 난 후, 도깨비 방망이처럼 덩그러니 놓인 사진을 쳐다볼 용기가 없었다. 두려웠다. 두렵다 못해 겁이 났다. 처음엔 그 사진이 발등에 떨어진 송충이처럼 느껴져 멀찍이 대하게 되었고, 슬금슬금 곁눈질로 쳐다보던 상국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한 춤씩 다가 앉았다. 5. 어둠이 대하처럼 흐르는 길바닥 모서리. 그 모서리 끝으로 반딧불처럼 명멸하는 가로등. 호텔... 돌계단과, 그 돌계단을 따라들어가면 화사의 혓바닥인 냥 널름거릴 긴 낭하의 입구가 잡힐 듯 다가오고... 벽시계의 시계바늘이 뚝닥거릴 때마다 그 놈의 사진은 마치 도깨비 방망이처럼 해괴한 장면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눈을 감아보기도 하고, 일부러 먼 데 허공을 쳐다보기도 했지만 도깨비 방망이는 연신 뚝닥거리며 상상하기도 끔찍한 장면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상국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진저리를 쳤다. 더 이상 버티고 앉아있을 용기가 없었다. 뽀얀 알전구 밑으로 드러난, 20여 년도 훨씬 지난 그때의 그 해괴하고도 괴망스럽던 악몽이, 마치 껍줄이 홀랑 벗겨진 채로 뽕나무 가지에 매날려 꿈틀거리는 푸독사처럼, 징그럽게 상국의 모가지를 감아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껌을 짝짝 씹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 더럽고도 추악하게만 느껴지던 나부가, 오늘날의 아내로 변해 있다니. 홍루(紅樓)의 그 여자는 그래도 한 되박의 쌀과, 그 쌀되박 속의 쌀톨만큼이나 한, 감추어둔 눈물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아내는 무엇이란 말인가. 부나비는 그저 불빛만 따라 한다. 벌들은 오직 꿀만 탐한다. 그것뿐인가. 그래서 아내는 밤마다 네온사인을 좇고 잠자리에선 밀몽(蜜夢)이나 꿈꾸는가. 야광충에게도 나름대로의 기품과 사위는 있다. 장유의 기강과 부부의 별리(別理)는 봉의(蜂蟻)가 그 스승이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은 무어란 말인가. 그래도 설마 했었다. 연기처럼 사라졌다가는 무엇엔가 쫓기는 듯 종종걸음으로 들어올 때도, 한 쪽 팔이 떨어져 나간 듯 잠자리가 허전할 때도, 그리고 부엌일도 그만둔 채 멍한 표정으로 사립 쪽만 넋을 잃고 바라볼 때도, 그저 가난 탓이거니, 가난보다 힘겨운 나이 탓이거니 했었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여직도 소녀 티가 남았구나 흐뭇했고, 혹여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청승도 저만하면 그림이라고 애틋해 했었다. 고성만이 그 작자한테 당신의 뒤를 캐 달라고 부탁한 건 사실이지만, 당신을 의심해서라기보다는 당신에 대한 애정이, 의심을 품고도 남을 만큼 깊었던 때문이었다. 그랬던 것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허물어지고 말다니...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상국은 마시고 또 마셨다. 푸르숭숭한 겉절이 한 주발을 안주로 놓고 빈 소주병이 궤짝으로 나뒹굴도록 마시고 또 마셨다. 술이 취할수록, 그래서 시야의 모든 사물이 흐리멍텅해질수록 분노의 불길과, 그 불길 속에 타오르는 증오의 감정은 예리하고 확연해져만 갔다. 아내 은숙도 은숙이었지만, 유태중에 대한 증오가 더욱 깊었다. 6. 그러잖아도 석연찮던 감정이었다. 한국이 그랬고, 자신의 품값이 그랬다. 그러고보니 품삯을 받아오라고 맡긴 것조차 후회됐다. 잘못이여. 다 내 잘못인 기여... 끄윽...! 딸꾹! 가난이 죄라고, 보험금이나 축내고 마는 건데... 굳이나 받아오라고 지랄을 쳤으니... 그래두 그렇지. 유태중, 이 개애눔으샛긔! 지하구 나하구 전생에 무슨 원수를 졌다구. 한국이 유치장에 처백혀 있는 것만 해두 이가 갈리는데, 남의 지집년까지 따 처먹어. 끄윽...! 딸꾹! 내 이 샛기 좆대가릴 짤러내구 말기여. 넌 우리집안에 불구대천 왼수여... 대갈빠리 허연 노인네가 콧물 찔찔 흘림서, 우시장으로 갈 때의 그 기분이 어ㄸ게나 찢어지는지... 니눔은 아마 상상도 못해봤을 기다. 개애눔의 샛긔! 버러지만도 못한, 수운 개망나니 겉은 샛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니눔 맥동가질... 두구 봐라, 너 유태중이... 끄윽! 딸꾹...! 술취한 상국이 온 시내바닥을 휘돌고 있었다. 만취한 상태였다. 무작정 걸었다. 길이 아니었다. 걷다가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 휘청거리다가 아무데나 처박혔다. 길가는 행인들이 혀를 차며 피했지만 들리는 말이 없었다. 노변에 쓰러진 그의 얼굴에 대고 가래침을 뱉으며 쌍소리를 해대는 운전기사들도 가끔 있었지만, 여전히 들리는 말이 없었다. 울다가 웃다가, 고약한 운전기사들처럼 욕지거리도 퍼붓다가 고래고래 악을 쓰다가, 기어이 또 울음을 터뜨렸다. 절규였다. 벼랑 끝에 간신히 걸치고 있던 발이 비끄러져, 천야만야의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면서 부르짖는 단말마의 처절한 비명이었다. 울고 또 울다, 그 울음이 허허로이 허공으로 메아리쳐 웃음이 되어 돌아왔다. 울음이 지나쳐 극에 달하면 웃음이 되는가보았다. 원한이 골수에 사무치면 담담해지고 마는가보았다. 흐흐, 하는 광소를 아무렇게나 뿌려대며 이 골목 저 귀퉁이에 쓰러지기도 하고 처박히기도 하는 상국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이마가 찢어지고 입술이 터져,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였는데, 입을 벌릴 때마다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신발이 없었다. 그나마 신고 있던 양말까지 벗겨져 한쪽 발은 맨발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찢기고 헤져 비닐조각처럼 너풀거렸는데, 탄재와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저것도 옷인가 싶었다. 푹 패인 보도를 넘던 상국이 힘없이 넘어졌다. 술이 어지간히 취했던지, 길바닥에 넘어진 채 모로 누웠다. 태반에 있던 자세로 다리를 오무렸다. 샅 사이로 머리를 박더니 이내 코를 골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몸이 심하게 떨렸고, 그때마다 달팽이처럼 몸이 동그랗게 말렸다. 으으으...,하는 신음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그 위로 별무리 같은 무서리가 내리고, 사람들은 그냥 무심히 지나쳤다. 7. "으으...으으음! 우욱...!" 춘강에 얼음처럼 이불이 깨졌다. "어뗘 야. 정신이 좀 드냐?" "으으음...!" "어뗘, 좀 어떠냐? 죽지는 않것냐?" "무우울 물. 물울 좀..." 두툼한 얼음장이 깨지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느러미 퍼덕이며 아가미짓을 해대는 어속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동면에서 갓 깨어난 파충류도 아닌, 그는 바로 전상국이란 인간이었으니. "야임마. 여깃다. 니눔 명이 긴 건 안다만 십 년은 감수했다. 니눔 살리자고 내 목숨 줄군겨, 임마. 자, 마셔라." 두툼한 이불자락을 걷으며 자리끼를 내주는 사람은, 그의 친구 김석배였다. 김석배의 물사발을 받아든 상국이, 조갈증에 시달린 농우처럼 껄떡거렸다. 순식간에 냉수 한 사발을 바닥낸 상국이, 그제사 정신이 들던지 눈을 부시시 떴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바람에 뒤엉킨 개꼬리(옥수수 털)처럼 퍼드러진 머리카락. 시퍼렇게 멍든 눈두덩. 촛농처럼 말라붙은 핏자국. 거렁뱅이에게 인심을 써도 휴지통에 내다버리고 말, 찢어지고 헤진 옷가지. 설익은 좁쌀처럼 혓바닥 위를 구르는 단음절의 괴성... 차라리 파충류였다면 겨울잠 때문이었거니. 안쓰러운 눈빛으로 측은히 바라보던 석배가 고개를 외로 틀었다. "니눔, 술하구 무슨 원수가 졌냐! 죽기로 마셨음 모를까. 해도 그렇지. 어찌보면 잴 쉬운 게 죽는 건데 꼭 그렇게 되져야 쓰겠드냐? 니눔 미련헌 거야 얘기함 새삼스럽다만, 것두 분수가 있고 정도가 있는 거지. 마침 회장네 집에 볼일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우쨀 뻔했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집 나가서 되졌으니 객사요, 길바닥에서 꺼우러졌으니 횡사, 또 뭐냐. 그려..., 노상객사할 뻔한겨, 이눔아. 더 마실래? 겉껍디기가 이 지경이니 속이야 오죽하것냐." 석배가 혀를 차며 상국을 지켰다. 상국이 도리질로 석배를 묶었다. "죽여야 혀... 그런 놈은 내 손으로, 내 손으로 박살내야 혀... 내 이 샛길... 끄응...!" 상국이 한탄과 비애와, 끝 모를 저주스러움으로 오열했다. 처연히 부르짖는 상국을, 그저 멍한 표정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석배였다. "날 좀... 날 좀 일으켜 세워주라. 내 이 두 년놈들을...!" "쯧쯔... 돌았구나. 돌았어... 돌아두 우째믄 그렇게두 드럽게 도냐. 눈 뜨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뭐어? 죽여? 쯧쯔..." 석배가 일어서려하자 상국이 손을 내저었다. 8. "그 자식 땜에... 망했다. 쑥대밭이 됐어. 우리집하고 무슨 원수가 졌다고. 개애눔으샛긔...!" 김석배가 베개를 끌어다, 넘어질 듯 건들거리는 상국의 무릎 위에 세우며 정색을 했다. 상국이 횡설수설이긴 했지만 술기운 탓만은 아닌 듯해 보였다. 김석배가 흥분해 있는 상국을 다독이며 전말을 고해 물었다. 한숨과 탄식을 섞어서, 고해하듯 토막토막 이어놓는 상국의 말은 너무나 의외였다. 상국의 기막힌 사연을 다 듣고난 김석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하면 이해를 하겠다는 듯, 저 역시 분개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정작 말투는 얼굴 표정과 달랐다. "... 그래두 그렇지 좀 지나친 것 같지 않냐? 어딘지 앞뒤 아귀가 맞지 않는 것도 같고... 다른 사람이면 몰라두... 글쎄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단 말이 있긴 하더라만, 설만들 니 처가 그런 못된 짓을... 나로선 믿기가 좀 그렇다.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단 말이다." "넌 겪어보지 않아서 하는 소리여. 그 여자 백 번 그러고도 남을 여자여. 고성만이 사진까지 디밀며 거짓말할 리도 없고." "글쎄, 상국이 넌 그게 탈이여. 사내자식이 뭔 눔의 귀가 그렇게도 얇으냐. 고성만이라고 거짓말 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데? 설사 거짓말은 아니라 해도 왜곡되고 와전될 수도 있는 일이고... 유태중이란 그놈, 그 일 아니래도 죽어 마땅하다는 건 안다만, 니 처하구 어쩌구 저쩌구 하다는 거, 죽이는 것두 좋긴 하다만 우선 사실인지 아닌지부터 가려야 할 것 같다, 내 생각엔. 만에 하나, 혹여 그런 개 같은 경우가 사실이라 하더래도 우악다짐으로 감정만 앞세울 일도 아니고. 지금 너같이 이런 식으론 그놈한테 가기도 전에 너부터 공동묘지다. 유태중이란 놈... 그놈이 어떤 놈인지 넌 몰라서 하는 소리여." 김석배가 어금니를 씰룩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저주스런 눈빛으로 허공을 주시했다. 상국이 눈을 꿈벅였다. 김석배가 왜 저렇게 흥분하는지 사정을 알 리 없는 상국이었다. 가까운 친구지간이다보니 그저 자신의 처지에 공감하여 공분하는 것이려니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잠깐 사이 침묵이 이어졌다. 상국은 상국대로, 또 석배는 석배대로 만감이 교차했다. 생각은 달랐지만 유태중에로 향한 분노는 같았다. 상국에겐 가정과 가족을 파탄에 빠뜨린 원흉이었고, 석배로선 자신의 생명이 위협당하고 있었다. 상국의 눈이 창쪽으로 향했다. 뿌연 볕발이 신명처럼 떨어졌다. "돌배 너, 총 좀 빌릴 수 있제? 연발루 쏴대는 엽총 말이다." 9. 방바닥에 떨어진 빛토막을 비검처럼 거며쥐며 상국이 석배를 건너다봤다. 김석배가 무슨 말이냐는 듯 빛토막을 맞받아쳤다. "다른 신센 안 지겠다. 그냥 총 한 자루만 빌려주라. 뒷일은 내가 책임 질테니. 넌, 나보다 아는 사람이 많으니 빌리는 것두 나보단 쉽지 않겠냐. 어뗘 할 수 있겠제? 증이나 뭣하면 공기총이래도 좋고." 석배가 입을 딱 벌렸다. 너무나 엉뚱하고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이었다. 일순, 상국의 눈꼬리가 찢어졌다. 그제사 놀란 가재처럼 한 춤 뒤로 물러서는 김석배, "총...? 총을 빌려선? 그놈을 쏴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하고 눈을 휘둥그레 떳다. 그러나 상국은 태연했다. 사냥터에서 참새 한 마리쯤 잡는 것이 무슨 대수냐는 투였다. "안 죽을까? 아녀, 산퇘지도 직방 맞으면 간다구 하드라. 유태중이 그 자식이 아무리 기고 나는 놈이라해도 살아나진 못할거다. 산탄두 아니고 외알루 디리 먹이면." 김석배가 아예 말도 귀찮다는 듯 입을 다물어버렸다. 상국이 엄숙하고도 진지하게, 마치 전선에 임한 소대장이 대원에게 명령하는 투로 김석배에게 말했다. "긴 얘기 해봐야 그렇다. 총 맞고도 안 죽을 놈이면 벼락 맞고도 살아날 운명인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설만들 그런 개 같은 경우야 있겠냐. 백해무익한 놈... 하루라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거여. 구해놔라. 6연발 엽총 같으면 금상첨화고. 이유 같은 건 묻지마라. 돌배 니눔 징역살이시킬 일은 없을 것인게 걱정 말고. 알었냐? 6연발 엽총." 상국이 얼굴을 찡그리며 일어서려하자 김석배가 황급히 그의 팔을 잡았다. 상국의 소매를 잡아끌면서도 김석배는 내내 어떤 생각에 빠져있는 듯해 보였다. 상국이 끙응, 소리를 내며 털썩 주저앉자 석배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대책은 있는 거냐?" "대책? 무슨...?" "총을 구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리고 그놈을 빵 하고 쏴 죽이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후에 말이다. 총으로 쏘기만 한다고, 그래서 그놈이 죽기만 한다고 일이 해결되겠냐 이 말이다 내 말은. 그 다음이 문젠겨. 하다못해 어딜루 줄행랑을 친다든지 하는." "없어. 같이 죽는 거지. 암만 버러지 같은 놈이래도 사람은 사람인데 남의 생목숨 끊어놓고 살기를 바라겠냐. 남 죽이고 자기만 살겠다는, 그런 도둑놈 심보 애초 가져본 적 없다." 상국의 눈빛이 서늘했다. 10. 말소리가 의외로 담담하긴 했지만, 그 말 속엔 거역 못할 어떤 위엄 같은 게 있었고, 아주 결연한 듯 보여, 말려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석배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림없는 소리다. 말도 안돼. 유태중 그 놈이야 죽어 마땅하겠지만, 니눔은 아니다." "짜식은... 운제부터 내 생각을 그렇게 해줬냐. 관둬. 싫음 내 손으로 알아볼팅께." "오해 마라. 널 생각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니눔마저 죽으면 그 결과는? 결과적으로 내가 살인자가 되는 거다. 전상국이 살인하도록 방조한 것이 되고, 그 전상국이는 내가 죽인 걸로 되는 거다. 뭔 말인지 알 것냐. 니가 죽으면 난, 손하나 까닥 안 하고 이중살인자로 몰린다 이 말이다. 니가 잡히든 안 잡히든 거야 상관 없는 일이다만, 니가 죽고 안 죽고는 내가 유치장엘 가느냐 마느냐의 문젠겨. 알것냐? 이제. 왜 니가 죽어선 안 되는지. 내가 바라는 것은 그놈만 없어지면 되는겨." 상국의 머리가 주뼛하게 섰다. 김석배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상국이 얼굴을 씰룩거리며 힘없이 뇌까렸다. "유감스럽게도 그놈보다 니눔이 먼저 돼져야 할까부다. 친구라고, 얘기한 내가 잘못이다. 갈란다. 더 있고 싶어도 돌배 니눔 얼굴 마주하기가 두렵다. 어쨌건 구해놔라. 찾으루 오든지 연락을 주던지 할테니." 상국이 다리를 절룩거리며 방을 나섰다. 맨발에 신발도 없었다. 김석배의 운동화를 챙기며 우욱, 하고 구역질을 토했다. 멀어져가는 상국을 망연히 살피며 김석배가 무릎을 세웠다. 고지박처럼 쪼그려 앉아선 꼼짝도 안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는 무슨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 보였다. 사진 한 장만 달랑 믿고 물불 가리지 못하고 펄쩍거리며 날뛰는 상국이 저놈. 기어이 무슨 일인가 저지를 작정 아닌가. 유태중이란 놈을 죽일지 어떨지는 두고봐야 알겠지만, 그냥 있지 않을 것이란 것은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상국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석배였다. 그 결과가 어떻게 파국으로 치달으리라는 것도 가늠하여 어렵지 않았다. 말려야겠는데...그러나 멀찍이 떨어져 있고 싶은 심정을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 유태중에 대한 불편한 감정 때문이리라. 상국이, 그자를 죽이고 말겠다고 으르렁거렸을 때도 겉으론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갈했지만, 내심 쾌재를 부른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잘한 일이다. 네가 그놈을 없애는 일이라면 총이 아니라 더한 것도 구해다 주마. 모쪼록 주도면밀하게 거사를 진행시켜라. 힘이 된다면 이 김석배 무엇은 못 도와주겠냐. 그놈과 나는 공존할 수 없는 운명이고, 그자가 사라진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11. 그래, 죽여라. 단 한 방의 총성으로 영원히 이 세상에서 추방해라. 숨길 수 없는 심정이었다. 방유석을 만나고부터는 줄곧 그런 생각이었다. 술집여자에게 고소를 당하고 괴한들로부터 테러까지 당하자 유태중 그놈을 내 손으로 처단해버릴까 하는 극한 생각도 있었다. 그러던 중인데 상국이 뛰어든 것이다. 불행하게도 상국이 친구만이 아니라면...친구에 대한 우의와 자신에 대한 미래가 안개처럼 뒤엉켜, 모든 게 그저 뿌옇고 몽롱하기만 했다.상국을 어떻게든 말려야겠는데, 그러나 생각은 그저 막연할 뿐으로 사실 어떤 행동도 실행에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구역질을 토하며 불편한 몸을 절뚝거리며, 힘없이 걸어가는 상국에게 아무런 조언이나 말림도 없이, 그 흔한 해장국 한 술 들고가라는 인사도 못건넨 것이다. 김석배가 뒤로 벌렁 누웠다. 깍지를 낀 손으로 팔베개를 하고보니 몸은 어느새 천근으로 묶여있다. 한동안 그렇게 미동도 않고 있던 그가 발목을 다잡아챈다. 속박이 한 머리를 둘러볼 여유도 없이 어디론가 쏜살같이 치달았다. 한 줄기 바람이 목줄을 감아왔다. 섬뜩한 한기를 느끼며 김석배가 목을 움츠렸다. 봄이라곤 하지만 바람은 여전히 혹독한 한기를 뿌리고 있었다. "그래서 어쩔 작정이세요?" "뭘?" "아직도 해결이 안 됐다면서요? 불구속이라서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그러다 전과자라도 되면 어쩔려고 그래요." "깐눔의 벌금, 물어봐야 2백만 원 안쪽이겠지. 이 나이에 공무원시험 칠 일도 아니고, 호적에 빨간줄 좀 그려짐 어뗘. 그게 문제가 아니라... 꿈자리가 뒤숭숭한게. 목에 현상금 걸린 놈맨치 목덜미가 선들선들한게." 김석배는 까페 '환타지아'에 와 있었다. 주연실과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아무래도 서먹서먹했다. 더구나 미행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색하기 그만이었다. 어쨌건 결정을 내려야 했다. 불량배에게 쫓기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이해를 구하고 동의를 얻어야 할 것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겠지만, 결혼식 올리기 전까지는 만나는 것을 자제해야 할 일이었다. 모든 상황을 솔직히 털어놓자고 한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주연실을 만나자 저도 모르게 자존심부터 섰다. 유태중으로부터의 감시가 철저하고, 아리랑판지 하는 주먹패들에게 몰매도 가끔 맞으며, 요사인 숫제 공갈과 협박이 공공연하다고 말을 해야겠는데 그녀를 앞에 앉히자 고만 주눅부터 들었다. 칠칠찮다는 소리보다 헤어지자는 소리가 먼저 나올까 두려웠다. 상국에 대한 얘기는 그래서 처음부터 빼놓기로 했다. 12. "하지만 까짓거 뭐, 잘 될겨. 그놈만 하나 죽어 없어짐 만사형통인게." "네에! 무슨...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아, 아녀. 그냥 잘 될 거라는 얘기지. 대동강물도 풀린다는 입춘인데, 우리 결혼도 순조로울 거라는. 예감이긴 하지만 예감이 숫자보다 정확할 때도 있거던." 주연실을 마주하는 김석배의 눈빛에 광채가 일었다. 자신의 입으로 한 말이긴 했지만 '결혼'이란 말이 공명처럼 되돌아오자 가슴 한복판이 찡하게 울렸다. 서로가 결혼을 약속하여 약혼식까지 치렀지만 어쩐지 거짓말 같고 꿈만 같던 나날이었다. 물론 그것이 평범하고 진부한 약혼이었다면 그렇게 위태롭게 생각되진 않았을 것이다. 마치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는 순리에 따라 4월 5일이란 결혼식 날짜를 느긋하게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가 못했다. 다방종업원으로 알고 있던 그녀는 그 다방의 주인이라 했다. 그녀의 아버지란 사람은, 이 도시에서 살고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 만한 재력가인 유태중이라 했다. 그녀의 완강한 부인과 거부가 있긴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곧 그녀의 상속재산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한 여러가지 조건들, 결코 상상도 못했으며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련의 사실들 앞에서 처음엔 믿기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많은 재산이 어쩌면 자신의 것으로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당황하게 되었다. 고무풍선처럼 부풀려지기 좋아하는 마음 한켠에선 생각지도 못했던 그 생각들에 사로잡혀, 하루에도 몇 번씩 번데기의 성충처럼 날개를 달아보는 김석배였다. 그랬던 것인데, 그래서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주연실과의 결혼은 성사시켜야 된다고 별렀었는데, 엉뚱하게도 방유석이란 자를 만나고부터는 희미하게 멀어지는 듯한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던 그였다. 유태중... 그래, 그자만 없어진다면... 김석배의 얼굴이 밝아졌다. 전상국의 분노한 얼굴 위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유태중의 검은 그림자가 불너울처럼 너울거렸다. 김석배의 눈빛이 불티처럼 빛났다. 유태중의 죽임이 묘비처럼 뚜렷하고 명확해졌던 것이다. 엉뚱하게도 그는, 실로 엉뚱한 결단을 다짐하고 있었다. 전상국의 유태중 살해계획에 자신도 기꺼이 동참하리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즉흥적인 결정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유태중에 대한 감정은 어느 때보다 악화되어 있었고 인간적인 그 어떤 동정심도 고갈된 상태였다. 그랬던 것인데, 그녀를 대하고 보니 어떤 수를 써서든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고, 상국이 유태중이를 해친다면 기꺼이 협조하겠다는 결심이 섰다. 13. 주연실을 돌려보낸 김석배가 구간 버스처럼 시내를 돌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총포사 앞에 멈췄다. "요샌 공기총도 참 튼튼하게 나오는군요." "이를 말입니까. 엽총이나 공기총이나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성능 또한 엽총에 절대 뒤지지 않습니다." "이건... 처음 보는 물건인데... 생기긴 총 같이 생겼는데 꼭 활 모양이군요." "이거 말입니까. 모르고 계셨군요. 석궁이라고 합니다. 아주 간편하죠. 소리도 없고 제약도 없습니다. 그저 아무데 어느 때나 사용이 가능합니다. 스포츠용으로 나왔습니다만 사냥용으로도 많이 나갑니다. 실용적이고 용도도 다양하고, 그래서 그런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아, 네... 석궁이라... 이 정도면 사람도 잡겠습니다." "여부 있겠습니까. 노루도 한 방이면 팍팍 나가는데 사람 정도야 우숩죠. 가만있자... 최신형이군요. 스콜피온이라고. 잘 고르셨습니다. 야간조준경까지 장착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캄캄한 밤에라도 이것만 달면 백발백중, 명사수가 따로 없습니다. 원가에 드릴테니 구입하시죠? 노루 둬 마리면 본사리 아닙니까. 아침 일찍 운동삼아 정신건강에도 그만이구요." "글쎄요. 사용하는 방법을... 총 같기도 합니다만..." "사용방법이고 뭐고 없습니다. 그냥 총 쏘는 식으로 이렇게 방아쇠만 당기면 됩니다." "총소리가 없다는 게 매력적이군요. 야간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그렇고. 가격이... 아무래도 비싸겠죠? 총보다는." "다들 그렇게 생각하십니다만, 총보다 훨씬 쌉니다. 선생님이 잡으신 게, 가만 있거라... 정찰가격이 90이라... 60만 원만 내십시오, 현찰로. 할부도 되긴 합니다만, 디씨가 어렵습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석궁이란 거였다. 소리가 없어 누굴 저격하는데는 안성맞춤이었다. 야간에도 적외선 조준경만 달면 백발백중이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사용법도 간단하고 치사율도 높았다. 이만하면 손색없는 무기였다. 당장에라도 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다음에 온다는 말로 참았다. 그만한 돈이 수중에 없기도 하였거니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을 가장 허술하게 산다는 것이 경솔해 보였다. 이왕 놈을 처단할 일이라면 좀더 신중하고도 은밀하게 추진하리라는 각오였다. 감정에만 치우쳐 일을 끝내고 마는 상국이 그래서 불안한 석배였다. 이만하면 무기도 준비되었다.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김석배가 골목과 골목을 끝없이 배회하며 유태중이를 살해할 계획에 고심하고 있었다. 14. 상국이 파김치가 다 된 몸을 풀 새도 없이 방바닥부터 뒤졌다. 그러나 아무리 뒤지고 털었지만 허사였다. 고성만에게 받은 것만은 확실한 것 같은데 그 뒤가 없었다. 어디다 두긴 뒀을 텐데 전혀 기억에 없다니. 그놈의 술 때문이었다. 시간을 되돌려 어제 앉았던 자리로 갔다. 고성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사진 속의 아내의 뒷모습은 밤별처럼 또렷했다. 명치 끝으로 치솟는 불길을 억누르며 상국이 재차 방바닥을 뒤지기 시작했다. 장판 틈새와 이불보와 쓰레기통까지 다 훑었지만 사진은 고사하고 종이쪼가리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주린 개처럼 킁킁거리던 상국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참을 노려보더니 슬며시 일어섰다. 마치 가지 끝에 앉은 잠자리를 잡기라도 하려는 듯한 자세였다. 아내 은숙의 옷과 핸드백이 보였다. 늘 장농 속에 있던 것인데 그날따라 벽걸이에까지 나와 있었다. 상국의 얼굴이 흉하게 문드러졌다. 아내가 외출했었음이었다. 돌아와보니 마침 남편도 없었음이었다. 상국이 은숙의 옷을 후려챘다. 물고기 배를 따듯 샅샅이 뒤졌지만 이렇다할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손이 다시 그녀의 핸드백 쪽으로 갔다. 핸드백을 뒤적이는 손이 떨렸다. 쪽지가 잡혀왔고 금박으로 된 명함이었다. 그가 막 그 글씨들을 읽어내려고 할 때 인기척이 들렸다. 얼른 그것을 바지주머니에 감춘 상국이 문을 열었다. 은숙이 마당 한가운데 있었다. 빨래함지가 들려져 있었는데, 다른 때 같았으면 지극히 자연스러웠을 것이, 그렇게 어색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당신...? 언제 들어왔어요? 잠은 어디서 자구요?" 그녀가 한결같이 걱정했다. 그러나 상국의 눈은 싸늘하기만 했다. "아침은 어디서 들었어요? 근데 오늘따라 당신... 옷은 그게 뭐예요!" 상국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더는 못 참겠던지 문을 쾅 닫았다. '개만도 못한 화냥년'이란 말이 입 안에 가득했다. 밖에선 함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쌩하고 들어왔다. 그녀 역시 무엇에 분개한 듯, 눈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그게 화근이었다. 차라리 그냥 빨래나 널고 있었으면 조용했을지도 모를 집안이, 그녀가 그의 앞에 맞섬으로 해서 풍비박산으로 깨졌다. "그래! 아니란 말야? 두 눈으로 똑똑이 본 사람이 있는데 그래두 아니란 말야!" 상국의 입에서 기어이 포갈이 터졌다. 15. 그러나 뒷짐이나 지고 앉아 물벼락을 맞을 은숙이 아니었다. 겪어온 행내가 그렇기도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어떻게 피할 길도 없었으니, 언어의 단절과 그로부터 오는 불신의 벽이, 뛰어넘거나 돌아가기엔 너무나 높았고, 매디매디 쭉지고 터진 감정의 응어리는 어떤 묘약으로도 다스릴 수 없을 만큼 서로의 가슴 깊히 박혀 있었다. 상국에겐 그것이 증오와 불신이라는 감정으로 폭발했고, 은숙으로선 그런 남편이 무능하고 몰염치하고, 못된 성깔머리만 갖고 있는, 그래서 혐오스럽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어쩌면 오해일 수도 있고, 살아가자면 누구에게나 다 부대껴지는 통례이거나 정표 같은 것일 수도 있겠건만, 그들은 단 한번의 되돌아봄이나 주저함도 없이 불길에 화약을 재이고 있었다. 냉철히 따진다면, 그러한 오해나 편견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가난과 질병과 고독과 투기심을 포함한 모든 공포는,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이면 어느 것에나 다 있는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같이 짊어질 수는 있으되, 남에게 온전히 떠넘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 치의 물러섬이나 타협도 없이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 갈고 있었으니, "뭐예요? 이제보니 이 양반이...! 뭐가 어쩌구 어째요! 술 잘 먹고 외박하고 겨우겨우 들어와선 한다는 말이, 뭐어? 내원 기가 막혀...!" "그래두 이 여자가 요오! 빼두박두 못할 증거가 있는데두 계속 이런 식으루 오리발 내밀겨? 깐에 뭘 잘했다구 조목조목 따지구 대들어! 대들길! 당장 간통죄로, 이 두 년놈덜을 쳐넣던지! 케에엑...!" "증거! 히잉, 증거 좋아하시네! 그래 그 빼두박두 못할 증거라는 거나 한번 구경합시다. 내원 억장이 무너지고 기가 막혀...! 이날 이때껏 당신이 잘나서 같이 살아온 줄 알아요. 낙이 있고 영화가 있어 참아온 줄 아냐구요. 잘났거나 못났거나 디딜방아 뛰어봐야 확구멍 속이라고, 당신이란 양반 하두 딱하구 안쓰러워 마지 못해 살아온걸. 주제에 뭐가 어쩌구 어째욧! 간통? 증거...? 하이구, 생사람 간을 처먹어두 등이나 치구 내먹으슈!" "뭐야! 개만두 못한! 이런 썅...!" 상국의 주먹이 도끼날처럼 떨어졌다. 사진까지 감추고선 저렇게 뻔뻔스러울 것이라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상국의 두번째 손이 올라가기도 전에 은숙이 퍽, 하며 나뒹굴었다. 아무리 병원에 오래 있었다곤 하나 공사판에서 잔뼈가 굵은 상국이었다. 불 같은 성미에 인정사정없이 후려팼으니 한 방에 나동그라질 건 뻔했다. 코피를 줄줄 흘리며 멍머구리처럼 흐느끼는 은숙을 보자 그나마 억누르고 있던 분기가 연막처럼 터졌다. 어차피 이젠 깨진 독이라 생각하니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닥치는 대로 짜들고 부쉈다. 16. 우지끈! 쨍그랑! 와장창...! 어느새 모여들었던지 사람들로 마당이 그득했다. 그렇건만 말리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쌀독 깨질 때만 바라고 섰는, 걸립패들 같았다. 한 집 건너 있는 안 영감이 보다 못하겠다는 듯, 박 씨의 허리를 찔렀다. "이 사람, 박씨. 멋혀! 저러다 사람 잡겠구먼." "허...! 쩝, 부부싸움 아닌가뷰." "답답한 인사! 암만 부부싸움은 개도 안 말린단 말이 있기루. 개쌈두 아녀 저거야... 개하구 닭 쌈이제. 어이구! 저, 저런...! 멋혀! 들어가서 좀 어떻게 해 보라는데두." 박 씨가 들어가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제사 거들었다. 상국이 씩씩거리며 코를 팽, 풀었다. 주위를 일별하더니 그만 휑하니 대문을 박찼다. 상국이 노변 아무 데나 앉았다. 손이 바지주머니로 갔다. 금박된 명함이 햇볕에 빛났다. 상국이 치를 떨며 그 명함을 갈기갈기 찢어냈다. 어금니를 씰룩거리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래도 이제까지 마음 한구석에선 고성만의 말이 거짓말이길 바랬는데, 실낱같이 남아있던 마지막 희망까지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참으로 막막했다. 이 너른 세상에 어디 한 곳 갈 곳이 없다니. "알아봤냐? 내가 부탁하든 거." 이튿날. 상국이 김석배를 찾았다. 은숙은 싸움이 있은 다음부터 집에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 찾지도 않았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그럴 수가 있겠냐. 니가 하두 지랄같어 헛일삼아 알어보긴 했다만..." "결과는...? 구했냐!" "석궁이라고 소리도 안 나고 야간에도 유효한 화살총이 있긴 하더라만... 어쩐지 내키지 않더라. 재고혀봐라. 꼭 그렇게 끝장을 봐야겠드나." 김석배의 말이 어딘지 건성이었다. 상국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좋아.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말 안하마. 돈이나 빌려주라. 천하에 둘도 없는 노랭인 줄은 안다만, 한국이 변호사 비용이 모잘라서 그런다." 상국이 태연했고 김석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국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모를 리 없는 그였다. 한국이 수일 후면 퇴소할 것 같다는 말을 자신에게 들려준 이가 다름아닌 전상국이었던 것이다. 돈봉투를 선선히 건네주는 김석배나, 제 돈처럼 당당히 챙기는 전상국이나 다들 어딘지 이상해보였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틈도 없이 그들은 그렇게 만났다 헤어졌다. 17. 어둠이 노도처럼 덮치고 지상의 별들이 개짖는 소리로 아우성댄다. 황급히 다가왔다 쏜살같이 떠나는 차량의 소음을 빼고는 거리는 그저 한산하기만 하다. 어둠뿐이다. 어둠이 토해 놓는 적막과 불안스러움뿐이다. 그 어둠을 가로질러 유령처럼 떠도는 그림자가 있다. 한길이 옆이건만 고집스럽게도 어둡고 후미진 골목만을 택해 걷고 있다. 해초처럼 흐느적거리던 그림자가 흠칫 몸을 사린다. 바로 앞으로, 가로등이 검시관처럼 버티고 서 있다. 머뭇거리던 그가 징검다리를 건너듯 가로등 밑을 건너 뛴다. 그림자의 모습이 물결에 비친 하현달처럼 출렁거린다. 작은 체구에 야윈 몸집.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이다. 전상국이었다. 수척해 보였다. 피곤해서 그런지 다리까지 절룩거리며 걸었다. 주위를 경계하듯 그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짜증스러울 정도로 손에 든 물건을 챙겼다. 장총처럼 길고 불룩한 보퉁이. 가슴에도 껴안았다 겨드랑이에도 꼈다 하며 주체치 못했다. 그가 다시 골목을 돌았다. 약속된 장소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입을 딱 벌리며 소리없는 한숨을 길게 토했다. 그리곤 한참을 담벼락에 붙어선 미동도 안했다. 그 자의 눈이 섬광처럼 빛나더니 이내 곧 스러졌다. ...그래, 이제 와서, 이제 와서 머뭇거릴 것이란 없는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놈에게 빼앗겼다. 아무런 죄과나 응보도 없이, 거꾸로 매달린 샌드백처럼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만 한 것이다. 복수다. 아내를 겁탈해간 복수이고, 형에 대한 복수이다. 형...! 평생에 한번만이라도 남들 앞에서 떳떳이 형이라고 불러보고 싶었던, 형! 검은 그림자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쇠창살이 그물처럼 어른거리고, 그 안에 갇혀서 울부짖던 한국의 목소리가 귀곡처럼 가슴을 흔들었다. 야, 상국아! 난, 아무 죄가 없다. 할랴고 한 게 아니라 불쌍한 노인네를 구하는 일이라고 혀서... 증말여 야. 몰렀어. 그게 죄가 되는지. 그냥 시켜서 헌거여. 상국아, 넌 믿것제. 내 말... 상국이 치를 떨며 눈을 감았다. 소금기 서린 찝찔한 물기가 입술을 타고 흘렀다. 그래, 죽여야 혀. 그 자식 유태중이 그놈을 내 손으로, 내 손으로 기필코 없애야 혀. 어지간만 했어도 이러진 않을 거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이냐! 나는 그놈이 어떤 놈인지 알지도 못한다. 사감이 있을 리 없고 원수 맺을 일이란 눈꼽만큼도 저지른 적 없다. 그런데도 그자는 내 아내를 갈취했고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돌이킬 수도 없고 다시 일으켜 세울 가망도 없다. 가슴은 갈갈이 찢어진 지 오래로 오직 네놈을 살해하겠다는 생각뿐이다. 18. 흐으...! 화산려... 위는 불이요, 아래는 산이니 괘로 짚어 화산려라. 새집에 불이 났구나. 갈 곳도 없고 올 데도 없는, 허허...적막강산이로고! 망할놈의 늙은이 해필이면 요때 나타나다니... 난쟁이 이로가 어른거렸다. 얼핏 스치고 지나는 이로의 목소리를 잡기 위해 눈을 크게 떳지만 이로는 어디에도 없었다. 상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행버스 안에서 하던 그 말이 너무나 또렷했다. 들풀이나 잡초는 있음으로써 들을 이루고 숲을 이룬다. 세상은 어쩌면 그렇게들 있는 것이 있어서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산에는 나무가 있고 돌이 있고, 바위틈 서리서리 흘러내리는 해말간 옥계가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다. 떠도는 구름이 흐르고 밤이면 별이 보이고 무지개가 솟고, 하늘엔 또 이런 것이 있어야 아름다운 것이다. 들판은 들판대로, 해변은 해변대로, 하다못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시장바닥은 시장바닥 나름대로, 저마다 있을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그 다와지는 것이고, 그 다와진 다음에야 제 빛깔과 성깔이 있는 것이니, 일러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다. 있는 것이 있는 것으로서 아름답지 못할 때, 그것은 이미 생명을 다한 것이고 존재의 이유를 떠난 것이다. 구관조가 사람의 흉내를 낸다고 해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는 새 다워야 하고 사람은 사람 다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 다워지자면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들에 있기 때문에 들새요, 산에 있기 때문에 산새인 것이다. 사나운 맹수조차 사람을 해치지 아니하고 하잘 것 없는 미충도 그 천수를 다하는 이유 또한 이러한 것이다. 자연의 이치가 이러하고 천지의 조화가 이와 같거늘, 항차 사람의 일에서야 일러 무엇하겠는가. 인륜을 어기고 패덕을 삼았다면 그것은 곧 사람의 탈을 쓴 금수일 것이니, 금수의 몸으로 인간의 무리에 끼일 수 없음은 자명한 일. 유태중... 바로 그놈이다! 유태중, 그놈을 없애는 일은 저 항하사의 모래 한 알 없어지는 정도가 아니다. 해변의 모래는 그 한알 한알이 곧 전체를 이룬다. 있을 자리에 있는 것이고, 그래서 그 다운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다. 때문에 해변의 모래 한 알을 들어 올리는 자는 전체 해변과 사막과 온 우주를 들어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유태중... 어림없다! 쓰레기만도 못하고 송충이만도 못한 놈! 설사 모래라 할지라도 밥솥에 떨어진 모래고 지푸라기인 것이다. 그놈을 다스리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내가 없애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이라도 해야 한다. 나 때문이 아니라 나와 같은 피해자가 더 늘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네놈은 사회의 공적이다. 선량한 피해자와 죄없이 당할 파멸을 미연에 막자면 내가 나서야 한다. 부모를 해친 자와는 하늘을 같이 할 수 없고, 형제의 원수와는 이웃할 수 없다 했다. 분명히 그놈이 전화를 받았었다. 19. "나 전상국이란 사람이오. 박은숙이 남편되는. 좀 만나야겠수다. 이유는 당신이 더 잘 알 거고. 내 승질이 원래 지랄 같아 긴 얘긴 딱 질색이우. 그 여자, 법적으루야 같이 있는 걸루 돼 있지만 별거나 마찬가지고. 어떻소. 오늘 저녁 열시. 동산 시비 앞에서 기다립시다. 그럼..." 유태중이 떨떠름한 목소리긴 했지만 알았다고 했었다. 밤 열시. 천천히 걷다보면 시간에 맞을 것이다. 시비라고 했지만 비만 있었지 시는 없었다. 처음부터 백비였는지 아니면 그사이 풍우에 씻겨 멸각되었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비면에 각자된 글귀는 없었다. 그래도 무엇인가 새겨져 있다고 우길 수 있는 것은 떨어져 나간 귀사리였는데, 자형이라기보다는 상형에 가까웠고 그나마 금 간 것이 일정치 않아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구구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다 시비라고 하는 걸 보면 시비(詩碑)는 시비(時匕)인 셈이었다. 상국이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어금니를 씹었다. 보퉁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결연한 표정으로 그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마치 한치의 틈도 없이 정교하게 짜여진 톱니바퀴처럼 그는 정해진 시간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빛이라곤 별빛뿐이다. 멀리서 희끗이 비쳐드는 가로등의 박명을 헤치며 상국이 나무그늘 밑으로 숨어 들었다. 공원이라 그런지 나무들이 많아 은신하기가 쉬웠다. 마음 속으로 장소하난 잘 물색했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심호흡을 크게 들이마신 상국이 시위에 살을 먹였다. 오금이 조여지자 딸깍하고 잠금쇠를 걸었다. 안전장치와 조준경의 이상유무를 확인한 상국이 나무 그늘을 따라 산사면으로 기어올랐다. 시비는 계단 위쪽에 있고, 그는 그 측면으로 붙은 셈이었다. 공제선 위로 시비가 뚜렷했다. 그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선들거렸다. 네놈, 유태중이...네놈도 이제 끝났다. 비석하나 없음을 애석하게 생각지 말라. 네놈이 죽는다면 저 시비는 네놈의 그 추악한 핏물로 점철될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과분한 줄 알아라. 백 번 죽어도 모자랄 놈... 상국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석궁의 총대를 들어올리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총포사 주인의 말대로라면 성능은 최고라 했다. 50미터 이내에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이 힘없이 내려졌다. 저놈을 꼭 죽여야 한단 말인가. 죽여도 된단 말인가. 상국이 어금니를 우드득 갈았다. 그의 손이 다시 올라갔다. 그래, 죽여야 한다. 강변의 모래 한알 만큼도 못한 놈이다. 저놈 한놈만 없어진다면 세상이 온통 조용해지는 것이다. 태어날 때 장래에 대한 약속이 없었듯이 죽고 나서의 일 또한 아무도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저놈을 죽이는 것이다. 달리 무엇을 생각하고 예단한단 말인가. 20. 불그스름한 조준경 속으로 그 자의 모습이 걸려들어왔다. 뒷모습이어서 확인이 불가능했으나 상국으로선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정면이었다면, 그래서 두 눈 똑바로 뜨고 서 있었다면, 아마 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놈의 몸이 약간씩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사정권을 벗어나진 못했다. 상국이 서서히 잠금쇠를 풀었다. 정확히 십자선 안이었다. 손이 떨렸다. 이를 악무르며 눈을 부릅떴다. 싸아한 한광이 그의 눈에서 빛났다. 분노와 원한에 사무친 눈빛이었다. 순간 방아쇠를 잡고있던 손가락에 힘이 주어졌다. 피융! 으아악...! 서성거리던 놈이 고꾸라졌다. 검은 그림자가 마치 새처럼 떨어져 발버둥거리는 것을 확인한 상국이 뛰었다. 계획대로라면 놈의 시체를 하수구에 버리자고 했었다. 아무도 모르게 맨홀 뚜껑으로 덮어버릴 작정이었다. 썩어서 해골만 남도록 놈의 시체를 숨기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작정 뛰었다. 무서웠다. 겁이 났다. 계획이고 완전범죄고 까맣게 잊어졌다. 당장에 도망갈 일이 급했다. 숨이 턱에 닿도록 뛰었지만 발걸음은 야속하리만치 천천히 움직였다. 뛰다가 넘어지고, 살 맞은 그놈처럼 허우적거렸다. 집까지 오기는 왔으나 그저 몽롱하고 불안하여 정신이 없었다. 심장이 어떻게나 크게 고동치던지 집채가 들먹들먹했다. 손이 떨리고 발걸음이 움직이질 않았다. 문부터 열었다. 있어야 할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집을 비운 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니건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제 방에서 자고 있는 딸 미선이만을 겨우 확인한 상국이 그대로 뛰었다. 우선 석궁부터 숨겨야 했다. 하수도 뚜껑을 열고는 그 속에 버렸다. 시멘트로 된 뚜껑을 덮고 나니 감쪽 같았다. 상국이 그제사 휴우, 한숨을 내쉬며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뼈대만 올리고는 그만 둔 가건물이었다. 정신이나 차리자는 생각으로 다리를 뻗고 눈을 감았다. 새처럼 바닥으로 고꾸라지던 그 자의 형상이 너무도 선연했다. 상국이 버둥거리며 다시 눈을 떴다. 입술이 바삭바삭 타들어가고 목줄이 칼칼했다. 다리를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갈 곳은 집밖에 없다. 그러나 들어가기가 싫었다. 정나미가 뚝 떨어져 남의집 같기도 했지만, 누가 꼭 숨어서 지키고 있을 것만 같았다. 김석배의 집을 찾았다. 주위를 연신 살피며 어둡고 후진 골목길만 택해 걸었다. 개라도 짖거나 인기척이라도 들릴 양이면 그는 화들짝 놀랐고, 그 소리가 잦아들고 나서야 길을 가곤 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누가 꼭 뒤에서 미행하는 것 같고 당장이라도 붙잡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21. 식은 땀이 줄줄 흘러 연신 이마의 땀을 훌치며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그러나 김석배는 없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죽으나 사나 집뿐이다. 상국이 머뭇거리며 어디로 가야 좋을지 몰라 하고 있을 때 퍼뜩 스치는 얼굴이 있었다. 그래, 고성만 - 그 녀석이 있었지. 별로 기분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더구나 아내와 유태중의 간통사실을 고해 받은 뒤로는 더욱 서먹서먹했다. 그러나 지금 이 마당에 딱히 알 만한 곳이란 그 자뿐이었다. 상국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커억하고는 가래를 뱉어냈다. 고성만이라면 동산을 지나야 하지 않는가.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무엇에 끌리듯 몸을 움직였다. 놀랍게도 그는 동산 시비공원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천천히, 그러나 모든 것을 각오한 듯, 전에 없이 침착했다. 어둠 속으로 서서히 그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동산이었다. 마치 거대한 선돌 위에 놓여진 반석인 양, 어느 고대의 이름없는 왕조의 묘둥지인 양, 동산은 그렇게 잠이 들고 있었다. 어림하여 저기 시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지상의 모든 죄악과 패륜을 모범으로하여 제물로 바쳐진, 가엾은, 그러나 결코 아쉽다거나 후회될 것도 없는 한 인간이 싸늘하게 뒹굴고 있을 것이다.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던 상국이 발걸음을 돌렸다. 차마 그 앞을 지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선 마냥 뒤척였다. 언제 들어왔던지 은숙이 곁에 누워 있었으나 뱀처럼 징그러울 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한 것만큼 편한 것도 없는 것이다. 모로 누워 있는 은숙이 연신 잔기침을 콜록거렸으나 처음부터 나몰라라 하곤 자는 체, 꿈쩍도 안했다. 겨우겨우 눈을 붙인 상국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나 앉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죽어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난쟁이 이로 노인이 나타나다니. 꿈일 테지만 너무나 선명했다. 허름한 옷에 동강 난 지팡이를 짚고서는 생때처럼 나타났다. 우는지 웃는지 전혀 표정없는 얼굴로 불호령을 질렀다. 그 호령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오금이 저릴 판이었다. '이놈! 이 어리석은 놈! 내 너를 기특히 여겨 백마 한 필을 구하랬더니, 겨우 당나귀더냐. 당나귀고 강아지고 좋다만 이게 뭐더란 말이냐 이놈아!" 난쟁이 이로가 지팡이를 휙 뿌리자 상국의 앞에 떨어졌다. 그런데 떨어질 때까지만 해도 분명 부러진 나무지팡이였었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집어들려고 하는 사이, 그 지팡이는 백마도 아니고 적마도 아닌 한 마리 괴물로 변해 있질 않은가. 그것도 싸늘한 시체로 돌덩이처럼 굳어져 있다니! 상국이 어찌나 놀랐던지 으헉하며 몸서리를 쳤다. 22. 그러잖아도 불안하고 떨리던 속이었다. 잠이 올 턱이 없었다. 바삭바삭 갈라진 입으로 텔레비전을 틀고 라디오를 들었지만 뉴스는 없었다. 죽었을까... 죽었겠지. 살아 있다면... 침착했어야 하는 건데... 죽었으면 죽은 대로 살아 있었으면 살아 있던 대로 무슨 수든 침착했어야 하는 건데... 제기랄...! 다 지놈 운명이겠지.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태어나면서 이제껏 내 뜻대로 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으니... 언제나 세월에 부침되면서 타의에 의해 이끌려 오지 않았던가. 수갑이 채워 진다 해도 달게 받으리라.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다. 그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이리 굴리고 저리 뒤척이다보니 시간이 늦었다. 별 뾰족한 수도 없었다. 그래, 그놈을 찾는 수밖엔... 상국이 석배를 찾았다. 가장 확실한 정보를 가장 믿을 수 있게 얻어낼 곳은 김석배 뿐이었던 것이다. 이발소 문을 열었지만 아무도 없다. 어쩐지 이상했다. 휴업이라면 어디엔가 써붙여 놨을 것이다. 썰렁한 냉기를 발로 걷으며 상국이 내실 쪽으로 갔다. 마침 면도사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상대가 누구인지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내저었다. "죄송합니다만 나가주세요. 영업할 처지가 아니라서..."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나 전상국이오. 이집 사장 친구." 그제사 그녀가 고개를 들었는데, 얼굴이 말이 아니게 창백했다. "다들 어디루 갔습니까? 아무도 없는게..." "모르고 계셨군요? 아직." 상국이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아니면 자신의 전죄를 감추기라도 하듯 태연을 가장했으나 떨리는 말소리를 어쩔 수 없었다. "모, 모르다니요? 뭣을 말입니까!" "말씀드리기가... 돌아가셨답니다. 저희들두 이제 막 들었습니다." "뭐요! 무슨 말입니까. 누가 어떻게 됐다구요?" 상국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망연자실했다. 백납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녀의 다음말을 듣는 그는, 차라리 죽은 시체에 별게 아니었다. "저희 사장님이...피살체루 어젯밤에... 어떤 여자 전화를 받고 나갔다는데 그만... 동산에서 죽어 있는 걸 병원 영안실에 모셨다구... 다들 흐윽...! 그리루 가셨습니다..." "뭐요...뭐라구요... 석배가... 그럴... 리가..." "경찰이 와서... 저희들도 처음엔 믿지 않았어요. 총 맞을 사람이 따로 있지 사장님이...아니! 아저씨! 아저씨! 정, 정신차리세요!" 전상국이 기절했다. 23. 믿기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석배가 죽다니! 그렇다면 내가 석배를...? 상국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도리질쳤다. 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자신은 유태중에게 전화를 했었다. 그놈이 직접 전화를 받았고, 약속했었다. 그러한 사실을 김석배는 알지도 못한다. 김석배가 거기 있을 이유란 만에 하나도 없는 것이다.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기절했던 상국이 병원을 찾았다. 이발소 종업원들과 주연실이 영안실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상국이 정신을 또 잃었다. 묻지 않아도 사실인 것이다. 이럴 수가! 꿈이란 말인가. 아니다! 꿈이래도 이런 꿈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혼미한 정신을 차리고보니 종업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느 놈에게 살해당했나봅니다. 부검 중이라서 저도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등을 찔렸다고... 경찰에선 밤중이라고 하는데, 저희들도 거짓말 같은 게... 어려우시겠지만 힘 내십시오. 아저씨마저 이러시면 장례는 어떻하고 사후처리는 또 누가 하겠습니까." 종업원 중의 하나였다. 부검이 끝났는지 수사관인 듯한 자가 나타났다. 그자가 코를 후룩 풀며 가까운 친척을 찾았다. 연고자가 있을 리 없었다. 좀전의 그 종업원이 상국을 그자 앞으로 떠밀었다. "피해자와는 어떤 관곕니까?" "젤루 친한 친구분입니다. 연고자라곤 이분밖에 없습니다." 예의 그 종업원이 대답까지 대신했다. "좋습니다. 들어가시죠." 수사관이 상국에게 심히 딱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거듭 사무조로 입을 열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피해자는 한 명 내지는두 명, 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만 희박합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살해당했다는 점입니다. 등 뒤에서 찔렸는데 가슴까지 꿰뚫었습니다. 잔악한 수법이죠. 범인이야 주변의 불량배들을 대상으로 수사를 확대하고 있으니까 곧 밝혀지겠습니만, 저희들이 갖고 있는 의문점은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지문 하나 발자욱 하나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 유일한 증거물인 살해도구까지 놈들이 빼돌렸으니..." 상국이 귀를 막고는 오열했다. "제가... 흐흐윽...! 제가 범인입니다. 제가 죽였습니다. 절, 절 체포해주십시오. 으흑!" "진정하십시오. 하나밖에 없는 친구를 잃으셨으니 오죽하겠습니까. 그 심정 백번 알고도 남습니다만 그럴수록 냉정하셔야지요. 이러신다고 사건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자자, 진정하십시오. 저희들이 최선을 다해 범인을 찾고 있으니 곧 잡힐 겁니다." 상국이 울부짖으며 자신이 범인이라고 진술했지만 수사관은 그를 거의 강제적이다시피 끌어냈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주연실 곁에서 음흉스럽게 웃고 있는 자가 있었다. 24. 다름아닌 방유석이란 자였다. 그 자는 주연실의 심복이라도 되는 양, 그녀를 부축하고 있었다. 상국으로서야 누구든 알 바 아니었다. 눈에 들어올 리도 없었다. 이 모든 게 그저 한바탕 악몽이거니 싶었다. 도망을 가? 아니면 자수를 한다? 자수를 해도 곧이듣지 않는 경찰이었다. 정신병자가 아닌 다음에야 아무런 원한도 없는 친구를 쏴 죽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들의 말로는 증거가 없다고 했다. 완전범죄라니! 그럼 누구란 말인가? 혹시... 유태중...? 그래, 그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놈이 어떻게 알지도 못하는 김석배를 대신 사지로 몰아넣는단 말인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설사 그것이 가능했었다 해도 그자는 경찰에 신고부터 했을 것이다. 그런데 경찰에선 증거까지 없어졌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내와의 불륜이 겁이나 그러진 못했다 하더라도 범죄를 비호하여 화살까지 감추어 줄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상국으로선 도시 종잡을 수가 없었다. 사건은 전상국 자신이 저질렀음에도 결과는 엉뚱하게도 제3의 인물에게 돌아가다니.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도까비처럼, 사건의 배후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놈이 누구란 말인가. 문제는 자수를 하느냐, 도망을 가느냐. 이도 저도 아니라면 두 눈을 질끈 감고 모른 체하고 가만히 있느냐. 상국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오열했다. 머리통은 온통 실타래처럼 뒤엉켜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무렇게나 걷고 있던 상국의 머리 속으로 번개처럼 스치는 얼굴이 있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이런 마당에 한국을 생각해내다니! 남보다 못나고 덜 떨어지고 우둔하고 우직했으며, 그래서 늘 다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형. 자기 한 사람의 안위보다는 늘 이웃을 생각했고, 남을 이용하느니 스스로 희생됨을 즐겨했던, 어찌보면 생각이 모자라고 머저리 같게만 생각되었던 형. 끝내는 남의 꼬임에 빠져 영문도 모른 체 구속당해야 했던, 그런 형. 남들에게 부끄럽고 챙피하고, 그래서 이적지 살아오는 동안 '형'이란 말 한마디 못했던 형. 그러나 이젠 누가 뭐라 하든 '한국'이 아닌 '형'이라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앞에 떳떳이 불러보고 싶었다. 상국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떨구며 상국은 걸었다. 눈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절규하듯 마음 속으로 한국을 불렀다. 한발 한발을 천근처럼 내 디디면서, 아무런 영문도 없이, 오직 친구라는 죄 하나로 죽어간 김석배를 장송하듯 묻었다. 25. 상국이 이불을 뒤집어 썼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모조리 망가졌다. 아내는 집을 나갔고 미선인 한국에 딸려보냈다. 으깨어지고 뭉개진 몸뚱이에선 구린내와 외마디만 튀어나올 뿐. 그나마 자위할 것이란 한국의 귀가였다. 돈이 좋긴 좋은가 보았다. 그렇게도 하소연을 하고 청원을 넣어도 철벽 같던 유치장 문이 변호사의 말 몇 마디에 열려지다니. 재판도 없었다. 구속 적부심도 아니었다. 보석이 뭔지는 몰랐으나 한국의 출소는 그 어떤 보석보다 값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더하여, 한국이 배필을 맞아 간 것이 홀가분했다. 가슴은 천근 같은 아픔으로 내리눌리고 있었지만 어깨죽지는 못내 가벼웠다. "몸조리 잘하고 지수씨랑 고만 짜들어라야. 사람이 어디 객기루만 산다드냐. 인내는 쓰고, 뭣이냐 기다림은 달다고 안 하든." "...잘 가슈 형! 내 걱정 말고 형수님이나 건사 잘 하시고. 미선인 내중에 날 풀리면 데리러 갈테니." '형수님'이란 말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던 신옥비. 그 신옥비를 앞세우며 버스에 오르던 한국. 아! 얼마만에 불러보던 '형'이던가. 버스는 떠나갔지만 상국은 언제까지고 대합실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허전했다. 어쩌면 살아 생전에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는 막막한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사라져가는 한국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의 영원한 안녕과 행복을, 기도하듯 빌고 또 빌었다. 잘 가슈.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사슈. 나야 이제 갈 곳도 없는 몸, 그러나 형만이래도 잘 사슈. 아부지 있잖수. 이제 살면 울매나 더 살겠수. 나야 이젠 틀렸수. 내 몫까지 빌겠수. 허고, 못할 짓인 줄 압니다만 미선이까지 부탁하우. 씨알...제기랄 눔의 세상...! 그래, 이젠 아무도 없다. 다 떠나고 떠나갔다. 친구도 없고 형제도 없고, 애지중지하던 딸도 없다. 아내도 없고 이웃도 없고, 의지할 만한 그 어느 것도 없다. 죽은 김석배도 화장을 했다. 못다 한 삶 마저 이루라고 훠이훠이 강물에 띄워보냈다. 뿌연 뼛가루를 바람에 보내면서 울기도 많이 했다. 산에도 뿌리고 강에도 뿌리고, 오죽이나 가고 싶었을 고향길에도 뿌렸다. 아무도 없다니. 이 너른 세상에 진정으로 아무도 없다니!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잠이 들만하면 김석배가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또 어찌어찌 잠이 들만하면 이번엔 죽은 이로가 히죽히죽 웃으며 야료를 부렸다. 며칠 밤을 하얗게 지새운 전상국이 아예 초주검으로 누워 있었다. 26. 그래 이걸로 끝이란 말인가. 항간에 떠도는 말을 들어보면 김석배의 살해사건은 미궁으로 빠져 있는 듯했다. 현장만 있을 뿐 어떠한 증거도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경찰을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치안부재라느니 사회불안이라느니 하는 말은 남아 있는 피해자들의 항변이었지 죽은 자의 유언은 아니었다. 꺼병이별 하나의 스러짐이거나 과꽃 한 송이 떨어짐을 언제까지고 애도할 사람은 없었다. 시간이란 누구에게나 모자랐으며, 관심이란 공존의 미덕이 아니라 자기애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했으니 사람들은 하나같이 바빴고, 자신과는 아무런 이해득실도 없는 김석배의 죽음 따위에 관심을 둘 일이 아니었다.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사회면의 짤막한 토막기사가 전부였다. 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은 언제나 산 자의 편이었고 죽은 자는 영원히 말이 없는 법이었다. 돌을 던진 자는 돌이 떨어지기도 전에 손을 털 수 있었고, 사람들은 늘 구경꾼으로 남아 있기를 원했다. 그렇다면 정녕 이걸로 끝이란 말인가. 나는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친한 친구를... 그에게 죄가 있었다면 돈을 빌려준 죄밖에 없다. 그 돈이 석궁이라는 신종 살상무기를 사는데 쓰이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체 건네준 죄밖에는. 그러나 그것이 죄가 된다면 마땅히 죽어 없어졌어야 할 유태중이 같은 자는 어찌하여 건재하단 말인가. 죽였으리라고 믿었던 유태중은 머리털 하나 건드리지 못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김석배만 살에 맞혀 죽이다니. 운명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가혹하지 않은가. 살인자! 살인자...! 나는 친구를 살해한 살인자이다. 어두워서 그랬다고. 놈이 누구인지 확인을 하고 쐈어야 하는데 그냥 쏜 게 잘못이라고. 하지만 그게 변명이 될 수는 없다. 김석배는 이미 죽었고, 아무런 죄도 없었다. 상국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오열했다. 김석배를 끄슬르기 전에 전에 자수를 했어야 하는 건데... 내가 너를 죽인 놈이라고 용서를 빌었어야 하는 건데...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이 두려워 땅 속에 끌어묻히는 김석배와 함께 침묵하고 말다니... 아, 어찌한단 말인가. 결코 이걸로 끝난 것이 아니다. 끝일 수가 없다. 설사 경찰이 미제사건으로 덮어두고, 세상이 그의 죽음을 함구에 붙이더라도, 심장이 찢어지는 이 고통은 끝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 자수를 하자. 이제라도 자수를 하여 벌을 받자. 평범하고도 소박했던 한 친구는 이제 그 흔한 묘비 하나 없이 한줌의 재로 이승을 떠났다. 그가 남긴 것이라곤 회한과 절망뿐이며 통곡을 해도 찾을 수 없는 한자락 과거의 기억 뿐이다. 무슨 미련이 있어 구차한 삶을 구걸하겠는가. 살아 있다는 것이 신의 축복이라면, 스스로 그 축복이 잘못되었음도 알아야 하거늘. 청천 하늘이 더 이상 자랑스럽지 않고, 따뜻해야 할 솜이불이 결코 편치 못하거늘... 그래, 내가 끝내야 한다. 악몽과 불면으로 시달리다 죽어가느니 차라리 떳떳한 마음으로 목에 칼을 걸자. 참회하는 길은 그것 뿐이고, 죄인에게있어서 유일한 생명수는 참회뿐인 것이다. 27. 그리고 무엇보다 두렵다. 눈초리가 두렵고 그림자가 두렵다. 누군가 등뒤에서 자신이 저지른 범행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생각만 하면 등골이 오싹했다. 유태중일 수도 있고, 아내 은숙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제삼의 인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이든 자신을 감시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확실했고, 그런 보이지 않는 그림자의 눈초리는 세상의 어떤 고문이나 가책보다도 전율스러운 것이었다. 양심의 가책과 그림자의 고문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자수뿐이라고 생각했다. 상국이 결심을 굳힌 듯, 일어섰다. 경찰서가 보였다. 그가 멈칫하고 망설였다. 그냥 모른 척하고 숨어 있어볼까. 죄인은 있어도 범인은 없다고 하지 않던가. 형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저주가 무서워 이제껏 숨어 있지 않았던가. 어디 먼 곳으로 숨어들어 죽은 듯이 살아지낼까. 이렇게 자진하여 잡혀들어 갈 것까진 없지 않은가. 상국이 몸을 부르르 떨며 도리질을 쳤다.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어디엔가 숨어서 그런 그를 비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심호흡을 깊이 들이 마셨다. 하찮은 잡생각일랑 손톱만큼이라도 말자며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곤 결연히, 모든 것을 각오한 듯, 상국은 또박또박 경찰서 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한국의 일로 해서 낯설지 않은 경찰서였다. 수사과 문을 디밀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김석배의 검시를 지휘했던 바로 그 형사였다. 그러나 그자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상국을 보았음에도 얼른 고개를 돌려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수 없이 상국이 먼저 아는 체를 했다. 그제사 그가 어색하게 허리를 굽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김석배 씨의 일이라면 저희들로서도 유감입니다. 자, 우선 이쪽으로 앉으시죠." 무뚝뚝한 말씨로 보아 별로 달갑지 않다는 투였다. 그리고 경찰관 그 자신, 무슨 큰 죄나 졌던지 상국을 기피하는 눈치였다. "저희들로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결과가... 어쨌건 죄송합니다. 놈의 계획이 워낙 치밀하고 완벽해놔서, 현재로선 석궁으로 살해했다는 것만 추측할 뿐 범행동기라던지 용의자 파악이... 어쨌건 이리루 앉으시죠.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이왕 기다리시는 거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전 수사력을 그쪽으로 투입하고 있으니 조만간 무슨 단서라도 잡힐지 누가 알겠습니까. 참으로 희한합니다. 경찰생활 20년이 넘도록 내 이번 같은 사건은 또 처음입니다. 타살은 분명 타살인데 범행동기가 있나 그렇다고 현장이 남아 있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손을 써 보겠는데 이건 허공에 뜬 구름이니. 내 원 이거 속이 터져서. 젠장할!" 그러면서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28. 잠자코 듣고 있던 상국이 그자를 얼핏 눈여겨 봤다. 무엇인가 숨기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면서 지레 능청을 떨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몸서리 치도록 무서워졌다. 지나치게 친절한 것까지 신경에 거슬렸다. 얼른 말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침울하게 얼어붙은 얼굴을 가까스로 쳐들며 상국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제가 범인입니다. 김석배를 죽인 건 바로 접니다." "...!" 경찰관이 전상국을 멍청하게 올려봤다. 그 자는 뒤통수를 묵중한 둔기로 얻어맞은 듯 얼얼해 있었다. 전상국의 말이 띄엄띄엄, 그러나 분명하게 이어졌다. "믿지 못하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저 역시... 저도 처음엔 꿈이거니했습니다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절 처벌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상국이 두 팔을 모아 앞으로 내미는 시늉을 해 보였다. 경찰이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자는 손까지 휘휘 내저으며 곤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번 일은 감정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자꾸 이러시면 저희들만 곤란해집니다. 그러니 제발 기다려 주십시오. 저희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정말 제 말을 못 믿으시는군요. 사실이라니까요. 왜 제가 이런 곳에까지 와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상국이 진지한 듯 보이자 경찰이 고만 울컥 화를 냈다. "정말 계속 이러시깁니까!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 저희들로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사람 우롱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뭡니까! 물론 둘도 없는 친구를 졸지에 잃어버렸으니 그 억울한 심정이야 우린들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꼭 이런식으로 해야겠습니까. 아실 만한 분이." "농담이 아닙니다. 사실이라니까요. 정 제 말을 못 믿으시겠다면 말씀드리죠.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보시면 아마 믿으실 겁니다." "뭐요! 이 양반이 정말...! 좋습니다. 좋아요! 계속 사람을 갖고 노는데 당신, 거짓 증거를 말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 하고 그래. 당장 유치장이야 유치장! 참자 참자 하자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뭐요 그래. 당신 말마따나 조서라도 꾸밉시다. 에이! 쓰바알..." 경찰이 타자기를 메치듯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상국이 고해를 하듯 울먹였다. 그러나 경찰은 타자기 앞에 앉아 있기만 할 뿐 취록할 태세는 아니었다. 상국이 얘기를 시작했고, 경찰이 시큰둥했다. 건성으로 듣기만하던 경찰이, 상국의 얘기가 길어질수록 심각해졌다. 29. "그게... 그게 사실이오?" 상국의 진술을 다 듣고 난 경찰이 자못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나 경찰의 물음에 상국은 그저 딸꾹질로 흐느끼기만 할 뿐이었다. "흐음... 그랬었군. 좋아, 자네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자네가 감추었다는 석궁을 찾아보면 될 일이고.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 이발소 종원업원들의 진술대로라면 김석배는 어떤 여자 전화를 받고 나갔다고 했는데...감이 잡히는 데라도 있나? 누군지." 상국이 담담하게 못을 박았다. "없습니다. 전혀." "흐흠... 다른 건 다 자백하면서, 말해보게. 심증이라도 좋으니. 속일 생각일랑 말고." "뭐요! 속...속이다뇨?" "그렇지 않은가. 자네의 진술대로라면 유태중과 박은숙과는 그렇고 그런 사이라 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모르겠다니. 이거야 어디. 문제는 그 여자가 자의로 김석배에게 전화를 했느냐, 아니면 유태중의 강압에 못이겨 김석배를 끌어들였느냐 이거야. 유태중이 곁에 박은숙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걸세."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제 처가 그때 집에 없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만, 유태중이 그놈과 같이 있었으리라고 단정한다는 것은..." "좋아. 더 이상 묻지 않겠네. 어차피 간통죄는 친고죄니 자네 고발이 없으면 우리도 어떻게 처벌할 수 없는 사안이니. 문제는 또 있어. 유태중이 왜 하필이면 그 많은 사람 다 놔두고 굳이 김석배를 선택했느냐야. 이건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원한의 문제로밖엔..." 상국의 눈에서 퍼런 불이 일었다. 주연실을 보호자처럼 부축하고 있던 사내의 얼굴이 번개처럼 스쳤다. 그럼, 그놈과 유태중과는... 그러나 상국이 모든 걸 포기한 듯 이내 고개를 숙였다. 경찰관의 말이 이명처럼 스쳤다. "그렇다고 문제가 다 풀린 건 아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김석배의 등뒤에 꽂혀 있어야 할 화살. 바로 그 화살을 인멸한 장본인이 누구냐, 이 점이지." 경찰관이 담배연기를 깊이 빨아들이더니 한숨처럼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박은숙... 그래, 일말의 죄책감 같은 것도 있었겠지. 왜냐하면 그 화살만 없어진다면 증거는 완전 유탈되는 것이고, 반사적으로 자네는 영원히 무혐의가 되는 셈이니까. 물론 그 여자에게도 자네와 같은 애정이 아직 남아 있느냐 하는 것이 전제이긴 하지만 말일세." 경찰관이 담배불을 끄고는 수갑을 꺼내들었다. 고개를 푹 숙인 상국이 두 손을 내밀었다. 창 밖에선 하얀 바탕에 검은 점이 박힌 나비가 너울거리고 있었다. 바람결처럼 너울거리는 나비는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으나 앉을 만한 마땅한 곳이 없던지 힘겨운 날개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끝)